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22
제622화. 서신으로 주고받는
토올룬에 아침이 찾아온 지 오래건만, 왕의 침실에서는 기척이 없다. 함부로 얼굴을 뵐 수도, 그렇다고 말을 걸 수도 없는 분인지라 시종들은 난감하게 서서 시간만 보내는 중이었다. 서신을 갖고 온 수상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중천이 될 때까지 그리 있었을 터.
“전하는?”
“말씀이 없으십니다.”
“…문을 열라.”
환한 바깥과 달리 침실은 암막 커튼으로 인해 어두웠다. 빛 몇 줄기만 간신히 들어오는 침대 위. 흰 머리칼을 늘어트린 채 앉아 있는 아이의 실루엣이 보였다.
토올룬의 왕 쿠마샤.
아이는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쉬이 들리지 않았다. 일어난 지 꽤 된 것 같은데 옷차림도 잠옷 그대로다.
“전하?”
“쉬잇.”
쿠마샤는 수상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서 가만있으라 손짓했다. 자세히 보니, 아이의 손에는 인형이 들려 있었다. 연결된 줄이 다 떨어졌고 사지가 성치 않아 보였지만, 수상은 그 인형이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 바로 알아챘다.
바리엘로 갔던 인형술사들이다. 이안 히엘로의 생모, 필리아를 데리러 갔던.
“아아. 조금만 더 살아봐. 시선이라도 돌려보라고.”
아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연신 인형을 흔들어댔다. 상태로 보아 기상 직후부터 계속 저러고 있었던 것 같다. 수상은 그 뒤에 서서는 쿠마샤의 볼일이 끝나길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아이의 한탄 들려왔다.
티잉-!
인형의 마지막 줄이 끊어지고 만 것이다.
인형술사의 죽음. 수상은 전해 들은 것이 없었기에 왕에게 무어라 보고하면 좋을지 속으로 변명을 그려냈다.
하지만 아이는 책임 물을 생각 따위 없다는 듯, 그저 발라당 누워 발만 굴려댔다. 악에 받친 손아귀 속에서, 인형이 찢어발겨질 듯 구겨졌다.
“하필이면, 아! 진짜!”
“전하. 괜찮으십니까?”
“바리엘로 갔던 인형술사가 죽었다. 오늘 아침에 보니까 실이 느슨해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하여간 재수도 없지. 절단귀(切斷鬼) 놈들이랑 딱 마주친 것 같더군. 토올룬으로 들어오기 전인 것 같은데.”
아이가 침대 밑으로 머리칼을 늘어트리며 중얼거렸다. 거꾸로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어린이였으나, 들려오는 말은 잔악하여 혀를 내두르게 했다.
“죽을 거면 바로 죽을 것이지, 천천히 죽는 바람에 발견도 늦었어. 진작 알아챘으면 얼마나 좋아? 안 그래?”
“보이는 것도 없으셨습니까?”
“수풀 정도. 단서로는 모자라지.”
“절단귀 소행인 건 어찌 아셨습니까?”
“옆에 쓰러져 있던 마부. 귀가 잘려 있던데?”
절단귀는 토올룬 국경지에서 활동하는 도적 떼였다. 대부분 토올룬을 오가던 상인들이 고용한 용병 출신인데, 노예 시장을 거점으로 하여 지하 세계에서 움직이다 토벌당해 밖으로 쫓겨난 놈들이다.
절단귀란 이름도 귀신처럼 나타나 죽인 다음 귀를 잘라 간다 하여 붙여진 중의적인 표현. 소문에 의하면 놈들이 그러는 이유가 따로 있다 하는 것 같던데, 쿠마샤는 별로 관심 없는지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필리아를 절단귀 놈들에게 빼앗긴 것 같으니. 어쩌면 좋을까?’
놈들은 필리아의 가치를 알고 있을까? 히엘로의 어미인 걸 모른다면 아마 노예 시장 쪽으로 흘러들어 갈 가능성이 컸다.
이런저런 가정을 떠올리던 쿠마샤는 문득 수상 손에 들린 서신 한 장을 발견했다.
“그건 뭐지?”
“바리엘 제국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가 보낸 서신입니다.”
오호?
뜻밖의 소식에 쿠마샤가 벌떡 일어났다. 산발인 흰 머리칼이 인형 줄처럼 이리저리 뻗쳐 있었다. 수상은 그 모습을 애써 못 본 척, 예를 갖추어 서신을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대제국 바리엘의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입니다. 갑작스러운 서신, 송구합니다. 이는 황궁에서 보내는 공식 서신은 아니며, 마법부 장관으로서 토올룬에 보내는 협조 요청문입니다.
현재 토올룬 출신의 신원 미상인 자가 바리엘에서 소란을 일으켰고, 현재 생포 중입니다. 이자는 자신이 토올룬의 왕궁과 연관되어 있다 주장하는 중이니, 사실관계 확인을 위하여 토올룬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합니다. 허락하신다면, 마법부가 직접 토올룬을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흐음.”
쿠마샤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서신을 읽어내렸다. 모호한 내용만이 가득했다. 어째서 황궁이 아닌 마법부 장관이 요청한 건지, 신원 미상이라는 자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무 언급이 없다.
“이걸 요청문이라고 보냈나? 마법부 장관이라는 자가? 그리 멍청해 보이지는 않던데.”
“아무래도 인형술사와 관련된 사안을 떠보려는 수작 같습니다.”
“신원 미상인 자가 인형술사를 뜻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실종 소식을 들었을 터이니 그러지 않겠습니까? 황궁이 아닌, 마법부 장관으로서 이른 게 그 의도라 해석됩니다만.”
“러더포드일 수도 있지.”
아이는 생긋 웃으며 수상을 쳐다봤다.
러더포드는 토올룬에 근거지를 두었던 근원 모를 신원 미상인 자였고, 바리엘 황자들의 난에도 개입한 적 있었으며, 이드갈 보급으로 큰 혼란을 주었던 자다.
“떠보려는 수작은 맞아. ‘신원 미상’인 자를 인형술사로 판단할지, 러더포드로 판단할지는 우리에게 맡기겠다는 거지. 보자.”
하지만 어떡한담? 쿠마샤는 축 늘어진 인형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참으로 수가 빤히 보이는 연막이지 않나? 방금 인형술사가 풀숲에 널브러져 죽은 걸 두 눈으로 보았으니, 생포했다는 이안의 말은 분명한 거짓말이다.
“필리아의 실종에 대해 실마리를 못 잡은 게 분명해. 만약 우리가 인형술사에 대해 잡아떼면, 신원 미상인 자는 ‘러더포드’였다고 둘러대겠지?”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전하.”
“러더포드와의 관련은 어느 정도 부정할 수 없지만, 공식 서신도 아닌 것에 입장을 밝힐 필요는 없겠고.”
왕의 인형술사들이 러더포드를 지원해 아기아르에 간 전적이 있고, 쿠마샤 또한 바르사베라는 마검사의 눈을 통하여 진 황제 앞까지 성큼 다가간 적이 있었다.
“전서구에 칼라마트 인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바리엘이 버고스의 수도에 성공적으로 입성한 것 같은데, 그리되면 다음 행선지는 이곳, 토올룬입니다.”
즉, 침략 명분을 위해 던진 서신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협조를 거절하면 신원 미상인 자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게 되니, 바리엘에서는 의심하여 강압적으로 토올룬 경계선까지 치고 올라올 터다.
반면 협조하겠노라 받아들이면 마법사들을 토올룬, 나아가 왕궁까지 들이겠다는 것인데, 이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위험이다. 다른 일반인들과 달리, 마법사는 단 한 명만으로도 대지를 가르는 자들 아닌가?
“그럼 어쩌면 좋겠어? 답장하지 말까?”
쿠마샤가 배시시 웃으며 종이를 까딱거리자, 수상이 잠시 침묵했다.
“그것 또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황제의 직인이 찍힌 것도 아니고, 제국의 일개 장관이 보내온 협조 요청문일 뿐이다. 토올룬의 왕인 쿠마샤에게 답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리되면 다음은 분명합니다. 황제의 직인이 찍힌 서신이 올 것입니다.”
“단순한 시간 벌이밖에 안 된다?”
“예. 러더포드에게 지원해준 것은 인정하시되, 의도와는 달랐음을 주장하여 명분의 여지를 줄이십시오.”
“러더포드를 도우려는 게 아니라, 아기아르 주민들의 구호를 위한 지원이었다고?”
“훌륭하십니다.”
까딱까딱, 쿠마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어쨌거나 바리엘의 협조 요청에 응하기는 하는 것이니, 자연스레 왕궁 문도 열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마법사들을 여기로 불러도 되겠어?”
나도 나지만, 그대들도 지킬 것이 많잖아? 쿠마샤의 물음에 수상이 고개를 숙였다.
“수도로 들이는 것은 당연히 불가합니다만, 잘 생각하면 이는 기회입니다.”
인형술사들은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든 간에, 배경과 인형만 주어진다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니 마법사들을 지정 공간에 밀어 넣기만 한다면, 손대지 않고도 바리엘의 주요 전력을 해치울 수 있는 기회다.
“흐음.”
이론적으로는 완벽하나, 설마 마법사들이 그걸 모를까? 게다가 이안 히엘로라는 자는 전쟁의 수뇌 역할을 하고 있는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토올룬으로 오려고 할까?
“초청해도 오지 않을 것 같으니, 원하는 대로 토올룬에 오라 하는 건 어때?”
“너무 위험 부담이 큽니다.”
“…알겠어. 그럼 토올룬 인근 정도까지만 허락하여 거기서 회담하는 것으로 하지. 수상, 자네가 사람을 보내도록 해. 국경 인접지는 어디가 좋겠어?”
“수도 서쪽, 미리 배경으로 제작해 놓은 소도시가 좋겠습니다.”
수도의 서쪽에는 마산타르가 있지만, 신전을 보호하기 위해 인근 지역은 빠짐없이 모두 본을 떠 배경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상대를 유인하여 잡아내기에 적합했다.
“그래. 알겠어. 필리아를 찾아야 하니까 시간은 조금 넉넉히 두자고. 노예 시장 쪽으로 사람을 풀어봐.”
“예, 전하.”
쿠마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찢어진 인형을 이리저리 살폈다.
멍청한 수상 같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안 히엘로는 저런 단순한 수에 걸릴 인간 같지 않았다. 그런데도 일단 허락하는 것은, 저자에게 ‘실책’을 얹어주기 위함이었다.
쿠마샤는 신하들이 올린 지하의 신이자 토올룬의 왕. 수상이 가진 힘의 기반을 흩트려 놓기 위해서는 외부 힘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 * *
“아코렐라 대장! 신분증 안 챙겼습니다!”
“오, 깜빡했네!”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이걸 놓고 갑니까?”
“뭐 어때? 어차피 병사들이랑 같이 다닐 건데.”
아코렐라와 클로이 그리고 병사들이 인근 상급 마력석 매장지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아코렐라는 제 몸보다 큰 가방 가득 실험 물품을 욱여넣었다.
“아니 근데 대장, 그걸 어떻게 들고 가려고요?”
“내가 들고 가나? 클로이 영애!”
“네엡!”
아코렐라의 부름에 총총걸음으로 자연스레 달려오는 클로이. 마법사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정작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아 했다. 당연한 일을 한다는 듯이 말이다.
“날아갔다 오면 얼마 안 걸리는 거리니까 문제 있으면 오시고요. 사고 치지 마세요. 예?”
“아이고, 걱정도 지랄!”
“걱정 안 하게 생겼습니까? 어라? 전서구다.”
마법사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고개를 쳐들었다. 비둘기 한 마리가 유려한 날갯짓으로 허공을 돌더니, 이내 이안의 어깨에 가볍게 착지했다.
발치에 묶인 서신 한 장. 목에 걸린 마력석으로 보아, 토올룬에서 온 답신인 게다.
“다, 답신입니까? 빠르네요.”
“그러게. 무시할 줄 알았는데.”
“나는 올 줄 알았어. 근데 이렇게 재깍 올 줄은 몰랐지. 이안 님, 이놈들 무어라 합니까?”
이안은 잠시 기다리라는 듯 손짓하고서 서신을 펼쳤다. 뒷면으로 비치는 내용이 생각보다 길었다. 짧게 읽어내린 이안의 눈썹이 부드럽게 일그러졌다.
“…수상이 답장했군.”
“수상이! 수상하다!”
“조용히 하세요, 대장. 진짜 분위기 파악 좀요.”
“요약하자면, 러더포드에게 지원해준 것은 인정하나 바리엘에 대항하려는 의도가 아닌 아기아르 주민의 생존권을 위함이었다. 협조는 기꺼이 할 터인데 왕궁에 들이는 건 부담스러우니 국경지 인근에서 접선하자는 내용이다. …시일은 좀 길게 잡았군.”
이안은 손끝을 까딱거리며 지시했다.
“지도.”
“아, 예예.”
촤악!
그러고는 서신과 지도 내용을 살펴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렸다.
“이자들이 접선지로 정한 지역은 필시 토올룬 왕의 영향력이 미치는 공간이다. 바리엘 병사들에겐 멀리 우회해야 하는 길이면서, 우리에겐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곳이지.”
“위, 위험을 감수한다 하면요?”
“드넓은 대지 중 특별히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니, 신전이 있을 가능성이 커. 공교롭게도 서쪽이군.”
“아, 그렇겠네요. 황제 폐하와 트웰러 장관님께도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적이다.”
“예? 무엇이요?”
“우리가 ‘신원 미상’인 자를 인형술사가 아닌 러더포드라 확정하고 있다 여기고 있으니, 이는 저들이 인형술사의 생사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 더. 바리엘에서 토올룬까지의 이동 시간과 필리아의 실종일을 한데 놓고 계산해보면,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한데 만남까지의 시일을 꽤 길게 두지 않았나. 이는 필리아가 아직 토올룬에, 정확히는 왕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뜻이지.”
저들이 필리아를 납치한 건 필시 이안 히엘로, 자신을 유인하거나 노리기 위한 수작이다. 그런데 이리 순순히 걸어 들어 가겠노라 일렀음에도 시일을 길게 두었다는 건, 아직 저들도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게다.
이안은 연속해서 떠오르는 생각을 자신도 모르게 읊조렸다.
“…아직 이동하는 중이겠군. 그리고 이동에 시간이 많이 든 것으로 보아, 인형술사들에게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