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24
제624화. 위장
“이안아아! 우리 어디 간다고?”
콰앙!
베릭이 갑작스레 문을 열어젖히자, 마법사들이 멈칫거리며 그를 돌아봤다. 며칠 사이 조용하다 싶었는데 때깔이 좋은 걸 보니 어디 숨어서 먹고 쉬었던 게 분명했다.
이안은 작은 여행용 가방에 옷가지 따위를 간단히 챙기며 고갯짓했다.
“토올룬.”
“와씨, 거긴 갑자기 왜?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이 있는지를 알아내려 가는 것이다. 베릭, 너도 짐 챙겨. 참고로 먹을 것은 들고 갈 필요 없다. 토올룬은 풍족한 나라거든.”
그때, 궐련을 문 헤일이 마찬가지로 여행 가방을 끌며 나타났다. 이안의 것보다 조금 컸는데, 마법사들은 그 안에 든 게 무언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궐련과 아코렐라가 남겨놓고 간 증폭제들일 것이다.
“헤일 대장도 간다더만? 진짜네.”
“어어, 그래. 잘 부탁한다. 베릭.”
“가서 사고치지 말라는 뜻인가?”
“이안 님. 요즘 베릭 말귀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흔히 개도 사람이랑 오래 살면 말귀를 알아듣는다고 하던데. 실제로 보니 신기하군요.”
“콱 씨! 누구를 개 취급 하고 앉아 있어?”
“말 나온 김에 앉아라. 출발하기 전에 목적과 일정을 일러줄 터이니.”
베릭이 소파에 널브러지듯 누워 다리를 꼬자, 헤일이 작은 지도를 펼쳤다. 토올룬의 지도였다.
“우리는 토올룬 수도 인근, 인기척이 드문 장소에 포탈을 열어 거기서부터 이동할 것이다. 바리엘 마법사가 토올룬에 왔다는 게 알려지면 안 되기에 늦은 밤 신속히 움직여 노출을 최소화한다. 지도상으로는 이곳이다. 민가와 떨어져 있으면서도 수도로 통하는 길목과 이어져 적합하다고 판단되는데-”
“되는데?”
“지도가 워낙 오래된 것이라 확신할 수 없어. 혹여 이동 과정에서 목격자가 발생한다면, 처리해야 한다.”
“흐음. 오케이. 이해했어.”
헤일이 베릭을 일대일로 가르치는 동안, 이안은 거울을 살피며 옷매무시 정돈에 열중했다. 막 손으로 머리를 만지려는데, 마법사들이 양손을 내저으며 이안의 시선을 자신들 쪽으로 돌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안 혼자 머리 손질하면 소가 핥은 것처럼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포털에서부터 수도까지는 넉넉잡아 한나절. 칼라마트로의 복귀 소요 시간은 미정이다. 수도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출발 지점으로 다시 돌아와 포탈을 열 수도 있다. 모든 건 유동적으로, 상황에 맞게 결정한다.”
“가서 얼마나 있을 건데?”
“길어도 한 달. 그 안에는 무조건 복귀해야 해.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싶으면 중간에 돌아오겠지만.”
“그러니까, 그 목적이 대체 뭔데요. 토올룬 왕 모가지라도 똑 떼어오면 되는 건가?”
“수도는 토올룬 왕의 손바닥 안이다. 그가 빚어낸 거대한 무대와 같을 터. 베릭, 괜히 나댔다간 네놈 대가리에 먼저 구멍 뚫린다. 그러니 명심해.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딱 세 가지-”
헤일이 손가락을 하나씩 세우며 일렀다.
“서쪽 신전. 토올룬 왕궁의 사정. 그리고 필리아 님의 행방이다.”
“필리아? 필리아가 거기 있대?”
“모르지. 인형술사들의 이송 과정 중 문제가 생겼다는 것 정도만 짐작할 뿐. 이에 대해 상세히 확인하는 게 잠행의 목적이다.”
“질문!”
베릭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번쩍 손을 들었다.
“토올룬은 바리엘처럼 중앙수비대가 없나? 수도로 들어가려면 신분증 검사 해야 하잖아. 우리는 뭘로?”
“좋은 질문이었어, 베릭. 따라서 우리는 위장이라는 걸 할 것이다. 바리엘 몰락 귀족 신분으로, 상단을 운영하다 정리한 뒤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상황을 설정했다.”
“오호, 몰락 귀족이라. 그럼 내가 도련님인가?”
베릭은 꿈에 살짝 젖었는지 눈을 반짝이며 좌우를 둘러봤다. 이것 봐라! 나 이제 귀족이닷!
“꿈 깨. 넌 호위기사다.”
“엥? 그럼 헤일 대장은?”
“가주. 자식 둘을 둔.”
자식이 둘이라니? 베릭이 의아하다는 듯 이안을 돌아보자, 그가 문 쪽으로 고갯짓했다. 마침 그의 누이가 오고 있다며.
“실례합니다.”
“…어금니?”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은 바르사베였다. 여전히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었는데,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단언하건대, 살면서 드레스 입어 본 적이 손에 꼽을 게다.
“에엥? 쟤를 왜 데려가?”
“인형술사의 이송 과정 중에 문제가 생긴 게 맞는다면 여러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겠지. 내부 분열, 배신, 천재지변, 그리고 도적 떼의 습격 등등. 현재 전쟁 여파로 북쪽 지대의 치안이 불안정하니, 우리는 도적 떼와의 연관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리되면 필리아 님이 노예 시장 쪽으로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지.”
그러니 바르사베와 함께한다면, 의심받는 일 없이 노예 시장을 샅샅이 뒤져볼 수 있을 것이다.
눈이 불편한 귀족 영애를 옆에서 도와줄 ‘적당한 나이의 여자’, ‘바리엘어에 능통한 자’는 노예 시장을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을 테니.
베릭은 혀를 끌끌 차며 바르사베를 위아래로 훑었다.
“졸라 하나도 안 어울리는데. 차라리 다른 애를 데려가. 눈도 불편한데 뭘 어쩌겠다고.”
“그래서 더더욱 함께 가는 것이다.”
“베릭, 손 줘봐.”
바르사베는 더듬더듬 앞으로 다가와 베릭에게 손을 내밀었다. 베릭이 영문 모른 채 그 손을 잡자, 그녀는 손을 따라 올라가 그의 머리가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 그런 다음 부드럽게 볼을 감싸 단단히 고정하고는-
빠아악!
있는 힘껏 박치기를 시전했다.
“아아악! 미친 어금니!”
“왕궁 인근으로 가면 인형술사에 대한 정보가 훨씬 많아. 운이 좋다면 돌아오기 전에 주술을 풀 수 있겠지.”
바르사베의 시각은 현재 토올룬 왕궁과 연결되어 있었다. 위험하지만 평소처럼 눈을 가리고 다닌다면 문제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바르사베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지 않나. 마검사들 중에서도 유독 실력이 빼어나니, 잘만 하면 토올룬의 왕에게 크게 써먹을 수 있는 그런 능력 말이다.
베릭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뭐, 쟤한테 그런 게 어딨어? 내가 아는데.”
“그래, 알고 있겠지. 너도 보았으니까. 메일리데일리 앞에서.”
“메일리데일리? 10년 전? 그때 나 뒤지기 일보 직전이었어서 기억도 잘 안 나.”
“그럼 됐다. 아무튼, 바르사베까지 하여 넷이서 움직일 것이니 그리 알도록. 출발은 오늘 새벽 다섯 시다. 토올룬은 새벽 세 시겠지. 짐을 잘 챙겨두도록.”
“먼데! 나도 알려줘!”
베릭은 소파에서 발을 굴려대다 그만 바르사베의 드레스를 차버리고 말았다. 이에 바르사베가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잡아달라는 듯이 말이다.
“흥. 내가 두 번 속나? 에베베다.”
“응. 안 잡아도 돼.”
빠아악!
“아아악!”
“이제는 소리만 들어도 어느 정도 감이 오거든.”
“이거 미쳤네. 반대쪽 어금니도 털어줘? 시발, 그리고 이렇게 근육질인 영애가 세상에 어디 있어? 차라리 호위기사가 더 어울리겠다!”
베릭이 방방 뛰어대며 항의했지만, 모두가 무시했다. 어차피 바르사베는 잠행 내내 베일에 가려져 있을 테니까.
“아니면 다 같이 평등하게 가! 나는 왜 나갈 때마다 호위기사인데?”
“베릭, 너 정도면 호위기사도 감지덕지다.”
“몰락했어도 귀족이어야 한다. 그래야 왕궁 쪽 정보에 접근하기 쉬워.”
이안은 미리 준비한 브로치를 가슴팍에 달며 중얼거렸다. 버고스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했던 몰락 가문의 인장이었다.
그는 헤일이 꺼낸 지도를 유심히 바라보며 포탈 지표를 계산했다.
“포탈에 오르면, 여기서 목적지까지 5분 안에 도착할 것이다. 말과 마차도 맞춰서 준비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이안 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헤일 대장은 올 때 과자 좀 사다주시고요. 토올룬 꿀과자가 그렇게 맛있대요.”
“어? 저도요.”
“가서 필리아 님 꼭 구해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무슨 일 있으면 포탈 바로 여십시오!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복작복작, 마법사들은 이안의 가방 정리를 도왔고, 베릭은 꿀과자 소리에 온 정신을 빼앗겼다.
시끄러운 와중, 이안은 인형술사의 초상화와 간이로 그려진 필리아의 그림을 번갈아 살피며, 이내 곱게 접어 품에 챙겼다. 부디, 신께서 굽어살펴주고 있기를 바라며.
* * *
“꺄아악!”
필리아의 비명에 대화 중이던 도적들이 일제히 고개를 틀었다.
워낙 시끄러운 시장 통인지라, 웬만해선 누군가의 비명 따위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곳. 하지만 자그마치 최소 금화 서른 닢짜리 물건의 비명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반응하여 필리아 쪽으로 다가왔고, 이내 놀라 흠칫거렸다. 필리아의 얼굴에 가느다란 상처가 나 있었던 것이다.
“왜 이래, 이거?”
“이봐! 얘 얼굴이 왜 이렇게 됐어?”
“뭐? 어머, 진짜네.”
다른 상인과 얘기하며 수첩을 뒤적거리던 여자도 놀라서 필리아의 얼굴을 살폈다. 밀가루처럼 보들보들해 보이는 피부 결을 따라 상처가 꽤 길게 나 있었다.
필리아는 눈물을 뚝뚝 흘려대며 연신 여자를 쳐다봤고, 그녀는 처음으로 저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채는 데 실패했다.
“네가 그랬어?”
도적 한 명이 험악한 투로 묻자, 여자는 어이가 없다며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지금 무슨 헛소리지?”
“네가 했는지를 물었다. 기다 아니다, 대답만 하면 될 걸 혓바닥이 기네.”
“나 원 참! 어이가 없네! 내가 얘한테 손을 왜 대? 이런 물건은 얼굴이 곧 값인데!”
“그러니까. 흠집 좀 내서 가격 깎아보려는 수작 아니냐고. 지금 못 떼어갈 것 같으니까 엿이나 처먹으라는 거 아냐?”
“시발! 나 여기서 장사한 지 10년째거든? 상도덕도 없는 줄 알아? 딱 봐도 얘 혼자 손으로 긁었구만. 물건 간수도 제대로 못 한 주제에 어디서 남한테 지랄인데?”
여자와 도적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지자, 인근 상인들도 하던 것을 멈추고서 그들을 지켜봤다. 잠시 후, 혹여나 거리 한복판에서 칼부림이라도 날까, 상인 한 명이 끼어들어 중재했다.
“내가 봤어. 저 물건이 혼자 손톱으로 볼 긁더라고.”
“뭐? 정말이야?”
“아, 그럼! 특등품이니 눈이 절로 가지. 내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니까.”
도적들이 어이없어하며 필리아를 돌아보자, 그녀는 언제 울었냐는 듯 눈을 똑바로 뜬 채 그들을 쳐다봤다.
“이거 미친년이네. 자꾸 그렇게 앙큼하게 까불어댔다간 진짜 인생 끝나. 언니, 처신 잘 했으면 왕궁으로 들어가서 좋게 지낼 수 있잖아. 왜 이렇게 되도 않는 짓을 할까?”
여자가 철창을 붙들고서 짜증스럽게 속삭이자, 필리아도 나지막이 대꾸했다.
“…왕궁 안 갑니다. 신경 끄고 그만 지나가주세요.”
“야!”
콰앙!
여자가 철창을 우악스럽게 잡아 흔들자, 도적들이 어색한 몸짓으로 저지하며 가로막았다. 무턱대고 의심하여 서로 기분이 상했는데 거래가 진행될 리 없다. 어차피 서른 닢으로는 좀 애매했으니, 이걸 빌미로 거래를 파할 생각이었다.
“그만. 미안하지만, 다음에 보자고.”
“아니, 금화 쉰 닢 줄게. 저거 넘겨.”
열이 바짝 오른 모습을 보자, 도적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쉰 닢! 적어도 경매가 열리면 저 여자가 쉰 닢 부르는 건 정해졌다는 뜻이니까.
“크흠. 경매에서 봅세. 그럼 이만.”
“가자! 당나귀 빼!”
“어어, 그래. 가자가자.”
“경매 언제 할 건데?!”
여자가 악에 받쳐 소리치자, 도적들이 필리아를 살폈다. 상처가 깊지 않아서 며칠 있으면 아물 듯싶다.
“제일 좋은 상태로 내놓아야지. 사흘에서 나흘이면 되지 않겠어? 아 참, 말 좀 전해주라. 또 몸에 흠집 내면 가만 안 둘 거라고.”
하지만 필리아는 눈치껏 먼저 알아듣고는 자신의 볼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이제는 문제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당나귀는 천천히 움직여 시장을 가로질렀고, 홀로 남은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필리아.
‘경매 때 보자.’
서른 닢 줄 거 제 입으로 쉰 닢까지 올렸으니, 그 차액은 반드시 저 여자로부터 받아내고야 말겠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