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38
제638화. 불길한 징조
클로이는 눈앞을 아른하게 스쳐 지나가는 남정네들을 보았다. 모두 자신에게 구애하며 영원한 사랑을 갈구했던 자들이지만, 클로이에게는 그저 즐거운 사교 놀이에 불과했다.
남정네들이 손을 흔들며 저 멀리 떠나갔다. 클로이는 문득 그들이 안타까운 한편, 너무 매몰차게 대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자신이 대체 무어라고, 저들에게 그리 상처 주었을까.
‘미안해!’
이어서 친구들도 어렴풋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겉으로는 하하 호호 웃으면서 깊은 우애를 나누는 척했으나, 뒤로는 상대를 재단하여 위아래를 구분했던 자신의 발칙한 행동이 떠올랐다.
그뿐인가? 하인들에게는 패악질을 부리며 못살게 굴고, 다비온을 위해 일했던 모두를 하찮게 여기며 방종했던 자신이 참으로 창피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리고, 이제 와서 대체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가만히 생각하던 클로이는 문득 깨달았다. 주위가 온통 어둠이다. …아하!
‘나, 죽었구나?!’
“안 돼에에에에!”
클로이가 크게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자, 의무관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러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의식이 전혀 없던 환자가 저리 반응하다니. 함께 있던 간호사들도 그대로 굳어 클로이를 쳐다봤다.
“크, 클로이 영애?”
“…네?”
“괘, 괜찮으십니까?”
“저, 저, 죽었나요?”
“아니요. 보시다시피 아주 멀쩡하십니다만.”
클로이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붕대로 칭칭 감겨 있긴 했지만, 부러지거나 뭉개진 것 없이 멀쩡했다. 얼굴은? 더듬더듬, 매만지는 손끝에서 꺼칠한 거즈 촉감이 느껴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람? 마지막 기억은 바위에 짓눌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던 것인데…….
“영애께서 들고 있던 바위, 마법사님이 마법으로 터트렸다 합니다. 조준이 정확해서 바위는 산산이 조각났지만, 영애께선 그 충격으로 기절하셨더라고요. 다행히 잔해에 의한 상처도 크지 않습니다. 생채기 정도니 뭐… 며칠 안에 딱지 질 겁니다.”
“마, 마법이요?”
“예, 지금 아코렐라 대장 모시러 갔으니 금방 오시겠네요. 좀 더 누워서 쉬세요. 소란 때문에 작업은 중단되었습니다.”
의무관이 구급 물품을 대충 정리하며 이르자, 클로이는 눈만 깜빡거렸다. 마법사 덕분에 산 것 같기는 한데, 진짜 큰일 날 뻔한 상황이었던 게다.
“다른 사람들은요? 제 주위에 사람이 많았어요.”
“다들 무사합니다. 운이 좋았어요.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자신을 걱정해주던 사람들이 혹여나 크게 다쳤더라면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클로이는 손끝을 꼼지락거리더니, 이내 뭔가 떠오른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흐흡!”
“…뭐 하십니까?”
그러고는 침대 받침대를 잡고서 있는 힘껏 들어 올리려는 것 아닌가? 의무관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으나, 클로이는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느라.
“으아아앗!”
“아니, 영애?”
미쳤나? 외상이 없다고 안심하지 말걸 그랬다. 의무관이 놀라서 진정제를 찾으려는 때, 아코렐라가 들이닥쳤다.
“클로이 영애애애! 엥? 뭐 하십니까?”
“아, 아코렐라 대장……!”
“침대는 왜요?”
클로이가 눈물을 글썽이더니,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부작용이 사라졌나 봐요.”
“예에, 전해 들었습니다. 많이 안 다쳐서 다행입니다.”
“어, 어떡하면 좋아요. 하필이면 지금…….”
아코렐라가 작게 한숨 쉬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죽다 살아난 사람치고는 걱정이 참 많다.
“괜찮습니다. 영애께서 원치 않는 이상 폐하께서도 영애를 바리엘로 보내지 않으실 거예요.”
“그게 아니라요!”
“그럼요?”
“제가 일을 못 하면 다들 힘들어지잖아요.”
열댓이 할 일 이상을 클로이 혼자 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작용이 없어졌으니, 다른 인부들에게 부담이 가중되는 건 당연지사.
클로이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그리 이르자, 아코렐라는 의외라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뭐지? 감정의 변화가 인격의 변화로까지 이어진 것인가?
“걱정 마세요. 그만큼 제가 움직이면 되니까. 일단 영애께선 치료부터 잘 받으시고-”
벌컥!
아코렐라가 말을 끝맺기 전, 문이 거칠게 열리며 마법사와 시아오시가 들이닥쳤다. 두 사람 다 급하게 온 것인지 서두른 기색이 역력했다.
“뭐여. 짐 챙겨 왔어? 빠르네?”
“예? 아, 네네. 시아오시 경에게 부탁해서 어떻게 좀 했습니다.”
뭔 소리래? 아코렐라는 시아오시를 돌아봤고, 이내 천천히 입을 벌렸다. 뜨겁고 강렬한 시선이 클로이와 시아오시 사이를 오간 것이다.
아코렐라와 마법사 그리고 의무관은 뒷걸음질 치며 두 사람을 지켜봤다.
“영애, 괜찮습니까?”
“네? 아, 네에…….”
클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미친 듯이 쿵쿵 뛰는 심장. 부작용은 분명히 사라졌는데 마음의 울림은 어찌하여 이전보다 더한 것인가?
몸이 멀어졌으니 감정 또한 옅어졌을 것이라 여겼는데 오산이었나 보다. 무어라 이를 수 없는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 아코렐라 대장.”
클로이가 시아오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중얼거렸다.
“저, 부작용 아직 안 사라졌나 봐요. 아직도 시아오시 경을 보니 가슴이 뜁니다.”
“에? 그래요?”
그녀의 말에 아코렐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작용 중 하나만 사라지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만,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클로이가 음용한 물약이라면 분명 둘 다 사라질 것인데?
아코렐라가 잠시 고민하며 턱을 긁는 사이, 클로이가 시아오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예, 뜁니다! 계속, 심장이! 어, 어떡하지요?”
머리가 펑, 눈앞이 핑 도는 기분이다. 클로이가 당황하여 그리 이르자, 시아오시가 단 한 마디로 대답했다.
“…어찌할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 느끼는 그 감정 그대로 두어도 문제 될 것 없다는 말이다.
고백과 같은 말에, 아코렐라와 마법사 그리고 의무관이 시선을 나누며 ‘왐마야’ 따위의 말들을 중얼거렸다. 뭔지 몰라도 엄청난 상황을 목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에 어김없이 클로이의 코에서는 피가 흘러내렸고, 이내 다시금 침대로 쓰러지며 암흑 속으로 잠겨 들었다.
‘나 죽어어…….’
이번에는 분명, 시아오시를 꿈꿀 것이다. 틀림없이.
* * *
“문제는 없다고?”
“예, 작업이 잠시 지체된 것 외 큰 부상자도 없다 합니다. 여차했다간 큰일이었겠지만, 잘 마무리된 것 같습니다.”
이안은 광산에서 올라온 보고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소란이 있었던 것 같지만, 클로이를 비롯하여 다친 사람이 없다 하니 다행이다.
“참, 그리고 필리아 님 초상화는 어찌할까요?”
낡은 갈색 종이에 필리아의 흉상이 스케치되어 있었다. 그녀를 찾기 위해 버고스 전역으로 내려보냈던 초상화다. 이미 바리엘로 무사 귀환했다고는 하지만, 토올룬을 압박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그녀의 행방을 찾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게 좋았다.
“양은 줄이되, 배부는 멈추지 말라. 토올룬이 보기에 수색을 계속하고 있다 여길 정도면 충분하다.”
“예, 알겠습니다. 벽보로 붙여놓으면 어떤 놈들이 계속 떼 가서 아주 귀찮아 죽겠습니다. 차라리 병사 한 명을 세워두는 게 경제적이겠어요. 화가들 손목 나간다고 어찌나 불평불만이던지.”
“참, 이안 님. 그리고 요즘 좀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소문?”
이안이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내전 당시에는 워낙 치안이 흉흉하여 이런저런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지금은 바리엘군 치하에서 일상을 회복하는 중 아니던가?
“칼라마트를 끼고 흐르는 강이 점점 말라가고 있다 합니다.”
토착민들에게는 ‘버고스의 젖’이라 불리는 강이었다. 가이아 북쪽에서 흘러와 버고스 전체를 관통하는, 말 그대로 나라의 젖줄인 셈이다. 그런데 수심이 점점 얕아진다니.
이안은 지도를 펼쳤다.
“수원지가 어디쯤이지?”
“북쪽 지대에서 더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안의 손끝이 강줄기를 따라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올라갔다. 이윽고 손가락이 멈춘 곳은 토올룬 남부 지방. 이안은 의심스럽다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버고스를 지나 클리포포드까지 닿는 강입니다. 물론 그쪽은 큰 피해 없겠지만요.”
“수심이 얕아지고 있다는 건 객관적인 사실인가?”
“아직 검증된 것은 아닙니다만, 한두 명이 옮기는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주민들 전체가 동의하는 분위기라서요. 토올룬 쪽 문제일까요?”
버고스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충분히 가능성 있다. 한데, 강물을 오염시키는 것도 아니고 제한하는 방식이라니. 무슨 의도와 사정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강이 마르면 생산량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생활 자체가 불가해집니다. 홀린 가문도 이를 인지한 것 같긴 한데, 당장 대책을 세우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못 하는 거겠지. 귀족들을 엮어내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을 것이니. 종이를 가져와라. 폐하께 보고 올릴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토올룬 남단이니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경로에 포함시킬 수 있을 터. 의중을 여쭈마.”
토올룬 중앙에서 벌인 일인지, 아니면 남부의 독단적인 행동인지는 알 수 없다. 애초에 토올룬이 연관되어 있는지도 불확실하지만 말이다.
스윽.
이안이 깃펜을 들어 보고서를 작성하려는 순간이었다. 잉크가 주르륵 흘러내리며 종이가 얼룩으로 번져버렸다.
평소 이안이라면 절대 용납하지 않을 일이다. 마법사도 의외인지 놀라며 손수건을 건넸다.
“괜찮으십니까? 평소 쓰시던 깃펜인데 왜 그러지요? 옷에 튀지는 않으셨고요?”
이안은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이상하게도 깃펜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상하네요. 불길하게.”
“불길은 무슨.”
“왜요, 그런 거 없으십니까? 갑자기 펜 잉크가 번지거나 벽에 걸린 장식물이 떨어지는 일이 생기면, 왠지 사건을 예고하는 것 같잖아요.”
“전혀.”
이안이 단언하자, 무언가 ‘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뒤쪽에 걸려 있던 액자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마법사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고, 이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어, 어라…….”
“왕궁 관리가 미흡하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어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콰앙! 쨍쨍하여 맑았던 날씨가 순식간에 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안은 별다른 반응 없이 초를 찾았지만, 마법사는 그대로 굳어서는 몸을 덜덜 떨어댔다. 초월적인 존재인 만큼, 초월적인 기현상이 두렵다.
“이, 이안 님. 무섭습니다아.”
“나는 그대가 더 무서워. 가서 마저 일 보아.”
타닥타닥!
그때, 다른 마법사가 기별도 없이 급히 달려 들어왔다. 손에는 비에 젖은 서신 한 장이 들려 있었는데, 이안은 그 밑에 찍힌 인장이 클리포포드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이안 님! 급서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기에 호들갑인가.”
“샤티마 수상이 살해되었습니다. 정황상 암살당한 것이 틀림없다고…….”
“…뭐?”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완의 반란군 수장이자, 실세를 잡았다 전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암살이라니?
루스웨나와의 격전을 앞둔 지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자 하늘에서 다시 천둥이 크게 울렸다.
쿠르릉! 콰앙!
“누구에게?”
“클리포포드에서도 조사 중인 듯한데, 지금쯤이면 바리엘에도 연락이 닿았을 것입니다. 정황상 샤티마의 측근인 것 같습니다. 하완에서 정권을 성공적으로 잡았다는 연락이 마지막이었으니 그것밖에는…….”
이안은 책상을 짚은 채 잠시 고민했다. 샤티마의 죽음이 바리엘 동쪽 정세에 어떤 혼란을 가져올 것인지를.
단순한 내부 분열이 아닌, 적이 의도한 것이라면?
이로 인해 이득을 보는 나라는?
‘루스웨나. 그리고…….’
이번 사건으로 클리포포드의 본대 병력이 분산된다면, 토올룬 또한 이득이겠지.
이안은 비에 젖은 서신을 찬찬히 살피다,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한 것보다 토올룬이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리된 이상, 바리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