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21
제620화. 왕궁 정리
카일라는 조심스럽게 상체를 세웠다. 아직 한쪽 눈은 보이지 않았고, 걷는 것 또한 무리였다. 의사들의 말에 따르면 다시 걷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카일라는 손가락 끝을 가볍게 까딱거렸고, 이내 가는 펜대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힘이 들어간다는 사실에 배시시 웃은 그녀는 다니트 부인을 돌아봤다.
“문서 작업, 할 수 있어요.”
“하아.”
다니트 부인은 애가 탄다는 듯 부채로 얼굴을 가렸지만 말이다.
장교 시아오시가 부하들을 데리고 연회장에 들이닥쳤을 때, 그냥 촛대를 들어 호르헤를 찌를 걸 그랬다. 어차피 죽을 목숨, 딸아이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돌려줄 걸 그랬어.
“어머니. 한숨 쉬지 마세요. 다 잘 되어 가는데 무엇이 그리 걱정이십니까?”
“걱정이 아니라 아픔이다. 꽃다운 네가 이리 다친 게, 마음 아파서 그래.”
다니트 부인은 이불 밑 카일라의 가녀린 발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평생 걷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부인의 침묵 속에서, 카일라는 담담하게 펜대를 갈았다.
“너무 아파하지 마십시오. 혹시 걷지 못하게 된다 한들 상관없습니다. 버고스의 왕이 되면 제가 중심이니, 모두가 저를 따라서 움직일 것입니다. 굳이 두 다리가 필요 없습니다.”
“카일라!”
“아버지께 드릴 말씀은 어머니가 직접 쓰시겠어요?”
다니트가 질색하며 새된 비명을 질렀으나, 카일라는 모른 척 말문을 돌렸다. 버고스 현 상황을 서둘러 홀린 저택에 알려야 했으니.
전날 밤, 왕당파 간부들이 모두 죽었다. 이제 홀린 가문이 나서서 수습하는 일만 남아 있다. 우선으로는 공백이 생긴 권력 승계, 그리고 민심 수습이다.
“광산 개발에 연관성을 만들어 두면 바리엘 황궁에서 병력을 지원받기가 쉬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각 영지에 부고를 전달할 때 꼭 그들과 함께하도록 해야 합니다. 아시지요, 어머니?”
“그래. 알고 있다. 안 그래도 사람을 같이 보내려고 하는데, 일 도울 손이 너무 부족해.”
“아버지에게 지원을 요청하겠습니다. 이제는 제한 없이 홀린 가문의 인적 자원을 버고스로 내올 수 있으니까요.”
예전에는 왕당파가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터라 사병은 물론 하인들조차 제대로 꾸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견제할 자가 없으니 원하는 만큼, 필요한 그 무엇이든 요청할 수 있었다.
“각 지방 영지를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는 바리엘 황궁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쪽에서는 분명 원치 않을 터인데.”
“왕당파 처단에 대한 부담감을 온전히 홀린이 지고 가길 원하겠지요. 감내할 부분이지만, 끈덕지게 시도할 필요는 있습니다.”
“바리엘에서 사람이 오면 내가 직접 지방으로 내려가서 영지들을 정리하마. 카일라, 너는 절대, 절대 여기 버고스 왕궁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서는 안 돼.”
“물론입니다. 그럼 저는 구휼 쪽으로 움직여 보겠습니다. 오랜 내전으로 많이 지쳤을 겁니다. 무릇 인간은 배를 불려주는 자에게 고개를 돌리게 되어 있어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걷지 못하는 건 아쉽지 않았다. 움직이지 못해서 일이 더뎌지는 게 아쉽지. 카일라가 펜대를 부지런히 놀리자, 다니트 부인이 넌지시 덧붙였다.
“참, 클로이 영애라 그랬나?”
“클로이 영애요?”
“그래. 이전에 같이 출정한 다비온가의 영애.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더구나. 글쎄, 광산으로 차출당했다지 뭐니?”
“네?”
카일라가 놀라서 멈칫했다. 아무리 황제께서 두 가문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지가 뚜렷하다고는 하지만, 어찌하여 다비온 영애를 광산으로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이상하네요. 정말인가요?”
“확실해. 참 여러모로 대단한 영애구나. 카일라, 바리엘에 있을 때 자주 보았지?”
“예, 뭐. 가끔 원치 않게요. 미친년입니다.”
“그런 것 같다. 어찌하여 광산을 따라가?”
다니트 부인은 여전히 이해 안 간다는 듯 중얼거렸고, 카일라 역시 의아하게 고갯짓했다.
다비온 쪽도 이걸 알고 있으려나? 카일라는 홀린 공작에게 보내는 서신에 이를 적을까 말까 고민했다.
‘흐음.’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버고스에서 자리 잡을 때까지는 황궁에 납작 엎드려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수밖에 없다. 혹여나 황궁과 다비온 사이에 불화가 일어난다 한들, 자신은 모르는 일이다.
똑똑.
그때, 바깥에서 시중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영애.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 님이 잠시 뵙고자 하시는데요.”
“모셔라.”
갑작스러운 방문에 카일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니트 부인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잠시 후, 이안이 안으로 들어서며 카일라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몸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영애.”
“마법부의 도움 덕분에 상당히 호전되었습니다. 보시다시피, 문서 작성도 가능하고요.”
카일라는 보란 듯 펜대를 들어 보이면서, 자연스럽게 쓰고 있던 서신을 덮었다. 이안은 조금 떨어진 소파에 앉아 다니트 부인에게 손짓했다.
“앉으십시오, 부인.”
“예, 그나저나 어쩐 일로…….”
“영애가 괜찮으신지 확인도 하고-”
입바른 말. 카일라와 다니트가 동시에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모녀 아니랄까 봐, 영락없이 닮은 모습이다.
“무엇보다 다음 일정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서 말입니다. 왕당파는 모두 처단되었고, 그 아래 부하들 또한 궁에서 축출되었습니다. 남은 수습은 홀린 가문이 주도하실 터, 황궁에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지 궁금합니다.”
“바리엘과 버고스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급히 돌아가실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최대한 오래, 가능하다면 수습이 마무리될 때까지 바리엘 병사들이 버고스 왕궁에 머무는 게 홀린 가문에게 이득이었다. 별다른 방책 없이도 군사적, 정치적 장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리 걱정하지 않아도 완전히 수습될 때까지는 일정 수의 병사들이 주둔하긴 하겠지만, 황제가 남아 있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굉장히 컸다.
“저희는 토올룬으로 가야 합니다.”
“토올룬이요?”
러더포드의 환생 그리고 다몬의 회귀 단서를 쥐고 있는 비밀의 신전 방문, 바르사베와 필리아를 구하기 위한 여정, 나아가 최종적으로 지하신 토벌을 위해서였다.
이러한 상황을 모르는 카일라가 난감하다는 듯 한쪽 눈을 찌푸렸다.
“…황제 폐하께서도 함께하십니까?”
“그 또한 논의 중입니다. 너무 멀고 위험한 길인지라 저는 폐하께서 바리엘로 돌아가셨으면 좋겠으나, 직접 토올룬을 토벌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셔서요. 여기서 군세를 점검하고 출발대를 새로이 세우려고 하는데, 홀린 가문의 일정을 참고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생각하신 최대 기간은요?”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필리아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기에, 최대한 서둘러서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차치한, 마법부 장관으로서의 대답은-
“한 달입니다.”
“…한 달. 예, 알겠습니다.”
카일라와 다니트가 시선을 주고받았다. 촉박하지만 바삐 움직인다면 할 만한 시간이다. 한 달 내, 황제의 가호 아래 버고스를 완전히 장악하고 마리라.
“그럼, 몸조리 잘 하십시오.”
“예, 이안 경. 그리고 고맙습니다.”
방을 나서려는 이안에게, 카일라가 덧붙였다.
“홀린 가문을 도와준 게 호의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움은 도움이지요. 정식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언젠가 꼭 갚겠습니다.”
“…훗날의 바리엘에 갚으십시오. 그거면 되었습니다.”
이안은 그리 말하고는 방문을 나섰다.
복도는 어수선했다. 병사들이 왕궁 장식물을 이리저리 옮겨댔고, 그 틈바구니에서 마법사들은 두툼한 서류 뭉치를 손에 든 채 바삐 뛰어다녔다.
이안은 서류 뭉치를 알아보았다. 버고스 왕궁에 보관되어 있던, 귀중한 기록물들이었다. 런크비스 왕가의 일대기와 다몬 왕의 지난 행적들을 살피다 보면, 토올룬으로 가기 전 단서를 얻을지도 모른다.
“이안 님! 마법부 임시 거처는 3층이라 합니다. 짐 미리 옮겨놓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지난 30년간의 기록입니다. 아무래도 중점적으로 다룰 것 같은데, 소실된 부분이 상당해서 아쉽습니다.”
“괜찮다. 전부 집무실로 올려라.”
“예, 이안 님. 아, 그리고 아코렐라 대장이-”
쿠웅! 쿵! 쿵!
마법사가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천장에서 묵직한 진동이 울렸다.
소음의 근원이 어디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천천히, 다 같이 천장 우측에서 좌측으로 움직이는 고개. 아니나 다를까, 클로이가 아코렐라의 옷깃을 부여잡은 채 내려오는 중이었다.
“어이고, 아코렐라 대장도 괴력 앞에서는 힘을 못 쓰네. 그래도 영애가 봐준 듯. 멱살은 안 잡았으니.”
“대장은 가끔 저렇게 다뤄야 해. 안 그러면 감당 못 해.”
“이보세요, 이안 경!”
“클로이 영애, 오늘 몸 상태는 좀 어떠십니까?”
“몸 상태는 좋아요! 좋은데, 지금 이게 무슨 말이지요?”
클로이가 분에 찬 목소리로 소리치자, 아코렐라가 연신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보아하니, 막 광산으로 가게 되었다는 얘기를 전달한 듯싶다.
“광산이라니요? 저, 못 갑니다. 장정도 하기 힘든 일을 제가 어떻게 해요?”
“크흠, 영애. 영애는 할 수 있어요. 그 어떤 장정보다 훨씬, 잘-”
“아코렐라 대장. 그대는 입 다물어 줘요.”
“네엡. …이안 님? 저 대신 설득, 아니,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이안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근처에 시아오시가 없음을 확인했다.
“클로이 영애, 시아오시 경을 마음에 두고 계신다고요.”
“네?! 제가요?!”
옴마나! 마법사들이 안 듣는 척 몸을 돌렸으나, 귀 끝은 바쁘게 움찔거렸다. 짐 옮기던 병사들 또한 괜히 느릿느릿 움직이며 재밌는 소란에 주목했다.
“부작용이라 이르긴 했으나, 아코렐라 대장의 보고로는 그러했습니다. 그러니 이를 자극할 만한 요인은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 좋겠지요.”
“하, 하지만-”
“가기 싫으시면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리하면 영애의 치료를 담당할 아코렐라 대장이 없고, 저희 또한 영애를 종일 돌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곳은 타국의 왕궁, 황제 폐하께서도 기거 중이시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영애를 바리엘로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엘로 갈 것인지, 아니면 아코렐라를 따라 광산으로 갈 것인지 묻는 게다.
클로이가 입술을 꾹 다물며 고민하자, 아코렐라가 그녀의 팔을 잡고서 살랑살랑 웃었다.
“영애, 걱정 마세요. 말이 광산이지, 거기 영지 정리하러 잠시 가는 겁니다. 설마 영애 보고 곡괭이 들고 갱도 들어가라 하겠어요? 마법사들이랑 같이 복구 작업만 좀 도우시면 됩니다. 영애, 공로를 세우고 싶다 하셨잖아요! 몇 년째 중단된 마법부 별채 건설보다 더한 공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말은 잘합니다, 아코렐라 대장!”
“아잇,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에욧!”
딱히 선택지가 없다. 그리고 클로이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시아오시만 보았다 하면 가슴이 벌렁벌렁, 머리에 피가 핑핑 도니… 일단은 그 주위를 벗어나는 게 좋겠다고.
“살다 살다 광산을 가게 될 줄은…….”
“광산이 뭐 어때서요? 바리엘을 위한 일에는 크고 작은 게 없습니다. 영애, 괜찮습니다. 네?”
되었다! 아코렐라가 훌쩍이는 클로이를 다독이며 꽉 껴안았고, 이안에게 다시금 눈을 찡긋거렸다. 여기서부터 영애 구워삶는 것은 자신에게 맡겨달라며.
이에 이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마법사들도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클로이는 아코렐라 품에 안긴 채로 연신 중얼거렸다.
“괜히 욕심부렸습니다. 카일라가 공로를 세우는 바람에 마음이 초조해져서…….”
“에잇! 욕심 아니고, 발전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던 거죠. 덕분에 제 연구도 진척됐고.”
“아코렐라 대장! 진짜 짜증 납니다. 카일라보다 더!”
“오, 그렇습니까? 카일라 영애랑 저랑 좀 비슷한가요? 저는 멀리서만 봐서.”
“…미친년이에요. 걔도.”
“아하하하! 좋네요! 원래 미친것들이 세상을 바꾸거든요.”
푸드덕!
아코렐라가 호탕하게 웃어대는 와중, 왕궁 창을 통해 전서구들이 드나들었다.
홀린 가문으로 보내는 것과 아스타나의 카티마코로부터 온 것, 그리고 바리엘에서 보내온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날개를 크게 펼쳤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