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3
제63화. 골목에서
“에. 한번 봅시다.”
로만드로는 코를 긁적거리며 서류를 확인했다. 그 맞은편에 앉아 함께 종이를 뒤적거리는 이안과 카칸티르. 저녁 식사 후, 하루 마무리 회의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이안에게 물었다.
“길샘마을 안쪽은 재건할 것이 없는가?”
“네. 전투 당시 다리가 먼저 끊어지는 바람에 고립되어 피해가 없었다 합니다. 다리 재건이 진행 중이니, 이것만 완료하면 거의 끝날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러면 이제 채석장 주문을 좀 줄이지.”
브라츠 영지에서 전투 흔적을 지우는 것, 큰 숙제 하나를 넘긴 것 같아 로만드로는 기분이 좋았다. 그는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계속 물었다.
“굴라 보급은?”
“슬슬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미리 보급했던 영지민들을 통해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합니다. 메렐로프 쪽으로 흘러가기 전에, 공표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군. 오늘도 나가나?”
“사흘 정도만 더 할 생각입니다.”
“낮에도 일해, 밤에도 일해. 마법운용자는 남들보다 특출한 재능이 있다고 하더만, 자네는 그게 체력인가 보오.”
뜻밖의 칭찬에 이안이 놀라며 웃었다. 초반, 브라츠에서 지낼 때는 외출 한번에도 골골대며 쓰러졌던 이안 아닌가? 이제는 대사막을 오가며 조금씩 단련되고 있는 모양이지만.
“내용을 다시 확인해 보지. 음, 전 브라츠 영지 내의 굴라 재배와 유통 및 섭취는 자유롭되, 외부와의 매매는 무조건 저택을 통해서 할 것.”
정확히는 황궁 자문관을, 그리고 더 정확히는 이안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굴라 특성상, 분명 브라츠에서 독식하는 기간은 이번 겨울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워낙에 번식이 빠르고 흔한 작물인지라, 인식만 개선된다면 곧장 바리엘 전역에서 소비될 터.
로만드로는 문장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메렐로프라는 조건을 붙여볼까…….”
“좋지 않습니다. 그쪽에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니까요. 지금으로서는 저희가 불리합니다.”
“흠. 사실 먼저 시작한 것은 그자인데.”
“원래 때린 자는 기억을 못 하는 법이지요.”
“뭐. 그렇긴 하지. 하면 관련 벌금은…….”
상세한 내용을 조율하다 보니, 어느덧 달이 하늘 중앙에 걸렸다. 이안은 시계를 힐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하면 되겠습니다. 혹시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아. 네르사른 님.”
이안의 말에 카칸티르 뒤에 서 있던 네르사른이 손을 들었다. 회의 내내 비교적 조용히 있던 그였다.
“대사막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대사막에서요?”
“부족장님의 건강이 다시 악화하였다고 합니다.”
이안이 주었던 실라스크로 죽을 고비를 한번 넘겼던 노인이었다. 회복세에 들어섰다 하여 다행이라 여겼는데, 아무래도 죽음이 등 떠미는 것을 버틸 수는 없는 모양이다.
“하여, 남은 실라스크를 모두 쓰기로 했습니다.”
“이런.”
“심는다고 하여도 정보가 없으니 어떻게 재배할지, 그리고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요.”
“잠깐. 나도 좀 끼워주지 그러나? 부족장은 누구고 실라스크는 또 무슨 말인가?”
가만히 경청하던 로만드로가 손을 들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모르는 얘기였다. 특히 실라스크라는 것은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다.
이안은 그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해서, 집시의 병을 고치려면 실라스크라는 붉은 꽃이 필요한데 마침 저한테 그게 있었지 뭡니까. 천려족은 그중 하나로 고비를 넘기고, 나머지 하나는 후대를 위해 심을 것인가 아니면 윈첸 부족장님께 쓸 것인가 고민하였습니다. 그 결정이 난 것이지요.”
“실라스크? 처음 들어보는데.”
“정말 모르십니까? 한번 피면 지지 않는 붉은 꽃입니다.”
황궁에서 온 자문관이 모를 정도면 말 다했다. 사실 전생에 황제였던 이안 역시 생소한 것이었으니, 바리엘에서는 찾기 어렵다고 보는 게 맞겠지.
“우리가 그리 결정한 것에는 브라츠의 현재 상황에 제일 큽니다. 저희의 장례 풍습을 알고 계시지요?”
“네. 알고 있습니다.”
족장이나 부족장이 죽으면 일족 전체가 1년간 칩거에 들어선다. 가족이 죽으면 해당 가족만 그리하겠지만, 우두머리는 모두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윈첸처럼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킨 자라면…….
“로만드로 님.”
“응?”
이안은 테이블을 가만히 두드리다가 그를 불렀다. 그간 둘러 둘러 말하지 않았던 것을 말할 때가 된 것이다.
“황궁으로 올린 보고서에 답신이 왔습니까?”
“아니. 아직 한 건도 오지 않았네.”
“저는 마리브 황자 저하의 답신을 여쭙는 겁니다.”
매일매일 전서구를 날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1황자는 분명히 몰린 일행을 견제하는 중이었으며, 이는 게일 2황자를 견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순히 브라츠의 재건 따위에만 관심 있을 리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딱 한 번 왔었지.”
“실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별것 아니었네. 그저 영지의 상황을 꼼꼼하게 전달하라는 것이었고 그리고…….”
로만드로는 이안을 힐끔거렸다.
“자네가 마력운용자라는 걸 보고하였기에, 잘 살피라는 말씀이었어. 크흠. 진짜 그것뿐이네. 별거 없지?”
이안이 추측하는 바에 한하면, 게일의 주축 중 하나가 마법부였다. 반란 실패로 안 그래도 귀했던 마법사들이 대거 숙청되는 사건을, 이안은 기억했다. 그러니 이안이 마법운용자라는 것은 마리브 입장에서 조금 곤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마리브도 이러한 세력 구도를 파악하고 있을 테니, 이안을 게일의 편이라 오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문관님. 보시다시피, 저는 몰린 일행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음. 그래. 안다네. 그래 보여. 허허.”
로만드로는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이안이 무슨 말을 할지 조금 긴장되는 듯 보였다.
“마리브 황자 저하께서는 브라츠의 새로운 영주를 몰린 일행과 관계없는 자로 올리고 싶어 하실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윗분들끼리의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
“저 또한 그 뜻을 함께합니다. 자문관님.”
“사실 조금은 짐작하고 있었네.”
“짐작하셨다니 말씀하기 편합니다. 로만드로 님, 중앙으로 복귀하고 싶어 하시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서둘러 영주가 세워진다면, 자문관님 역시 좋은 일이겠지요.”
“이안 자네…….”
“저를 영주로 추천해 주십시오.”
영주 임명권은 황제의 소관이지만, 계승 1순위이자 실세인 1황자의 추천 역시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제아무리 죄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하더라도, 이안이 마력운용자인 이상 부질없는 제한이었다. 바리엘의 발전을 위하여, 누군가는 그를 붙잡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대사막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새 영주가 이전 가문의 핏줄인 저를 가만 놔둘 리 없지 않습니까. 또한, 황궁에서는 노예라는 신분으로 제 능력을 독점하려 들 겁니다.”
“그것도 그러하지만…….”
“제 안전과 브라츠의 평화를 지킬 유일한 방법입니다. 황궁에서 신경 썼던 민심 역시 저보다 부합하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었다, 보고서에 빼곡하게 적혀 올라간 일 처리는 괄목할 만한 능력이었다. 굴라의 발견 역시 마찬가지다. 제국의 대기근을 없애는 것만으로도 이런 변방의 영주 자리 따위야 솔직히 부족한 처사였다.
물론 아직 거기까지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로만드로는 결심했다는 듯 궐련을 꺼내물었다.
“좋아. 내 솔직하게 얘기하지.”
“말씀하십시오.”
“마리브 저하께서는 자네와 몰린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네.”
제삼자의 시각으로, 이안은 몰린을 통해 제 아비를 밀고하였으며 그 여파로 현재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는가. 몰린 사람을 영주로 세우기 위해 발판을 만들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마력운용자. 황궁으로 들어온다면 필시 마법부에 소속될 터. 마법부 장관 웨슬리가 게일의 여인인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어떻게 놓고 봐도, 이안은 게일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거다.
“그런 이유라면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어떻게?”
“내막은 마리브 저하를 뵙고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상세하게 말한다고 한들, 글자로만 전달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몰린 일행과 제가 진실로 반대되는 길에 서 있음은 당장이라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바로, 죽음으로써.
이안의 담담한 눈빛을 읽은 로만드로는 뒷골이 살짝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떤 말도 없었거늘 어찌하여 아슬아슬한 기분이 드는 건지 원.
“그, 마리브 저하께는 내가 그리 전해보겠네.”
“감사합니다.”
사실 로만드로도 내심 이안이 적임자인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출신과 상황이 이러해서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말을 꺼내는 순간, 알 수 없는 정치의 소용돌이게 직접 몸을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로만드로는 그저, 빨리 재건을 마치고 중앙의 본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리따운 자신의 아내가 기다리는 그 집으로!
“그럼, 오늘은 그만.”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이지?”
“혹시 중앙에 실라스크를 취급하는 상단이 있는지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제국의 수도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분명 정보를 찾고자 한다면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로만드로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 한번 확인해 보지.”
“감사합니다.”
“밤이 너무 깊었어. 자네도 적당히 하고 누움세.”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지요.”
끼익.
로만드로와 네르사른이 자리를 정리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이안은 뻐근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바깥의 베릭을 불렀다.
“베릭. 오늘은 일찍 나갔다 들어오자.”
“피곤하지?”
“그래. 눈이 자꾸 감겨서 안 되겠다.”
이안은 웃으며 후드를 어깨에 둘렀고, 이내 회의실 등불을 모두 꺼버렸다. 이날 따라, 달조차 뜨지 않는 칠흑의 밤이었다.
* * *
“이안 님이 오셨다!”
“쉬이. 목소리 좀 죽이게나.”
“이안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들 안 자고 있었군.”
“당연하지요. 그나저나, 어제 처음으로 씨를 볶아 먹어봤습니다. 진짜 맛있더라고요!”
이안이 밤중에 굴라를 들고 나눠준다는 소문은 이미 파다했다. 다들 자는 척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가도 인기척이 들리면 뛰쳐나와 그를 맞이했다. 들뜬 분위기 덕분일까. 금지된 축제의 뒷모습처럼 느껴졌다.
“이거 어쩌지? 오늘은 준비한 게 많지 않아.”
“벌써요? 저는 한 줌 밖에 못 얻었는데…….”
“내일은 좀 더 넉넉히 챙겨보겠다.”
“이안 님 곤란하게 하지 마! 지금도 저 황궁 새끼들 눈 피해서 우리 도와주고 계신 거 아니야!”
“아이고, 이 자식아. 그 황궁 새끼들 듣겠다. 목소리 좀 죽이라니까.”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그들은 경비대가 오지 않는다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니, 아예 생각조차 못 하는 듯싶다. 굴라가 주는 기쁨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내일 오면 저 먼저 주셔야 해요. 네?”
“알겠다. 그러니 어서 들어가 자거라.”
베릭은 지고 있던 부댓자루를 탈탈 털며 굴라가 비었음을 알렸다. 아쉬워하는 영지민들이 하나둘씩 흩어지고 이안 역시 돌아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저벅저벅.
골목을 빠져나오자, 두 사람의 발소리만 들려왔다. 평소보다 피곤해서일까. 이안은 말없이 걷다가 베릭이 멈춰있음을 깨달았다.
“안 가느냐?”
“이안.”
베릭이 눈썹을 능청스럽게 ‘세 번’ 까딱거렸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맞물리는 시선. 이안 역시 후드를 벗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가자.”
뒤에 따라붙는 인기척이 셋.
이안은 짐짓 모른 척 계속 앞서 걸었고 베릭 역시 보란 듯이 팔을 휘적거렸다. 손에 무기가 없다는 걸 알리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