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03
제603화. 피의 항복
“두 시간, 거의 다 됐습니다.”
마법사들은 시계를 확인하며 성문 쪽을 쳐다봤다. 주어진 시간이 다 되어 가건만, 푸르파토 안쪽에서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공중에서 주시하던 마법사들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별다른 반응이 없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몇 분 남았지?”
“정확히 1분 30초 남았습니다.”
“트웰러 장관께 전달하라.”
“예, 알겠습니다.”
마법부가 아닌 제국방위부가 주도하여 선공하자는 뜻이다. 이름이 가져다준 맹세의 허점이 먹혀들지는 모르겠지만, 푸르파토 저자들의 결정이 저러하다면 바리엘도 가만있을 수는 없다.
마법사들이 알겠노라 대답하며 몸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성문에 백기가 걸렸습니다!”
“이안 님! 버고스 국기가 내려갔습니다!”
성문 제일 위쪽, 위용 있게 휘날리던 검은빛 버고스 국기가 내려가고 백기가 올라온 것이었다.
명백한 항복이었다. 마법사들은 미소를 띠며 서로의 어깨를 쳐댔고, 트웰러는 진에게 보고하고자 급히 진영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되었습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푸르파토를 지나갈 수 있습니다.”
“이안 님, 백기 앞 손 흔드는 자가 있습니다. 저희가 먼저 다녀올까요? 혹시 함정일 수도 있으니 안쪽을 둘러본 다음 성문을 지나는 게 좋겠습니다.”
“그것이 좋겠다.”
“토미! 나키나!”
“네네. 갑니다. 가요.”
“와아아아!”
바리엘 병사들의 환호가 조금씩 커지는가 싶더니, 천지를 우렁차게 흔들었다. 제아무리 맹렬하게 맞서던 적군도 바리엘이라는 이름 앞에는 싸우기를 거부하고 항복하는구나! 대제국의 병사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워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지이잉! 지잉!
헤일과 토미, 나키나가 거리를 적당히 유지하며 푸르파토 성벽으로 다가갔다. 보이는 자라고는 넋이 반쯤 빠진 병사 한 명뿐이다.
“바리엘의 마법사, 헤일 대장이다. 푸르파토는 항복을 결정했나? 공식적인 입장이라면 황제 폐하께 보고할 것이다.”
“…그래, 우리는 항복하기로 했다. 성문을 열 터이니 바리엘은 약조한 대로 그 어떤 소란 없이 지나가라.”
헤일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중대사안을 전달하는 게 어찌하여 라우탄이라는 자가 아니라 저런 일개 병사인 것인가?
토미와 나키나도 의아함을 느꼈는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다른 병사들은?”
성벽에 아무도 없다. 무기를 쥔 채 격렬히 저항하던 푸르파토인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게다. 그저 눈앞의 병사가 다였다
“우리는 항복했지만 버고스인이다. 마음 깊이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껴 바리엘이 푸르파토에 들어서는 걸 지켜볼 수 없다. 그대들은 푸르파토 중앙 길을 따라 반대쪽 성문으로 나가면 된다. 곧장 나아가면 칼라마트까지 어럽지 않게 당도할 것이다.”
병사가 울먹이며 눈물을 훔쳐냈다.
뜻밖의 행동들이긴 하지만, 바리엘 입장에서는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사안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와 있든, 안에 숨어 있든 무슨 상관인가?
병사는 할 말 다 했다는 듯, 서둘러 성벽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지이잉! 지잉!
퍼엉!
헤일은 마력을 가볍게 터트리며 바리엘 진영 쪽에 신호했다. 항복이 맞으니 이동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병사들이 다가오는 동안, 헤일과 토미, 나키나는 푸르파토 위쪽을 날아다니며 수상한 흔적이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진짜 아무도 없네요. 거리에 한 명도 안 보입니다.”
“모두 건물 안에 숨어 있다, 이거지? 헤일 대장, 별일 없는 거 맞겠지요? 갑자기 튀어나와 덤비면 완전히 포위당하는 건데.”
“병력 차이가 크다. 포위와 매복을 위한 포석이라 하기에는 성문을 개방함으로써 얻는 위험이 훨씬 커. 라우탄이라는 자, 잘은 모르겠지만 그리 어리석은 선택을 할 것 같지는 않다.”
“흐음. 그것도 그렇긴 합니다. 도시도 생각보다 작고요.”
한가운데, 푸르파토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는 구조다. 성문에 들어서서 그대로 직진하면 반대쪽 성문으로 나갈 수 있으니, 두어 시간이면 모든 바리엘 병사들이 통과 가능할 것이다.
촤아악!
헤일과 두 사람은 재빠르게 복귀하여 푸르파토 상황을 이안에게 전달했다.
역시나 뜻밖의 행동이라 여겼는지 이안도 의아한 낯을 보였다. 지금껏 수많은 전장에서 항복을 받아냈었지만, 모습을 감춘 채 은둔하는 자들은 본 적이 없었다. 수치심에 그런 것이라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여겨지지만…….
“알겠다. 푸르파토 안으로 진입한다. 황제 폐하 주위로 호위를 단단히 세우고, 마법사들도 황궁친위대를 도와 보좌한다. 푸르파토를 통과할 때까지 황제 폐하 옆으로 보호막을 치도록.”
“예, 알겠습니다. 이안 님.”
“움직여라! 성안으로 들어설 것이다!”
“와아아아! 바리엘! 바리엘!”
“열어라! 좌우로 밀어라!”
바리엘 병사들이 성문을 좌우로 밀어젖혔다. 걸쇠가 걸려 있지 않아 아무 저항 없이 열렸다.
조금씩 열리는 틈으로 성안 풍경이 보였다. 휑하다. 사람 한 명 없는 터라, 바리엘 병사들은 신기해하면서도 어색한 기분으로 푸르파토로 발을 디뎠다.
끼이익!
쿠웅!
“조용하네. 크흠.”
“그러게. 쥐 죽은 듯이 고요해.”
“괜히 이러니까 긴장되잖아? 이놈들! 크하핫!”
“가자, 가자! 앞으로 가자!”
인기척이라고는 하나 없는 작은 도시. 바리엘 병사들은 상대가 항복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괜히 긴장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는 마법부와 제국방위부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어떤 식의 함정이 있을지 몰라 보호막을 계속 유지하며 광장 쪽으로 조심스레 움직였다.
-뀨유?
“왜 그래?”
한편, 푸르파토 창공. 베릭은 뀨의 등에 업혀 아래 구석구석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잘만 날던 놈이 갑자기 멈춰서서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는 것 아닌가? 서둘러 움직이자고 뿔을 잡아당겨 봤지만, 뀨는 꼼짝하지 않았다.
-뀨뀨!
“지랄하지 말고 갈 길 가자? 얘가 밥 잘 처먹고 왜-”
그때, 베릭도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멈칫거렸다. 그러고는 뀨처럼 고개를 한껏 빼든 채 콧구멍을 벌렁거리는 것 아닌가.
한창 긴장하며 순찰하던 마법사들이 이를 보곤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장난치지 마! 베릭!”
“아니, 장난 아니고, 이거 냄새 안 나?”
“…무슨 냄새?”
“이거, 점점 진하게 나는데.”
설마 독성 물질인가? 마법사들은 등골이 서늘해지며 재빠르게 이안 쪽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베릭은 뀨와 함께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냄새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집중했다. 비릿하고, 달착지근하며, 어딘가 끈적한 이 느낌은…….
지이잉! 촤아악!
보고를 받은 이안도 단숨에 날아올랐다. 그러자 베릭과 뀨가 동시에 알았다는 듯 눈을 번쩍 떴다.
“베릭, 왜 그래?”
“이안아, 이거 피 냄새다.”
“…피?”
“바람 때문에 헷갈렸네. 피 냄새 맞아, 이거. 근데 한곳에서 나는 게 아니라 사방에서 진동해.”
베릭의 말에 이안과 마법사들이 멈칫했다. 피라니? 지금 푸르파토는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하고 적막하다. 피가 흐를 만한 상황이라 하면, 하나밖에 없지 않나?
‘자결.’
수호자에게 이안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죽겠노라 이르던 라우탄이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어째서 베릭과 뀨가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는지다. 고작 한 명의 죽음을 감지할 만큼 그들이 예민했던가? 아니면…….
삐이익!
그때, 호각 소리가 찢어지게 울렸다. 성안으로 들어섰던 병사들이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이안은 트웰러 쪽에 자신들이 움직이겠노라 전달했고, 서둘러 성벽으로 날아갔다.
타앗!
“무슨 일인가?”
“구, 국기를 바꿔 달려고 올라왔는데, 안쪽 병사들이 모두 죽어 있습니다.”
“…….”
병사의 말에 이안이 안쪽으로 들어섰다. 순간 강하게 올라오는 피비린내. 수십 명이 훌쩍 넘는 자들이 제 심장을 찌른 채 쓰러져 있었다.
충격적인 광경에 바리엘 병사들은 물론이고, 마법사들도 굳어버렸다.
“…이안 님. 여기 탁자 위에 먹지 않은 음식이 있습니다. 의식용인 것 같은데요.”
“수호자에게 기도하며 자결한 것일까요?”
“으윽, 세상에. 어리석어도 정도가 있지.”
“이안 님. 우선 트웰러 장관께 알리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수색을 명령해 주십시오. 목적이 있는 죽음이라면 그게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죽은 자들의 표정을 살폈다. 온화한 죽음이다. 스스로 심장을 꿰면서도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못한 게 분명했다.
타닥타닥!
끼이익! 쿠웅!
“여기도 죽어 있습니다!”
“이쪽도 자결했습니다!”
“세상에, 여, 여기는 시체가 열 구입니다!”
수색 명령을 받은 바리엘 병사들이 문을 열어젖히는 족족 시신들이 발견됐다. 모두 똑같이 심장이 꿰인 것으로 보아 사전에 자결 방식을 통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적군에게 항복했다는 수치심 때문이 아니라, 죽음 자체를 숨기고자 했던 게다.
수만의 바리엘 병사들은 푸르파토를 지나가면서, 수색병들의 시체 발견 소식을 귀로 담았다.
“다 죽었다고? 스스로?”
“항복할 바에는 죽겠다, 이건가? 그러면 뭐 하러 성문은 열었대? 그냥 걸어 잠그고 죽었으면 적어도 우리가 들어올 때 고생이라도 했을 거잖아.”
“알 수가 없네, 정말. 버고스인들이란.”
“윽. 저쪽 계단에 묻어 있는 거, 피지?”
“보지 마, 재수 옴 붙는다.”
기괴하고, 이해할 수 없는 푸르파토인들의 광기에 바리엘 병사들의 기세가 단숨에 꺾였다. 힘차게 내디뎠던 발걸음은 조심스러워졌고, 크게 울리던 함성과 웃음은 사라진 지 오래다.
연신 시체 발견 소식만 들리던 그때였다.
“생존자입니다!”
살아 있는 푸르파토인이 발견됐단 소식이었다. 그는 순순히 병사들 손에 끌려 나왔는데, 거의 자포자기하는 몸짓이었다.
병사들이 그자의 목에 검을 겨누자, 사내의 눈매가 매섭게 변했다.
“항복하면 살려준다고 해서 성문을 열었건만, 대제국 바리엘의 약조라는 건 바람보다도 가벼운 것인가 보군! 황제의 이름에는 무게조차 없나?”
“닥쳐라!”
“그만.”
흥분한 병사가 검날을 눕혀 내려치려고 하자, 이안이 제지했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회의를 한 것인가? 항복하면 살려준다고 하였는데, 항복과 죽음을 동시에 선택하는 어리석음이 이해되지 않아 묻는다.”
“…어리석다 하지 마라. 목숨을 건 자들을 모욕하는 것이니. 그저 지나가! 소란 없이 떠나가는 것이 조건 아니었나?”
“소란은 그대들이 피우고 있다. 이만한 시체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바리엘 입장에서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정확한 정황을 이르지 않는다면 약조한 것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이안이 그리 이르자, 사내가 나왔던 건물에서 한 아이가 맨발로 뛰어나왔다. 아이는 엉엉 울며 제 아비의 앞을 가로막았고, 이내 무릎 꿇은 채 이안에게 빌었다.
“안 됩니다! 우리 아버지 죽이지 마세요!”
“나오지 말라니까!”
“아버지, 안 돼요. 죽이지 마세요. 제발요. 제가 다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그저 가던 길 가십시오.”
사내가 아이를 막아내려고 했지만, 병사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아이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라우탄 님이 먼저 자결한다고 하셨습니다. 푸르파토 안쪽 어딘가, 이안 히엘로의 이름을 부르짖으면서 죽겠노라 하셨어요. 대신 남은 사람들은 항복하여 안위를 도모하고… 바, 바리엘을 통과시켜 주는 것으로 하고요.”
“안 돼! 입 다물어!”
“그런데 그분이 떠나시고 나서 누군가 말했습니다. 수호자와 마법부 장관 사이의 약속에 대한 게 아니라, 우리가 따로 수호자께 기도하면 될 것 아니냐고요.”
이안이 멈칫거렸다. 사내는 머리를 바닥에 박고서 눈을 감았고, 아이는 계속해서 조막만 한 손을 빌어댔다.
“죽은 자들은 그걸 위해 자결한 것입니다. 여기 산 자들은 모두 바리엘에 항복한 사람들이고요. 그러니까 제발 죽이지 마시고 가주세요. 우리 아버지, 살려주세요.”
‘수호자께 기도를 따로 올렸다 하면…….’
이안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바리엘을 지휘하는 자이자, 바리엘 그 자체인 존재.
수호자께 새로이 기도하였다면, 필시 그 대상자는 자신이 아니라……
‘진이다.’
* * *
그 시각, 푸르파토 광장 중앙.
수색대를 앞서 보낸 뒤 여유롭게 뒤따르던 진은, 문득 광장 한가운데 세워진 거대한 사슴 조각상을 올려다봤다. 참 아름답다 여기는 것도 잠시, 진은 멈칫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저, 조각상…….”
사슴 눈이 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