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18
제618화. 쿵쿵
“클로이 영애, 정신 드십니까?”
클로이는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릿한 시야로 보이는 망할 분홍색 머리칼.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인지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봤다.
정갈하다 못해 휑한 느낌이 드는 침실이다. 아무래도 왕실 사용인이 사용하던 방인 듯싶다. 이전 같았으면 감흥조차 없을 터지만, 클로이는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침대의 푹신함에 감격하며 이불을 끌어 모았다.
“…저, 괜찮나요?”
“어떤 관점에서요? 물약의 효과를 묻는 것이라면 아주 대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약발이 잘 받는 몸이신가 봐요. 기둥 박살 내고 바닥 금 가게 한 거, 꿈 아닙니다. 뭐, 영애의 체면에 대해서 묻는 것이라면 상황이 좋지 않다 대답하겠지만요.”
클로이가 세모눈을 뜨며 아코렐라를 노려봤다. 자신의 선택인지라 뭐라 할 말은 없다만, 이거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자자, 정신 차리신 김에 관찰기록 좀 해봅시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리십니까? 지금 기분이 어때요?”
“흐음. 지금은 괜찮네요. 안정적이고, 솔직히 말하면 그리 절망적이지도 않아요.”
“그래요? 음, 자극을 주기 위해 덧붙이자면, 영애의 소란에 대한 보고서가 황제 폐하께 올라갈 것입니다.”
클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깜빡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귀족 영애가 일으킬 만한 소란이 아니었기에 분명 황제는 이를 빌미로 그녀를 황후 자리에서 밀어낼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았다.
사각사각.
아코렐라는 흥미롭다는 듯 눈빛을 반짝이며 서류에 클로이의 상태를 열심히 기록했다. 영애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의례적인 투로 대답했다.
“당연히 올라가겠지요. 그런데 뭐,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라. 호오. 이거, 인지력 저하 부작용도 일어나는 건가? 클로이 영애, 아까 쓰러지기 전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는 기억하십니까?”
“이안 경과 마법사들 그리고-”
쿠웅!
클로이는 반사적으로 심장을 움켜쥐었다.
“에?”
“시, 심장이 또 이상한데요.”
“왜요? 이해가 안 되네.”
“모르겠어요. 시, 시아오시 경을 떠올리니…….”
멈칫. 아코렐라가 볼펜을 쥔 채로 굳어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벌렁거리는 콧구멍. 뭔가 엄청난 발견을 눈앞에 두었음을,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다.
“시아오시 경을 떠올리면 심장이 뛰십니까? 얼굴도 좀 붉어졌네요. 혹시, 가슴 아래가 간질간질?”
“마, 맞아요!”
“이안 님은요?”
“이안 장관이 왜요?”
“아니군. 시아오시 경에게만 해당되는 거야. 영애, 제 말을 잘 들으면서 상상해보세요. 자아, 시아오시 경과 손을 잡았다!”
아코렐라가 클로이의 손을 덥석 잡으며 이르자, 그녀가 난감하다는 듯 눈동자를 왼쪽 위로 올렸다.
“소, 손이요? 으음…….”
“오오, 볼이 좀 더 붉어지는군요. 그러면 포옹! 더 나아가 뽀뽀까지 진득하게 생각해보세요!”
“꺄아아! 미쳤나 봐! 제정신이에요?”
클로이가 질색하며 손을 떨쳐냈지만, 아코렐라는 주먹을 쥔 채로 한껏 웅크렸다.
미쳤다. 미친 천재 마법사 아코렐라가 드디어 인간의 감정에도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신께 감사 인사 드리듯 두 손을 모으더니, 서류를 옆구리에 끼고서 클로이를 돌아봤다.
“후우, 잠시 보고 좀 하고 오겠습니다.”
“저기요!”
“쉬고 계세요, 시아오시 경을 떠올리며. 크크.”
“아니, 이보세요!”
콰앙!
클로이가 가지 말라며 손을 뻗었지만, 아코렐라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대로 달려나갔다.
얼떨결에 홀로 남은 클로이. 그녀는 다시금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공로를 세우려고 했는데, 괜히 폐하께 책만 잡히겠구나. 이래서 강한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하나 봐.’
막상 힘을 얻어도 혼자 놀라서 이리저리 사고만 치지 않았던가? 숨 죽이고 있다가 폐하께서 위험할 때 딱, 나타났어야 하는 건데! 클로이는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한탄했다.
‘힘이 사라지면 분명히 나를 바리엘로 돌려보내려 하실 거다.’
돌려보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쉽지? 아까 아코렐라 대장이 황제 폐하를 언급했을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클로이가 곰곰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자, 천장에 시아오시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으앗!”
내가 미쳤나? 클로이는 벌떡 일어나서 무작정 방을 벗어났다. 아코렐라든 시아오시든, 누구든 좋다. 일단 정신을 다른 데로 돌려 이 원인 모를 감정을 해소하고 싶었으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다만, 해가 하늘 끝자락에 걸려 있었다. 어둠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시각. 옛저녁 주인 잃은 성인지라, 성안 띄엄띄엄 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끼이익.
클로이는 보급 부대를 찾아 계속 지하로 내려갔다. 식품 창고 근처로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쪽인가?’
안 그래도 처음 입성한 곳인데 해까지 지니 길눈이 더욱 어두워졌다. 주위에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것으로 보아 길을 단단히 잘못 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들리는 은밀한 대화.
“문은 열어두었나?”
“예, 문제없습니다.”
“여덟 시가 만찬 시각이라고 하니, 그 전에 서두르자고.”
“알겠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지하 통로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마법사들이 변수인데, 어쩌지요?”
“황제가 연회장에 있을 것이니, 주요 경호 세력들 또한 그 인근에 있을 터. 일단 불길로 시선을 돌린 다음 움직이자.”
말소리가 멀었다. 클로이는 조심스럽게 인기척을 따라 계속 지하로 내려갔다. 어둠이 짙은 터라 두려웠지만, 대화 내용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내 클로이는 지하 창고 어디선가에서 대화의 발원지를 찾아냈다.
‘뭐지?’
수납장 뒤쪽이다. 아무래도 숨겨진 공간이 있나 보다. 수납장을 옆으로 밀면 될 것 같긴 한데, 철판 두께가 거의 한 뼘이다. 장정 여댓이 와도 움직이기 쉽지 않을 터. 분명 어디엔가 움직이는 장치가…….
끼이익! 쿠웅!
“어라.”
클로이는 화들짝 놀랐다. 수납장을 잡고서 가볍게 움직였을 뿐인데, 허무할 정도로 번쩍 들리는 것 아닌가?
수납장 뒤편으로 땅굴이 파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 촛불에 의지하여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장병들. 그들도 대화를 나누다가 너무 놀라서 굳어버린 모습이었다.
“뭐, 뭔…….”
그들은 크게 흔들리는 동공으로 수납장과 클로이를 번갈아 봤다. 여인이, 아니, 인간이 저런 힘을 내는 게 가능키나 한 일인가?
그들은 클로이를 마법사나 마검사라 생각하였고, 황급히 품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들었다. 끝부분에 이드갈이 묻어 있었다.
“제, 젠장! 잡아라!”
“꺄아아앗!”
왕당파 중에서도 전통적인 방식의 왕조 부활을 고집하는, 세 명의 간부가 주축이 된 무력 집단이었다. 그들은 칼라마트 시내와 이어진 이 비밀 통로를 이용해 세력을 결집,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다.
목표는 딱 둘. 새 왕조의 탄생을 노리는 홀린 가문 모녀를 처단하는 것. 그리고 바리엘에 빌붙어서 권력자가 되려는 다른 왕당파를 숙청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명분만 그럴듯하지, 왕당파 내부의 균열이나 마찬가지였다.
“잡아! 잡아아!”
누군가의 소리 죽인 외침에 장병들이 우르르 쏟아지며 클로이의 뒤를 쫓았다.
클로이는 질겁하며 계단을 뛰어 올라갔고, 이내 제 손에 들린 수납장을 인지했다.
“엄마야! 이러지 마세요!”
쿠우웅! 콰앙!
그녀가 있는 힘껏 수납장을 던지자, 굉음과 함께 장병들이 나가떨어졌다. 철판에 부딪치고 깔린 자들이 바닥을 구르며 신음함에도, 뒤따라오던 자들은 동료를 넘어서며 클로이를 맹추격했다. 거사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런 식으로 그르칠 순 없다.
채앵! 촤아악!
“멈춰라! 거기 서!”
“꺄아아!”
검 따위를 내던지며 윽박질렀지만, 클로이는 쫄쫄거리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은 채, 그저 내달릴 뿐.
쿠우웅!
“아앗!”
그러다 발목을 접질려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가 손을 짚으려던 부분이 음푹 꺼지자, 이를 본 장병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예사스러운 상대가 아니다. 단번에 덤벼 요절을 내는 수밖에.
“간다! 하나, 둘-”
“아으, 아파라…….”
“셋!”
촤아아악!
장병들이 발돋움하여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시아오시를 비롯한 그의 부하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쳐냈다.
클로이의 눈동자가 조금씩 커졌고, 그 앞에서 시아오시의 회색빛 머리칼이 천천히 흔들렸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클로이는 얼굴이 벌게진 상태로 더듬더듬, 말을 붙였다.
“여,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저, 저, 찾았어요?”
혹시? 정말? 진짜로? 클로이가 기대를 잔뜩 품으며 눈을 반짝이자, 시아오시의 부하가 어이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핫! 우리가 그쪽을 왜 찾습니까?”
“성이 쿵쿵 울리더만요! 귀가 없어도 여기서 일 생겼다는 건 다 알 겁니다!”
“보자, 왕당파 간부 셋… 얼굴이 좀 헷갈리는데.”
“여기 있는 거 맞나? 어어, 저놈이네. 저놈 하나요!”
“지하에서 하나 또 올라옵니다!”
“잠깐! 잠깐만요!”
무장한 병사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사태를 파악한 왕당파 간부 한 명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희는 바리엘에 대항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홀린 가문 모녀와 별채에 있는 왕당파 간부들을 처리하고자 한 것입니다. 바리엘에 대한 반역은 절대 아니니, 일단 진정하시고…….”
“그럼 저 여인은 어찌하여 공격했는가?”
가만 듣던 시아오시가 차갑게 되물었다.
“당연히 정보가 새어나갈까 봐 그런 것입니다. 자, 잡아두기만 하려 했는데 저 여인의 공격에 여럿 쓰러져서 저희도 모르게…….”
시아오시가 가녀린 자태로 쓰러져 있는 클로이를 힐끔거리자, 클로이는 헝클어진 머리칼과 옷 따위를 주섬주섬 정돈했다.
“되었다. 정리해.”
“예, 알겠습니다.”
“잠깐만요! 정말 바리엘에 반할 의도가 없습니다! 증명할 수 있습니다!”
채앵! 챙!
“의도는 중요치 않다. 그대들이 왕당파라는 것이 중요하지.”
왕당파를 처단하는 것, 그것이 시아오시의 임무였으니까. 만찬을 즐기고 있는 자들보다 먼저 간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병사들이 검을 거두지 않자, 장병들도 물러설 길이 없다는 걸 알아챘는지 검날을 바짝 세웠다.
“이리 오십시오, 영애.”
“아-”
시아오시가 클로이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내밀자, 아코렐라의 음성이 스쳐 지나갔다.
‘시아오시 경과 손을 잡았다!’
진짜로 이렇게 되다니! 클로이는 머뭇거리며 시아오시를 올려다봤다. 양 볼이 뜨거운 것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음이 분명했다. 어떡하지? 조금 촌스러워 보이진 않으려나?
클로이가 망설이자, 시아오시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괜찮습니다. 잡으셔도.”
“아, 그게-”
“…그리고 영애, 코피 나십니다.”
“예? 저, 저요?”
고개를 갸름한 각도로 꺾어 배시시 웃던 클로이가 화들짝 놀라며 콧구멍 부분을 매만졌다. 축축하고, 뜨끈한 피가 또 흐르고 있었다.
“…….”
하루에 두 번씩이나 이게 무슨 개망신이람? 클로이가 눈물을 머금으며 손등으로 코를 벅벅 문질렀고, 시아오시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때, 주위를 정리한 병사들이 시아오시를 부르며 소리쳤다.
“시아오시 님! 수납장 아래 깔린 사람 중 한 명이 왕당파 간부인 것 같습니다!”
“이거 들어내야 할 것 같은데, 꼼짝도 안 하네요.”
“마법사님을 부를까요?”
클로이가 종잇장 내팽개치듯 내던진 철제 수납장. 병사 일곱 명이 달라붙어 낑낑거리고 있었는데, 꼼짝할 기미도 안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클로이가 눈물과 코피를 줄줄 흘리며 달려갔다. 부끄러워서 더는 시아오시와 마주할 수가 없었다.
“제가 할게요오. 크흑.”
“네?”
“흐윽, 이거 제가 할게요. 비켜주세요.”
“위험합니다, 영애… 아, 오오오! 세상에!”
“여기 놔주십시오! 실압근이 장난 아니십니다.”
가볍게 번쩍, 클로이가 수납장을 들어올리자 병사들이 환호하며 손뼉을 쳐댔다.
시아오시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작게 한숨 쉬었다.끝내 클로이가 잡아주지 않은 제 손을 내려다보며.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