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33
제633화. 영원한 짝사랑
이안의 찻잔이 두 번이나 비워졌다. 어둠이 내려앉을수록 바깥의 소란은 줄어들었고, 이안의 과거는 나지막이 흘러내렸다.
로만드로는 빈 찻잔만 연신 만지작거리며 안타까운 낯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차게 식은 찻잔과 같이, 저 작은 아이의 과거도 차가웠구나 싶어서.
“-하여, 그렇게 된 경위입니다. 속이려던 생각은 없었습니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다 여겨주십시오.”
“아니, 그런 말 하지 말게. 솔직히 그 누가 믿었겠는가? 변경백의 서자가 알고 보니 미래의 황제였다란 것은, 언급하는 순간 황실모독죄로 처형되었을 사안이지. 다들 그대의 실 모습을 보았다 들었어.”
동료들이 이안의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지금껏 그가 보여주었던 신의, 충성, 지혜 등의 결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밀을 먹는 집시에게 보여주었던 본모습 덕이다.
그럼에도 로만드로는 당최 상상이 안 간다며 이안의 낯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너는 보았지, 베릭?”
“몰라. 묻지 마.”
이안 베로시온에 대한 언급만 나오면 베릭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로만드로는 그 심리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함께 마주하고 있지만 이안의 시간은 10년 전에 멈춘 것처럼, 서로 서 있는 세계가 다르다는 것에서 오는 상실감 탓일 터다.
로만드로는 위층과 이어진 계단 뒤, 살짝 나와 있는 드레스 자락을 힐끔거렸다.
“부인. 바닥이 찹니다.”
필리아였다. 위층에서 가볍게 몸단장하고 나왔지만,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이안 히엘로가 아닌 이안 베로시온이라는 아이의 일생을, 대면하여 듣기에는 힘들었던 것이다.
스윽.
로만드로의 걱정에도 필리아는 침묵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비비안나가 부축해주기 위해 일어서려고 했지만 로만드로가 저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해 보였다.
“원망하시려면 원망하셔도 좋습니다.”
이안도 비어버린 찻잔을 매만졌다. 필리아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아들의 몸을 앗아버린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여기 있는 모두와 달리, 그녀는 서자 이안을 유일하게 아는 자였다.
“어찌하여 그리 말하니…….”
겨우 대답한 필리아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그러자 이안은 문득, 브라츠에서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공원 한구석에 앉아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필리아. 그래. 그랬지. 그녀는 소리 없이 우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미안합니다.”
그것 외에는 덧붙일 말이 없었다. 필리아는 아들을 잃었고, 지금 여기에는 자신이 있지 않나?
그녀는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내 품에서 꼼지락거리던 그 아이의 존재는 무엇인데?”
“만물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정확히는 바리엘의 그림자를 지우고자 신께서 장치하신 작은 톱니바퀴 같은 것이지요. 서자 이안의 존재로 제가 여기에 왔고, 바리엘이 나아갈 길을 찾았으니, 저는 그리 여기고 있습니다.”
서자 이안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알고 있었다. 어릴 적 만났던 멜라니아의 증언으로 그걸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아마도 이안 베로시온을 기다리며 가장 적합한 시기를 일구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믿기지 않아. 어째서 이안이가?”
천사같이 환하게 웃던 아이, 넘어지면 눈물을 글썽이다 품에 안기던 아이, 긴 속눈썹을 내리며 곤히 자던 아이…….
“태어나면서부터 사명을 품고 있었는지, 아니면 어느 순간 깨달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서자 이안은 자신의 존재 의의를 알고 있었단 것입니다.”
꽈악.
필리아가 로엘을 세게 껴안았다. 심장이 서늘하게 뛰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럴 때마다 자신을 지탱해주었던 사랑스러운 돌덩이, 이안.
필리아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이안이의 존재가 너를 위한 것이었다면, 너의 존재가 결국에는 이안이를 위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이안 베로시온의 능력은 뛰어났다. 강한 마력을 지녔고, 지혜로웠으며, 고귀한 정신을 잇는 자다. 이안 베로시온이 그저 시간을 거슬러 오는 게 목적이었다면, 그 스스로 이곳에 왔을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서자 이안’의 몸을 빌렸다는 건, 결국 둘이 동시에 존립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안아.”
“예. 말씀하십시오.”
필리아의 눈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진실을 마주했으니 남은 것은 선택밖에 없다. 품에 안긴 로엘이 작은 손으로 어미의 슬픔을 닦아냈고, 달달 떨리는 몸을 잡아주었다.
“네가 이안 베로시온이라 하여 너에 대한 내 사랑이 변하지는 않아. 네가 있어서 서자 이안이 있었고, 서자 이안이 있었기 때문에 네가 있었던 것이잖니. 그리고 너의 그 모습은 내가 사랑해 모든 걸 바쳤던 아들의 그것이란다. 100년 후 황가의 귀한 자라 하더라도, 나에게 넌 언제까지나 소중한 아들일 거야. 하지만-”
이안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너는 그렇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 너에게는 너의 인생이 있으니까. 모자(母子)의 인연을 원치 않는다면 말해다오. 더 이상 너에게 짐을 더해주고 싶지 않아.”
영원한 짝사랑의 시작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원래 그렇다고 하지만, 필리아가 견딜 미래는 더욱 고달플 것이다. 아들이되, 그에게 자신은 어미가 아닌…….
“하지만 맹세해. 나는 네가 누구든 영원히 사랑할 것이고, 맹세했던 것과 같이 온 힘을 다하여 너를 지켜낼 것이란다.”
히엘로령 등과 엮여 있는 정치적 사안들과 관계없이, 순수한 의도로써 선택해 달라는 애원이었다. 물론 이안이 정치적인 판단을 내린다 한들 그녀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지만 말이다.
“이안아. 사실 나는 조금 알고 있었는지 몰라.”
필리아가 어릴 적 불러주었던 노래 가사를 이안이 모른다고 했을 때, 본능적으로 감지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릴 적과 다르게 조금은 차갑고 냉랭한 이안의 태도에서 그녀는 분명히 무언가를 느꼈다.
그런데도 불구, 이안을 놓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랑.’
필리아는 마주한 이안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이 베로시온의 영혼이라 할지라도, 그녀가 겪었던 감정이 사랑이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저에게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습니다. 두 분 다 어릴 적 돌아가셨지만, 서자 이안을 낳아준 그대가 있는 것처럼 저를 낳아준 부모님은 분명히 따로 있습니다.”
깊게 침묵하던 이안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음의 높낮이가 거의 없는 담담한 말투였다. 건조하다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로만드로는 분명히 알아챘다. 이안이 조심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누군가 제게 ‘어머니’에 관하여 물어본다면, 나는 필리아 그대를 떠올릴 것입니다.”
가득하여 넘치던 그 사랑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겪었던 건 필리아밖에 없었으니까.
희생으로 귀결되는 사랑은 참으로 고귀하고, 순수하며, 강인했다. 이안은 그걸 필리아를 통하여 배웠다.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게 대체 어떤 관계인지요. 하지만 여기 와서 필리아를 만나 알게 되었습니다. 내게 처음으로 어머니의 정을 알려준 사람이니, 나에게는 다른 의미로 지울 수 없는 분입니다.”
미안했다. 필리아가 사랑을 보여줄 때마다 자신은 서자 이안이 아니기에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필리아, 그대가 나를 용서한다면 나는 이대로도 좋습니다. 어머니라 부르며 죄책감 없이 사랑을 누리고 싶어요. 선택은 제가 아니라 그대가 하는 것입니다.”
계단 뒤에서 계속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자 로만드로가 손수건을 꺼내 이안에게 건넸다. 이안은 천천히 걸어가 벽 뒤로 고개를 내밀었고, 이내 닭똥 같은 눈물만 흘려대는 필리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어머니. 이제 거기 있지 마시고 이리 들어오십시오. 바닥이 찹니다.”
“이안아.”
“예, 로엘이 걱정하겠습니다. 그만 우세요.”
필리아가 로엘과 함께 이안을 힘껏 껴안았다. 포옹을 받아들인 이안은 잠시 그대로 있다가, 로엘에게 넌지시 물었다.
“괜찮니?”
불편하다면 너는 너의 뜻대로 해도 좋다. 로엘이 살아온 10년 동안 교류가 없었던지라 친오라비라도 서먹하게 여겨질 터였다. 그런데 그 내면은 먼 미래의 황제라고 하니, 사실상 아이에게는 남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나.
하지만 로엘의 대답은 굳건했다.
“…괜찮습니다.”
엄마의 기쁨이 곧 자신의 기쁨이고, 무엇보다 두 사람의 인연이 계속되는 것이 히엘로령과 대사막에 도움 되기 때문이다.
필리아는 정치적인 사안을 따지지 말아 달라 하였지만, 제삼자인 자신은 생각할 수 있는 부분 아닌가? 게다가-
“사실 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가끔 오라버니를 볼 때마다 다른 사람으로 보였거든요.”
다른 사람? 이안이 웃으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긴 백금발에 눈가가 서늘한 벽안의 소년.”
“이안 베로시온이네. 엉. 그거 베로시온 맞음.”
“베릭, 함부로 입에 올리면 안 된다니까! 황궁 가서 그러면 정말 큰일 나, 이놈아.”
옆에서 듣고 있던 베릭이 끼어들자 로만드로가 애원하듯 부탁했다. 하지만 알 바인가? 베릭은 보란 듯이 귀를 후비적거렸다.
“자, 그럼 얼추 얘기됐지? 이제 밥 좀 먹자.”
“어머, 내 정신 좀 봐. 고기 올려놓고 왔네.”
“비비안나, 괜찮아. 안 탔어. 냄새가 그래.”
“이놈의 짜식은 전쟁 통 나가서 굶고만 살았나. 이런 분위기에서도 밥 타령이네. 이안, 베릭이 어땠어? 버고스에서 임무 수행 좀 잘 하던가?”
“어어? 로만드로 님 못 들었나? 북쪽 대마물 전투에서 내가 싹 다 깔끔하게 정리해 부렀는디.”
“들었지. 제이럿 대장한테 얻어터졌다고.”
“어어?! 이거 문제 있다! 이안아, 이게 완전히 바뀌었는데? 제이럿 영감탱은 내가 쥐어팼지! 안 그래?”
“닥쳐, 미친놈아. 대장님이 뭐 어쨌다고?”
“어금니, 너도 그때는 눈깔 멀쩡했으니 봤잖아. 이제 내가 제이럿 영감탱 이김.”
그사이를 못 참고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이안은 필리아, 로엘을 소파 쪽으로 인도하여 함께 자리에 앉았다. 가만히 있던 비비가 배시시 웃으며 그들의 찻잔을 따뜻한 음료로 채워줬다.
“그럼 내일 황궁 들어갈 때 다 같이 들어가요?”
“비비, 너는 빼고.”
“네에?! 로엘이는요?”
“로엘이도 들어가야지. 행방에 관해서 뭔가를 봤었으니까. 비비는 엄마랑 저택에서 있자.”
필리아는 납치에 관한 증언을, 나머지는 그 과정에 대한 보고를 하게 될 것이다. 로만드로는 수첩에 무언가를 끼적이며 물었다.
“흐음. 그런데 얘기 들어보니까 토올룬 전력이 그렇게 대단한 것 같지는 않아. 베릭이랑 바르사베 대원이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하니, 이거 쉽게 끝나지 않겠어?”
“‘지금은’ 그렇겠지요.”
“무슨 말인가?”
외부와 단절되어 있던 나라가, 마법사들의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허점을 보이고 말았다. 하지만 이로써 그들은 다가올 전쟁을 대비하고, 취약점을 찾아내 보강할 것이다.
“그, 그러면 괜히 소란 피우고 온 것 아닌가? 건드려서 상대를 무장하게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니, 긁어 부스럼인 듯한데.”
“그렇긴 하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토올룬이 바리엘을 상대하기 위해 전력을 끌어오는 과정에서, 신전이 빠지지는 않을 것이니 말입니다.”
“신전?”
다몬의 형제들이 피로 씨앗을 내리고, 러더포드의 비밀과 바리엘의 운명을 뒤흔들 비밀의 신전.
이안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일렀다.
“분명히 움직임을 보일 것이니, 그 틈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제 시작이지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