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08
제608화. 모녀의 제안
“카일라 영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니, 무엇이오?”
한 남자가 다 먹은 와인 잔에 궐련 재를 털어대며 물었다.
영애라 부르며 존대하고 있긴 하지만, 이는 허울이다. 무기 거래를 직접 담당했던 다니트 부인도 아니고, 전시가 되자 홀린가는 곧장 사업을 정리하려 들지 않았던가? 그들이 바리엘의 공작가인 이상 황제에 대항할 방패막이와도 같았으니, 이처럼 태도에 문제가 드러나는 건 당연했다.
카일라도 이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하나 묻겠습니다. 왕당파 여러분께서는 혼란스러운 버고스를 통일하고, 런크비스 왕가의 역사를 계속 잇고 싶으신 것이 맞는가요?”
당연한 소리를 어찌 묻는단 말인가? 런크비스가의 존속은 그들이 결집한 명분이자 대의였고, 목표다. 관료들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서로를 힐끔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대답해 주십시오. 왕가의 존속을 원하시는지.”
“두말하면 입 아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라네.”
“그렇다면 다시 묻습니다. 혹시 다몬 왕을 대신하여 바리엘로 가실 분 계십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 뜻밖의 발언인지라, 다들 어떠한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멈칫거렸다.
카일라는 그들 사이를 천천히 걷더니, 뒤쪽에 마련된 찻잔을 집어 들었다.
“버고스어를 완벽히 익혔다고 여겼는데, 오만이었나 봅니다. 다시 이르겠습니다. 다몬 왕을 버고스로 귀환시키는 대가로 바리엘에 가실 분 있습니까? 치환이라 생각하시면 편하겠군요.”
“카일라 영애. 지금 그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겐가?”
“물론입니다. 제 의지대로 나온 말인데, 모를 리가 있나요. 도리어, 경들께서 이해를 거부하시는 것 아닙니까?”
카일라가 싱긋 웃으며 찻잔으로 목을 축였다.
“아시다시피, 저는 홀린 공작가의 여식입니다. 홀린가는 현재 바리엘에서 제일가는 가문이라 단언할 수 있지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런크비스의 피가 흐르기도 합니다. 경들께서 어머니와 거래한 연유가 바로 그것 아니었나요?”
“그렇긴 하지만-”
“그러면 황제 폐하께서 보시기에 제 가치가 어느 정도일지, 경들께서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홀린가에서 바리엘 황후 자리를 노리고 있노라 전해 듣기는 했지만,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파악 불가였다. 어디까지나 흘러서 들어온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버고스에 대한 자치권을 인정받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저와 어머니는 홀린가의 명예를 걸고 황제 폐하께 제안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왕당파 또한 합당한 성의를 보이셔야지요. 현재 런크비스가의 적통인 다몬 왕이 살아 있으니, 왕께서 버고스로 귀환하는 게 맞습니다. 그를 대신하여 희생하실 분이 있는지를 묻는 겁니다.”
날 선 침묵이 이어졌다. 적막 속에서 서로를 염탐하는 시선이 오갔고, 그들은 섣불리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했다.
다몬 왕이 돌아오는 것은 결집을 강화할 좋은 일이다만, 거기에 ‘자신의 희생’이 필요한 것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지금껏 내전 속에서 어떻게 버텨 왔는데, 새로이 세워질 버고스에 자신의 몫이 없다니.
“크흠.”
그들은 다니트 부인과 함께 떠난 샹데트를 떠올렸고,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챘다. 지금 그가 여기 있었더라면 자연스럽게 샹데트를 추천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흘러갔을 터인데…….
“샹데트는 어떻습니까?”
누군가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 발언했다. 이는 추천을 가장한 축출이다. 개중 제일 젊고 영향력 없는 자를 바리엘로 밀어 넣어 위기를 넘기고자 하는 졸렬한 태도.
카일라가 단호하게 손을 들어 보이며 거절했다.
“샹데트 경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을뿐더러, 황제 폐하께 성의를 보이기에 그는 부족한 자입니다.”
이럴 줄 알고 다니트 부인이 샹데트를 데리고 간 것이로구나. 샹데트가 여기 남아 있었더라면 압박으로 자진해서 나섰을지도 모를 일.
몇몇 간부들이 의도를 알아채고서 표정을 굳혔다. 다니트와 카일라 모녀가 만든 판이 뒤늦게 보이기 시작한 게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제안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뜻하시는 바가 없다면 못 들은 것으로 하십시오.”
카일라는 신경 쓰지 말라며 가볍게 덧붙였으나, 그 발언의 무게는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런크비스가의 존속을 위해 모였다는 자들이, 왕을 위해 단 한 명도 나서지 않는다면? 왕당파라는 명분 자체가 사라지고, 이는 버고스에서 지지 기반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그리된다면, 바리엘에서 왕당파를 주시할 필요가 없지 않나?
‘누군가 나서지 않으면, 다 죽는다.’
그저 형체 없이 넌지시 던져진 제안이었다.
하지만 제국의 공작이자, 런크비스가의 방계 혈통이고, 황후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적지 않은 자가 언급함으로 인해, 그 제안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왕당파 턱밑을 파고들었다.
‘처리할 순 없을까요?’
‘…다니트 부인이 황제 쪽과 접선하러 갔잖은가. 벌써 이에 대한 계획을 나누고 간 것이다. 카일라 영애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우리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걸 황제에게 알리겠지.’
차라리 다니트 부인이 남아서 이런 말을 했었더라면,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처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위장 신분으로 바리엘을 나선 자였으니까 말이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홀린가에서는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을 터.
간부들은 타들어가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술잔을 들었다.
“하면… 테일러 경은 어떠십니까? 생각 있으십니까?”
“무엇을요? 바리엘로 가는 것 말입니까?”
“아니, 너무 언성 높이지는 마시고요. 그래도 우리 중에는 영지 피해가 제일 크신 분이니, 차라리 정리하고서 바리엘로 가심이 어떠실까 하여 여쭌 것입니다.”
“아니요,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피해가 커서 그만큼 더 돌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여유 있으신 분께서 가시는 게 맞지 않습니까?”
“어허, 다들 일단 진정해봄세.”
“이런 말씀 죄송하지만, 솔직히 병력이 제일 빠지는 쪽에서 나서야 하시는 것 아닙니까?”
“왜 나를 보고 이르시는 건가? 병력 대신에 자금을 얼마나 넣어주었는데!”
“출처는 똑바로 하십시오. 국고에서 나온 자금이지 않습니까. 런크비스 왕가를 조금이라도 존경한다면, 그리하셔서는 안 됩니다.”
“이보게! 자네!”
“그만, 그만!”
콰앙!
분위기가 격앙되자 한 노인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간부 중 중추 역할을 하는 원로다. 그는 카일라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부탁했다.
“우리끼리 잠시 할 얘기가 있으니, 영애께서는 잠시 바람이라도 쐬심이 어떠시오?”
“예, 기꺼이요. 말씀들 나누십시오.”
카일라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일어났고, 간부들은 끝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문이 닫히자, 팽팽하면 신경전이 탁, 하고 잘리는 듯했다. 간부들은 다들 난감한 한숨을 삼키며 다시금 서로 눈치를 살폈고, 카일라는 한고비 넘겼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아.”
그녀는 벽에 몸을 기댄 채 호흡을 바로 했다. 바리엘도 아니고 전시의 타국, 버고스에서 홀로 이런 일을 주도하자니 긴장감에 질식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지. 카일라는 바로 정신을 차린 다음, 방으로 달려가 단검을 허벅지 옆에 매달았다.
꽈악.
아까 분위기로 보아, 왕당파에 균열이 일 것은 분명했다. 당장은 신분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여기지만, 맹신은 금물. 언제 궁지에 몰릴지, 저들이 어찌 돌변할지 모른다.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신변을 스스로 보호하는 수밖에.
카일라는 드레스를 벗어 훈련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창밖을 쳐다봤다. 어머니가 떠난 길이 끝도 없이 뻗어 있었다.
* * *
타닥타닥!
히이잉!
다니트의 눈매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딸아이를 믿지만, 홀로 두고 온 것에 대한 걱정을 지울 수 없었던 게다.
샹데트는 궐련을 잘근잘근 물다가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부인. 아까 말씀하시려던 게 무엇이지요?”
그 목소리에 다니트의 시선이 앞쪽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할 일을 깨달았다는 듯, 더욱 화사하게 웃으며 부채를 촤악 펼쳤다.
얼굴 일부분이 가려지자, 샹데트는 부인의 눈동자에 집중했다.
“샹데트 경.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할게요. 카일라, 제 딸아이 말입니다. 홀린 공작가의 여식이자 런크비스의 방계 피가 흐르고 있어요. 저는 저와 우리 딸아이가 황제 폐하를 도와 버고스를 새로이 건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답니다.”
“예, 그러시겠지요. 하여 왕당파에서도 다니트 부인께 부탁하여 이리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제대로 이해를 못 하신 것 같네요. 버고스를 새로 건립한다는 게, 어떤 뜻인지 잘 모르시겠나요?”
샹데트는 잠시 멈칫했다. 다니트 부인의 발언이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다.
“저와 딸아이가 런크비스 왕가를 잇는 것이 바리엘에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라, 이 말입니다.”
“부인, 지금 무슨 말씀을…….”
“그런데 칼라마트에 남아 있는 간부들은 과거의 영광에 취해 그만 고여버렸어요. 런크비스에 헌신하는 척하지만, 결국에는 제 잇속을 챙기고자 혈안이 된 자들이지요. 하지만 샹데트 경은 달라요.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치신 분 아닌가요?”
아니다. 그건 다니트도 알고, 샹데트도 알고 있다. 나이 많은 간부들과 샹데트가 다른 것은, 그저 살아온 세월의 무게밖에 없다. 다른 말로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샹데트는 일단 장단에 올라탔다.
“아, 예에. 그, 그렇지요.”
“샹데트 경과 같은 분만 있다면 애초에 나라가 이리되지도 않았을 터인데.”
다니트는 한탄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샹데트는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부인의 뉘앙스로 보아 그다지 상황이 나빠 보이진 않다 여겼다.
“하여, 폐하를 알현할 때 그대를 왕당파의 대표 격으로 소개하고자 하는데, 어떠십니까.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다니트와 카일라가 바리엘의 지원을 등에 업고 새로운 왕가를 열 때, 샹데트도 함께할 것인지를 묻는 말이었다.
샹데트는 궐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자신의 처지를 가늠해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왕당파는 고여 있다. 이미 이전 왕조에서 영향력 깊던 자들이 중심을 꽉 잡고 있고, 자신처럼 신예인 자들은 지금껏 활약할 기회가 거의 없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다니트 부인의 말대로, 바리엘이 두 모녀를 지원해줄 동기도 충분해 보였다.
‘홀린 공작가이면서 런크비스 방계라. 이만큼 잘 맞아떨어지는 자도 없긴 하지.’
기회인가?! 망할 노인네들. 샹데트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엄숙하게 대답했다.
“부인. 무엇이든, 런크비스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제 모든 걸 걸고 감당해내겠습니다.”
“포부가 멋지십니다. 옳으신 판단이에요.”
차악! 다니트는 부채를 접으며 그의 결단에 짤막이 박수를 보냈다. 역시, 파악한 대로다. 왕당파 중 제일 어리고, 미숙하며, 혈기 왕성한 샹데트를 고른 의미가 있었다. 의도대로 움직여주어 고맙다 해야 하나?
‘거절했어도 상관없지만.’
거절했다면 그대로 바리엘에 인질을 데려왔다 하고 넘기면 될 일. 샹데트는 모를 것이다. 방금 본인이 스스로의 목숨을 구했음을.
다니트는 커튼을 가볍게 걷으며 중얼거렸다.
“마차가 빠르게 달리고 있네요. 생각보다 일찍 도착할 것입니다. 충분히 쉬어두세요, 샹데트 경. 바리엘과 만나게 되면, 온 세상이 영광으로 보일 것입니다. 눈 붙일 시간도 없겠지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