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05
제605화. 에이린
성기사(聖騎士).
마력을 비롯하여 특별한 권능은 없지만, 영혼이 맑고 올곧아 질서를 세우도록 선택받은 자들이었다.
대부분 신전에 기거하여 그곳을 수호하는데, 일반인이 보기에는 참으로 의아한 존재들이다. 마검사처럼 무위가 출중한 것도 아니고, 신관처럼 기도를 직접 올리는 일도 없지 않나?
하지만 신을 모시는 자들이라면 성기사의 의의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신의 반대 세력이 아닌 내부의 존재가 섭리를 거스른다면, 오로지 성기사만이 그를 처단할 수 있을 터이니.
“으아아악! 저기!”
“나타났다! 뭔지 모르겠지만, 또 나타났어!”
“사슴 아닌가? 푸르파토의 수호자인가?”
“젠장, 밀지 마! 대열을 유지해!”
거대한 보랏빛 사슴이 나타났을 때, 에이린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이는 생전 처음 느끼는 울림이었고, 내면 어디선가 내지르는 환호였다.
바리엘 병사들이 두려워 뒷걸음치는 동안, 에이린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앞으로 다가갔다. 물살을 헤쳐 오르는 것처럼.
-에이린.
그리고 귓가에서 울리는 따스한 음성.
에이린은 자신도 모르게 왼쪽 어깨를 붙잡았다. 대마물의 습격에서 칼로 그어냈던 십자가가 불타오를 듯이 뜨거워진 것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겨 대열을 이탈했고, 광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녀를 제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에이린.
자신을 부르는 이 목소리! 대체 누구란 말인가?
에이린은 화답하듯 뛰었고, 이내 저 멀리 익숙한 남자를 발견했다. 바리엘 뒷골목에서 자신을 계속 따라왔던 은발의 사내다.
왜 이런 곳에 그가 있을까 싶은 의문도 잠시, 에이린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황제로구나.’
그리고 신을 배신한 자가 황제를 죽이려 들겠구나.
에이린은 망설임 없이 검을 빼 들었다. 황제 인근을 호위하던 병사들이 가로막으려 했으나,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신성한 기운에 우뚝 멈추고 말았다.
에이린은 가볍게 그들을 지나쳐 황제 앞으로 뛰어들었다.
촤아아악!
바리엘 병사들에게 보급되었던 일반적인 검이었다. 하지만 황제를 위협하는 공격에 맞서는 순간,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끼쳐 오르는 걸 느꼈다.
빛을 가른다는 게 이런 것이로다. 바람을 헤아린다는 게 바로 이것이로다. 그리고 신(神)의 부름에 응답한다는 것 또한 이런 것이로다.
“…너는.”
진의 중얼거림에 에이린이 뒤를 돌았다.
스스로 그어냈던 십자가가 모습을 보였고, 풍성한 갈색 머리칼이 사정없이 휘날렸다. 에이린은 모를 것이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초원을 평정한 사자(獅子)와 같다는 걸.
“…실례했습니다.”
에이린은 황제에게 예를 취하면서도 검을 내리지 않았다. 심장이 계속 뜨겁게 들끓었다. 상대를 처단하기 전까지 계속될, 영광스러운 고통이었다.
“에이린. 그대가 황제 폐하의 호위를 맡아라!”
이안을 제외한 모두가 에이린의 등장에 어리둥절했다. 대체 누구신데 갑자기 나타나 수호자의 공격을 쳐낸 것이오? 이안 님은 또 어떻게 그대를 아는 것이고?
모두 궁금한 것이 한 무더기였으나, 재차 이어진 사슴의 공격에 질문을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촤아악!
“온다!”
“보호막 펴!”
“으아아앗! 바로 깨집니다, 젠장할!”
“깨지든 말든 계속 펼쳐!”
일시적일 뿐이지만, 마법사들의 보호막은 사슴의 공격 속도를 일차적으로 늦추는 효과가 있었으니.
이안이 사슴에게 파고드는 동안, 에이린은 황제 앞에 서서 끊임없이 공격을 쳐내고, 또 쳐냈다.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그녀의 갈색 머리칼이 힘 있게 들썩였다.
솨아아.
진은 넋 놓은 채 에이린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작고 가녀린 몸이었지만 움직임은 날랜 전사의 것이다. 꿈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훨씬 따뜻한 기운을 지닌 자다.
지이잉! 지잉!
「회록(回祿)」.
잠시 멈추었던 이안의 마법이 다시 시전되었다. 거대한 불길이 그를 감쌌고, 이내 바스락거리며 옭아매던 이파리들을 죄다 태워버렸다.
목표 지점은 사슴의 금빛 눈동자.
이안이 빠르게 날아들며 놈에게 주먹을 뻗었고, 화염이 솟구치며 사슴의 머리통을 그대로 관통해버렸다.
촤아악!
-……!
일격(一擊)이다. 사슴은 비명을 내지르지도 못한 채 휘청거렸고, 이내 쓰러졌다.
대지가 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울림. 석판에 적혀 있던 전설 속 이야기처럼, 보랏빛 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죽음의 전조다.
타다닥! 타닥!
불길이 옮겨붙은 나무들도 잿더미로 바뀌어 허공에 흩날렸다. 하늘은 다시 푸른색을 되찾았으나, 건재했던 도시는 일순간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찼다.
허겁지겁 뛰쳐나온 푸르파토인들이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터전을 둘러봤다. 모든 게… 불타고 있다.
“세상에, 도시가…….”
“저, 저게 푸르파토의 수호자란 말인가?”
“수호자가 죽었다. 죽었어…….”
“가만 서 있지 말고 물이라도 길어와!”
“안 돼, 안 돼…….”
“정신 차려! 괜찮아! 남은 것이라도 지키면 된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물을 길어와 끼얹었고, 바리엘 병사들은 이를 난감한 듯 바라봤다. 전쟁을 떠나 도의적으로 도와주고 싶기는 한데, 명령 없이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황을 정리하라.”
그 모습을 본 진이 나지막이 명령했다. 사슴 하나만을 위한 지시가 아니다. 너무도 혼란스러운 상황인지라 우선은 정리가 필요했다.
제일 먼저-
“어딜 가는 거지?”
슬그머니 복귀하려던 에이린이 멈칫했다. 마법사는 물론이고 마검사들도 신기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뒤늦게 난처한 감정이 밀려왔다. 상처가 가라앉으며 흥분도 가라앉은 게다. 무단으로 대열을 이탈했으니, 중죄 중의 중죄다.
“…예?”
“에이린?”
“예, 그렇습니다. 폐하.”
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로버사이드를 대신해서 몇 번이고 꿈에 나온 것도 모자라, 이제는 검을 다잡고서 제 앞에 뛰쳐나왔다. 게다가 마법사들도 버텨내지 못했던 공격을 연신 쳐냈다. 과연 이것이 가능키나 한 일인가? 대체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진의 한숨이 깊어지자, 다들 눈치껏 침묵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왜, 왜지? 왜 한숨 쉬시지?’
‘우리가 공격 못 막아내서 그런가?’
‘흐엉. 안 되는 걸 어떡해?’
‘몰라. 안 되도 되게 하는 게 우리 일이잖아.’
투욱.
그때, 이안이 가볍게 착지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쏟아졌다. 다들 그의 등장을 반기며 눈을 반짝였다.
“폐하. 송구합니다. 마법사들에게 화재 진압과 사체 수습을 명령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코렐라.”
“네! 이안 님! 아코렐라 대기 중입니다!”
“가서 사슴 사체를 정리하고-”
“앗싸! 감사합니다! 알아서 잘 해보겠습니다!”
“아코렐라! 나도! 고기 좀 떼보자!”
“대가리에 검 박혔니? 베릭아, 배 채우는 건 다른 고기로 해. 저건 연구용이란다.”
“윽, 말투 왜 저래?”
“다른 마법사들은 화재 진압에 전념하도록.”
“옛! 갑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타앗!
마법사들은 이때다 싶어 서둘러 흩어졌다.
한편, 에이린을 가만 지켜보던 진이 이안에게 물었다.
“이안 경. 이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나?”
“예, 폐하. 대마물의 전투 당시 살아남았던 병사인지라, 기억합니다.”
“북쪽 지대 선발 병사 중 한 명이었다고?”
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존한 병사들은 빠짐없이 진이 직접 대면하여 공로를 치하했다. 만났더라면 분명히 알아봤을 터.
‘아.’
…그렇구나.
천 너머, 몸을 가린 채 상처를 치료하던 그 여자 병사가 바로 에이린이었던 게다. 참으로 어이없는 엇갈림에 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안은 진의 반응을 잠시 살핀 다음, 조심히 일렀다.
“송구합니다, 폐하. 확신이 없어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니, 아니다. 이안 경이 사과할 일은 아니지. 내가 그대였어도 이르지 못했을 것이라. 게다가 지금은 전시 중 아닌가.”
지금 황제와 마법부 장관이 저를 두고 무슨 말을 하는 거람? 말씀이라니? 무엇을? 에이린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사람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고개를 들라.”
이안의 명령에 재빨리 자세를 바로 했지만 말이다.
방금까지 용맹하던 전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병사 한 명만이 서 있다. 하긴, 황제와 마법부 장관 앞에서 편한 말단 병사가 어디 있겠냐마는.
“성기사라면 신전에서 반대가 심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 일반 병사로 입대한 것에는 무슨 뜻이 있는가?”
이안은 에이린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 상정한 채 질문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송구합니다. 저는 아까 상황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깨에 새긴 상처가 뜨겁게 타오르고, 귓가에서 누군가 제 이름을 다정히 불렀습니다. 신의 배신자를 처단하는 것 외 어떠한 목적도 없었습니다. 대열을 이탈한 것은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이안과 진이 서로를 쳐다봤다. 에이린은 성기사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
세 사람은 동시에 침묵하며 서로를 힐끗거렸다.
진 입장에서는 그대가 로버사이드를 대신해 계속 꿈에 나왔고, 중앙에서도 만난 적이 있으며, 그래서 줄곧 찾고자 했다는 말을 쉬이 꺼낼 수 없었다.
반면 에이린은 단순히 아무것도 모르기에 할 말이 없었다. 고작 이렇게 짐작했을 뿐.
‘…성기사? 설마 후방으로 빠지나?’
신의 부름까지는 영광스러운 일이라 하지만, 그 때문에 후방으로 편입되는 건 원치 않았다. 자신은 앞장서서 바리엘을 위해 싸우고 싶었으니까.
‘난감하군.’
마찬가지, 이안도 진과 에이린 사이의 일인지라 섣불리 말을 얹을 수 없었다. 인연에 제삼자가 끼어서 무엇하겠는가?
꽤 긴 침묵이 이어지자, 보다 못한 이안이 헛기침하며 진에게 눈짓했다.
“폐하. 대열을 이탈한 것은 문제 되는 사안이 아닐 것 같습니다. 성기사의 발견은 병사들에게도 사기 진작이 될 터. 무엇보다 폐하의 앞을 지킨 자 아닙니까? 후한 포상을 내리심이 옳겠습니다.”
“아아, 그래. 그러지. 혹여 바라는 게 있는가?”
“바라는 것 말씀이십니까?”
“무엇이든 좋다.”
잠시 고민하던 에이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습니다.”
“없다고?”
“예, 바리엘 병사로서 황제 폐하를 지킨 것은 당연한 일이고, 무엇보다 정말로 바라는 게 없습니다. 굳이 말씀하라 하시면… 보직 변경만은 재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금 부대에서 싸우고 싶습니다.”
진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차마 말을 뱉지 못하고 닫아버렸다. 그리고 이내 허락한다는 듯 손짓했다.
“…알겠다. 원하는 대로 하라.”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가도 되겠지요? 에이린은 주위를 힐끗거리며 눈치 봤고, 이내 트웰러의 고갯짓에 예를 갖추며 물러났다.
총총거리며 사라지는 뒷모습이 어찌 저리 천진한가? 진은 허탈해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자신이 어이없었다. 꿈에서 자주 보았다고, 홀로 친밀감이라도 쌓았나 보다.
“이안 님. 화재 진압은 다 했습니다. 그런데 사슴 사체가 다 녹아내려서 건질 게 없더라고요. 완전히 소멸한 것 같은데,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허공을 날아와 착지한 마법사들의 보고에, 이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파기되었겠지.”
계약이 유효했던 기간. 자신을 위해 기도한 자에게는 행운이 갔겠지만, 사슴이 죽은 지금은 다 끝이다.
부디 그 짧은 시간 동안 필리아가 행운을 거머쥐었기를 바랄 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