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16
제616화. 힘에 대한 대가
클로이는 물그릇 속 자신을 바라봤다.
푸석해진 채로 이리저리 틀어 올린 머리칼, 얼룩덜룩한 피부, 코끝을 가볍게 찌르는 찌든 내.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예전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전쟁 풍파를 그대로 겪은 외관만이 남아 있다.
그녀는 잠시 한숨 쉬고는 탁한 물을 손으로 떠 얼굴을 문질렀다. 그나마 세수라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바리엘을 떠나온 뒤로 단 한 번도 폐하와 독대하지 못했어.’
워낙 이런저런 일이 많긴 했다. 출정하자마자 북쪽 지대에서 대마물의 습격에 휘말렸고, 그 후로도 자잘한 전투가 끊임없이 이어지지 않았던가. 게다가 버고스 국경선을 지난 이후로, 그녀는 단 하루도 세 시간 이상 자지 못했다. 보급품을 담당하는 부대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클로이는 지친 눈가를 대충 비비며, 차가운 세숫물로 잠을 쫓았다.
‘내가 시간만 계속 죽이며 고생하는 동안 카일라 영애는 이미 공로를 세웠단 말이지.’
다비온가에서 지원하는 물자를 주로 담당하는 부대였기에, 그녀와 함께하는 병사들 모두 그쪽으로 연을 둔 자들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들려오는 정보가 꽤 많다는 뜻이다.
그중 제일 최근에 들어온 건…….
‘홀린 가문이 버고스의 왕좌를 노리는 것 같다고?’
말도 안 된다! 클로이는 제 볼을 이리저리 늘려대며 침묵의 비명을 질러댔다.
안 그래도 홀린가는 바리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권세가이지 않나? 그런 그들이 버고스의 새 왕조를 잇게 된다면, 다비온 가문에겐 도저히 그들을 견제할 방도가 없었다. 황후 자리 하나만을 좇아 전쟁터까지 따라 들어왔는데, 온갖 고생만 하고서 물러날 상황이란 말이다.
‘그것만은 절대 안 돼!’
클로이에게도 공로가 필요했다. 카일라에 버금가는 절대적 전쟁의 공로로 황제에게 자신의 존재를 강렬히 각인시킬 만한, 그런 것 말이다.
그녀는 맞은편의 나무를 노려보더니, 어설프게 손날을 세워 달려들었다.
퍼억!
“아!”
적군이라 상상하며 공격해본 것인데, 자신의 손날만 반으로 쪼개질 것 같이 아팠다. 클로이는 잇새로 신음을 삼키며 주저앉았고, 한참 후에야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래. 전쟁에서 누가 맨주먹으로 싸우나? 역시 검술이지!
“흐잇!”
클로이는 기다란 나무막대기를 검인 양 붙잡고는 열심히 휘둘러댔다. 카일라도 했으니, 나도 할 수 있다! 아마도! 젠장!
“젠장! 젠장!”
하지만 클로이는 얼마 못 가 좌절했다. 그녀의 살상 능력은 정말이지 한 줌의 재와 같았다.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마저도 바람 한 점에 날아가 버리는, 하찮은 수준.
그녀는 엎드린 채로 풀 따위를 한 움큼 잡아 뜯었다. 카일라도 하는 걸 왜 자신은 하지 못하는 걸까? 차라리 자신도 마법사들처럼 선택받은 사람이었다면, 이런 비참함 따위 느끼지 않았을 건데.
“…흐어엉. 으엉.”
클로이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다 포기하고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지고 싶지 않았다.
클로이가 눈물을 훔쳐내며 마음을 추스르려는 때였다.
“대장, 제발 그만 좀 하십시오. 부탁입니다.”
“내가 뭘? 내가 뭐얼!”
“황궁 연구실에서도 별별 게 다 나왔는데, 재료도 부족하고 시설도 열악한 마차 안에서 제조한 거면 말 다 한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지금 마법사 한 명 한 명이 귀한 시점입니다. 그런 걸로 괜히 결원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안 님한테 허락 안 맡았죠? 바로 이릅니다.”
마법사들이다. 보급품 요청을 위해 온 것 같은데,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발걸음이 빨랐다. 머리를 산발로 묶은 채 치근덕거리는 아코렐라 탓이었다.
그녀는 발재간을 놀려 마법사들을 가로막고는 손가락 하나를 펼쳐 좌우로 까딱거렸다.
“어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우매한 것들!”
“타격 없습니다. 그냥 우매한 놈 하겠습니다.”
“연구에는 언제나 희생이 뒤따르는 법! 그리고 연구가 도달하는 곳은 언제나 발전이지. 실험 정신이 곧 바리엘을 구한다!”
“그럼 직접 드세요. 문제없겠네.”
“난 어제 다른 거 먹었어. 오늘 건 어제 거랑 상충하는 물질이라 마시면 뒤진다.”
하아, 미친 상사.
마법사들은 한숨을 내쉬며 좌우로 갈라서 그녀를 지나쳤다. 그러고는 클로이에게 보급품 목록을 내어주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개인 보급품 좀 내어주십시오.”
“아, 잠시만요.”
클로이는 혹여 운 것이 들통날까 싶어 서둘러 눈가를 닦았지만, 애초부터 꾀죄죄한 몰골이라 알아채는 자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아코렐라는 흐느적거리며 부하들의 어깨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지 말고, 딱 한 모금만. 응? 더 달라고 해도 내가 안 줄 거다!”
“싫습니다. 그리고 수법 좀 바꾸십시오. 저번에도 이래놓고 더 안 먹으면 죽는다고 해서 배 터질 때까지 먹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건 다른 실험이었고요. 기억 안 나십니까?”
“어라, 그거 너였니? 그럼 이번엔 너!”
아코렐라가 그 옆의 마법사를 콕 짚으며 이르자, 그가 두 손으로 X를 그렸다.
“저 아직 부작용 있습니다. 트림하면 가끔 브레스 올라와요. 드래곤도 아닌데 느낌 참 아름답습니다.”
“하아, 참나. 위대한 대업에 함께할 인재가 이리도 부족하다니! 통탄할 일이로다, 통탄! 나 아코렐라는 너무 슬퍼서 여기서 뒤지고 말 것이에요! 흐윽!”
그러더니 보란 듯이 옆으로 쓰러지는 아코렐라. 이에 놀란 클로이가 흠칫거렸지만, 마법사들은 익숙하다는 듯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보급품 상자를 받아 들었다.
“예, 대장. 먼저 가십시오. 명복을 대충 빕니다.”
“당분간은 자제하세요. 칼라마트 앞에 두고서 뭐 그리 급하신지, 원. 이안 님이 찾으시면 대장 뒤졌다고 보고 하겠습니다.”
“어이구, 생각보다 무겁네. 수고하십시오.”
마법사들은 엎어져 있는 아코렐라를 크게 피해 지나쳐갔다. 그녀가 몇몇 마법사들의 바짓단을 스리슬쩍 잡아댔지만, 아주 익숙하게 다리를 탈탈 털어 떼어내는 모습이다.
클로이는 그런 아코렐라를 당황스럽게 쳐다봤다.
‘…언제까지 누워 있을 거지?’
“저도 보급품 신청요.”
“아, 네.”
아코렐라는 여전히 누운 채로 품에서 목록만 꺼내 클로이에게 전했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물건을 담던 클로이가 넌지시 물었다.
“연구부 소속 대장이신가요?”
“마력석관리부입니다.”
“그런데 왜…….”
“마력석이랑 물약은 떼어낼 수 없는 관계니까요!”
흐익! 갑자기 일어나 소리치는 아코렐라 탓에, 클로이는 화들짝 놀랐다.
“진정한 마법사라면 언제나 진리를 탐구하여 새로운 세상으로의 약진을 갈망해야 하는 법이거늘! 저 도전 정신 없는 새끼들 때문에 가슴이 무너집니다. 참, 궐련 두 갑 넣어주세요.”
…범상치 않은 자다. 클로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궐련 두 갑을 챙겼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으니.
“저기, 마법사님.”
“아코렐라입니다.”
“혹시 물약 중에 그런 것도 있나요? 먹으면 일반인도 마법을 쓸 수 있게 된다든지, 아니면 힘이 막 세진다든지!”
“마법사는 신이 선택한 자. 마법은 불가하지만, 힘이 세지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오! 그, 그러면 검술은요?”
“…뭘 원하세요?”
아코렐라가 턱을 괸 채 눈썹을 까딱거렸다. 흥미로운 무언가를 감지했다는 듯 말이다.
클로이는 보급품을 옆으로 치운 다음, 아코렐라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저, 전쟁에서 공로를 세우고 싶습니다.”
“오호, 애국자셨구만. 그런데요?”
“지금 저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왜 없어요? 지금도 일 열심히 하고 계신데.”
“괄목할 만한 성과가 필요해요. 도움받을 수 있다면 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사례는 얼마든지 할게요.”
“돈 좀 있어요?”
“저, 클로이 다비온입니다.”
“아! 다비온! 어허, 고생 좀 하셨나 봐요. 못 알아보겠어.”
아코렐라가 깜짝 놀랐다는 듯 주먹으로 제 손바닥을 쳐댔다. 하지만 눈빛은 반짝반짝, 입가엔 저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녀는 미간을 손으로 짚은 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어댔다.
“제 작품들은 마법사를 대상으로 한 거라서요. 일반인이 마셨을 때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최악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어쩌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지도 모를 일이지요.”
“주, 죽음이요?”
“게다가 영애는 다비온가의 여식. 여차했다간 저 진짜 뒤집니다. 저 또한 사회생활이라는 걸 하는 작자인지라 저한테도 상관이라는 게 있거든요. 그럼 이만.”
“잠깐만요!”
클로이가 아코렐라의 팔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저, 적당한 선에서 할 만한 게 없을까요? 저 정말 여기 와서 고생 많이 했거든요. 흐, 흐으윽.”
“왜 우세요? 누가 보면 내가 울린 줄.”
“몰라요! 저도 모르겠어요! 아코렐라 님이면 실담물약 만드신 천재 마법사잖아요. 저 좀 어떻게 도와주세요. 제발요. 흐아앙.”
천재 마법사?
아코렐라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클로이를 돌아봤다. 한쪽은 우느라, 한쪽은 웃느라 둘의 표정이 비슷했다. 아코렐라는 클로이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속삭였다.
“영애. 그리 우시니 제 마음이 아려 옵니다그려. 크흠. 사실 일반인 대상으로 실험하고 싶은 걸작이 하나 있긴 한데… 말씀드린 대로 부작용은 장담 못 합니다.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힘을 얻고 싶으시다면-!”
“네! 얻고 싶어요!”
“바로 결정하지 마시고, 충분히 심사숙고한 후에 저를 찾아오세요.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신, 오실 때 각서를 써 오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클로이는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만족한 아코렐라는 로브를 휘날리며 바람처럼 사라졌다.
‘기회를 얻을 수 있어!’
클로이는 눈물, 콧물을 손등으로 훔친 다음 씩씩하게 주먹을 쥐었고-
‘냐하! 실험체 확보!’
아코렐라는 룰루랄라, 절뚝거림을 춤으로 승화하며 신나게 내달렸다.
* * *
“오케이! 난 언제나 도전 정신 있는 사람을 좋아해. 이쪽으로 와봐요.”
아코렐라의 손짓에 클로이가 더욱 깊숙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팔짱 사이 숨겨 두었던 각서를 아코렐라에게 슬쩍 내밀었다. ‘클로이 다비온의 이름으로, 그 어떤 부작용과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겠으며 이는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코렐라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툭툭 쳐댔다.
“원래 저는 이런 거 안 받는데, 워낙 귀하신 영애시니까. 이해하시죠?”
“네. 그러니까 어서, 어서 주세요.”
“성격도 급하셔라. 자자, 여기 있습니다.”
아코렐라가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분홍빛 펄(Pearl)이 잔뜩 들어가 있는 진득한 액체다.
사람이 먹어도 되는 건가? 클로이가 의심스럽게 아코렐라를 바라보자, 그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이것만 먹으면 일당백도 문제없습니다.”
“예, 예상 효과가 뭔데요?”
“바로-”
“두 분, 뭐 하십니까?”
아코렐라가 이르려는 순간, 시아오시가 나타났다.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이 서로를 등 뒤로 숨기며 뒷걸음질 쳤다.
“뜨앗! 뭐, 뭡니까. 시아오시 경.”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두 분, 여기서 뭐 하십니까.”
“아무것도? 그, 그쵸? 영애?”
“네, 네. 그렇고 말고요.”
“뒤에 뭘 숨기셨죠?”
…X 됐다. 시아오시가 다가오자, 아코렐라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굳어버렸다. 분명 이안 님께 보고가 올라갈 건데, 진짜로 X 됐다!
클로이 또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지만, 그건 찰나일 뿐.
뽀옹!
‘들키면 저지당한다’는 생각에, 클로이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뚜껑을 딴 다음, 재빨리 액체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
당황한 시아오시가 멈칫거렸고, 아코렐라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클로이의 변화를 기다렸다. 두근두근, 무슨 일이 일어날까?
클로이 또한 긴장된 얼굴로 자신의 몸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아.”
점점 빨리 뛰는 자신의 심장박동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뜨거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