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39
제639화. 지금 히엘로에서는
검은 머리칼을 단정하게 묶은 여자가 흰색 장갑을 꺼냈다. 시종들은 긴장한 것처럼 자세를 바로 했다. 오전의 마지막 일과, 청소를 점검받는 시간이었다.
집사는 흰색 장갑을 낀 채로 창틀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청소가 덜 되었어.”
“죄송합니다. 바로 다시 하겠습니다.”
“별관이라 비어 있긴 하지만, 그 언제라도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제가 누누이 얘기했지요.”
히엘로 저택의 총괄 집사, 해나였다. 그녀는 시종들을 가볍게 꾸짖은 다음 재청소를 명령했다.
별관은 근 10년 가까이 인기척이 들지 않는 장소였다. 저택의 식구가 별로 없는지라 시종들의 수도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대사막에서 천려 손님이 온다 한들 본관에 좋은 방이 많았다.
끼이익.
해나는 열려 있는 문을 닫으려다, 손잡이를 가만 내려다봤다. 이전 집사의 방. 이안의 부탁으로 열쇠를 땄던 그 방이다. 그 시절을 떠올리니, 왜인지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잘 계시려나.’
이안이 사라졌던 10년 동안, 필리아와 네르사른 그리고 로엘을 모시며 저택을 가꾸었다. 기적적으로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으나, 히엘로령으로 귀향할 기미는 없어 보였다.
마법부 장관이시니 업무가 막중한 건 알고 있다. 워낙 중앙 일이 많아 바쁘기도 하실 테고. 게다가 지금은 버고스 쪽으로 전쟁을 나가셨다지?
“해나 집사님. 오늘 자 서신입니다.”
“언제나 고마워요.”
집배원이 가볍게 인사하며 돌아나갔고, 해나는 서신을 하나씩 확인하며 걸음 했다. 대부분 부재중인 주인과 필리아 앞으로 온 인사치레 편지였다.
해나는 자신이 읽어야 할 것과 따로 보관할 것을 나누며 본관으로 들어섰다.
“집사님. 네르사른 님이 찾으십니다.”
해나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필리아와 로엘을 중앙에 두고 온 이후, 네르사른의 심기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네르사른도 체념한 듯싶었으나, 요 며칠 전부터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똑똑.
“네르사른 님. 해나입니다.”
“들어오게.”
“찾으셨다고요?”
네르사른은 창가에 앉아 구룻잎을 물고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것은 지금까지 로엘과 주고받았던 서신들. 그는 해나가 나타나자마자 ‘다시’ 그 얘기를 꺼냈다.
“필리아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다.”
필리아의 답신을 여러 번 요청했지만, 계속해서 무시된 점. 로엘 또한 별다른 언급 없이 잘 있다는 말만 반복해서 이르는 점 등등. 무언가 낌새가 이상했다. 황제와 이안이 버고스에 가 있는 지금, 필리아와 로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피어난 것이다.
해나는 서신을 곱게 접어 치우며 대답했다.
“안 됩니다.”
“…해나.”
“주인이신 이안 님은 10년 넘게 히엘로로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그간 필리아 님과 네르사른 님이 대신하여 영지를 살피셨지요. 그런데 필리아 님도 없는 지금, 네르사른 님까지 중앙으로 떠나시면 위험합니다. 요즘 루스웨나와 하완의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계시잖아요.”
네르사른은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다른 때도 아니고, 지금은 아니 됩니다. 이안 님의 아버지라면 필히 자리를 지키셔야 해요. 그리고 다 함께 영지로 올라가신 게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잠시면 된다.”
“마법사의 도움 없이는 오가는 데만 한 달입니다. 이 건은 제 남편에게도 의논하지 말아 주세요. 서로가 곤란해지니까요.”
해나가 톡 쏘며 덧붙였다. 그녀의 남편은 동갑내기 천려족 사내였다. 해나와 네르사른과의 관계를 따지자면 사촌의 조카 부인 정도 될 터.
사실 바리엘 관점에서는 남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부족 전체가 가족이라는 천려들 입장에서는 해나 또한 천려인이나 다름없었다.
“혼자라면 상관없겠지?”
“아니요! 이안 님과 카칸 님이 히엘로 영지 전권을 네르사른 님께 위임하지 않았습니까. 혹여 문제가 생기면 저 혼자 감당할 수 없습니다. 권한도 없고요. 며칠 전에 마법부로 전서구를 보내셨다고 들었는데, 답신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리세요.”
“해나!”
“왜요, 네르사른 님!”
네르사른이 꼼짝 못 하는 세 여인. 필리아와 로엘 그리고 ‘저’ 해나다. 예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나이 먹고 나서는 깐깐한 게 도를 지나쳤다. 두 사람이 막 언성을 높이려는 순간,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똑똑.
“해나 집사님. 리엔 메렐로프 부인께서 급히 방문하셨습니다.”
“뭐? 부인께서?”
메렐로프는 인접한 영지지만, 그 실권은 히엘로가 쥐고 있었다. 메렐로프 부인이 백작을 죽이고 자유를 찾은 대가로 권한 일부를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리엔 메렐로프 또한 사실상 영지 운영에 관심이 없는지라, 그들은 이웃 관계로 교류하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무슨 일이라 하시던가?”
“모르겠습니다. 너무 급해 보이셔서…….”
“서둘러 모셔.”
“예, 알겠습니다.”
해나와 네르사른이 시선을 나누었다. 메렐로프는 하완과 접경한 영지다. 다른 것도 아니고 부인이 직접 움직일 정도라면 그쪽과 관련한 정보가 들어온 것 같은데…….
“부인, 오셨습니까?”
“해나, 급히 와서 미안하구나. 네르사른 님은, 아. 함께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여전히 찰랑거리는 백금발과 아름다운 이목구비. 10년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다.
리엔 메렐로프는 어깨에 걸친 코트를 내리며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만큼 급하다는 뜻이다.
“하완의 정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예? 하완이요? 며칠 전만 하더라도 잘 수습되고 있다 하지 않았던가요?”
정치적으로 몰락했던 수상 샤티마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나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으나, 그들은 신속히 정권을 탈환하여 뒷수습에 열의를 보였다.
샤티마의 뒤에 왕가의 방계가 있다는 소문 때문일까, 하완 전체가 혼란스러웠지만 오히려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듯한 분위기였다. 고작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 아직 공식적인 것은 아니고, 사실 확실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메렐로프로 오는 하완의 상단에게서 전해 들은 것인데, 그들이 하완을 떠날 때 이상한 소문을 들었답니다.”
“무슨 소문이요?”
“샤티마 수상이 죽었다는 소문이요.”
“예?!”
반란군의 수장이 죽었다. 그것도 새로운 시대의 깃발을 거의 다 올려놓고서.
이렇게 되면 하완의 정세는 정말 한 치 앞도 모를 정도로 혼돈에 빠질 것이다. 반란군 안에서도 분열이 있을 것이고, 기존 세력들은 이를 기회로 여겨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 들 터. 꺼져가던 불씨가 더욱 큰 불길로 타오르는 형국이다.
“화, 확실한 것입니까?”
“모르겠어요. 그저 소문이라고는 덧붙이는데, 상인들은 기정사실로 여기는 듯했습니다. 당분간은 하완으로 안 돌아갈 것이라면서 메렐로프에 장기 숙박을 요청했거든요.”
“잠시만요. 샤티마 수상은 친바리엘파, 혹여 수상 자리에 바리엘에 적대적인 자가 오른다면…….”
날을 세우고 있던 루스웨나와 합심하여 바리엘 동쪽을 압박하고자 들것이다. 그리고 그 압박은 온전히 히엘로와 메렐로프가 감당해야 할 몫이겠지.
리엔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자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샤티마 수상의 죽음이 사실이라면 황궁에서 확인서를 보내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국경 경계를 강화하고 사병을 더 모집해야 합니다. 메렐로프와 히엘로, 둘 다요.”
버고스는 꺾였다. 루스웨나 입장에서는 동맹국이었던 나라가 패전한 것이다. 마침 황제와 마법부 장관이 거기에 주둔하고 있다 하니, 그들은 지금과 같은 적기는 없을 것이라 여길 테다. 버고스 다음은 분명히 루스웨나일 것이라고, 모두가 짐작하고 있으니까.
“네르사른 님.”
해나가 그의 이름을 보란 듯이 불렀다. 이런 시기에 그가 히엘로를 비운다는 건 절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오히려 대사막에 있는 천려를 모두 불러 모아도 모자랄 판이거늘.
네르사른이 한숨 쉬자, 상황을 모르는 리엔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 있나요?”
“…아닙니다. 개인적인 사정이라. 그럼 일단, 메렐로프는 하완에서 넘어오는 자들을 조사하여 정보 수집을 계속해주시오. 샤티마 수상을 누가 죽였는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에 따라 하완의 미래가 정해질 것이니.”
“알겠습니다. 들리는 족족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요. 히엘로도 혹여 황궁에서 정보가 온다면 알려주십시오. 이안 경께는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그 물음에 리엔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마법사인 그가 변경을 지킨다면 참으로 든든할 것인데 말이다. 공사다망한 것은 알겠다만, 10년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원.
“예. 없습니다. 버고스에 가 계시니, 닿기 어렵습니다.”
네르사른이 그리 대답하다 홀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 한 마리가 날아든 것이다. 해나가 창문을 열어주었으나, 놈은 들어올 생각 없이 계속해서 깃털만 다듬었다. 평소와 다른 행동에, 네르사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네르사른 님. 이놈, 뱐 아닙니까? 왜 이러지요?”
“글쎄. 뭔가를 본 것 같은데.”
네르사른은 웃옷을 걸쳤다. 뱐이 따라오라는 듯 제자리에서 두어 바퀴 돌더니 한 방향으로 곧게 날아갔다.
“잠시 나갔다 오겠다. 리엔 부인, 실례하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대신 오래는 못 기다려요. 메렐로프를 오래 비울 수는 없으니까요.”
네르사른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뛰어갔다. 그와 동시에 손가락 틈으로 휘파람을 불자, 천려족이 말 대신 사용하는 쿠실레가 멀리서부터 달려왔다.
휘이익!
타닥타닥!
“뭔가 느낌이 옵니다.”
해나는 멀리 사라지는 네르사른 뒷모습을 지켜보다 중얼거렸다.
“평화가 깨지는 느낌이요. 너무 불안합니다.”
그때와 같다. 10년 전, 중앙군의 습격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던 그때 말이다. 해나가 이마를 감싸며 한숨 쉬자, 리엔이 그녀를 다독여주었다.
“평화는 깨지지 않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이러고 있으니까.”
그러는 리엔의 손도 달달 떨리고 있었지만.
해나는 설핏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고, 이내 감정을 추스르듯 끄덕였다.
“앉으세요, 부인. 네르사른 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도록 따뜻한 차를 내오겠습니다. 홍차에 우유, 맞지요?”
“고맙네.”
해나의 집사 교육을 담당하던 것이 메렐로프 집사였다. 그가 병환으로 죽고 난 뒤 공석이 생기자, 이번에는 해나가 담당하여 메렐로프 집사를 교육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완벽한 이웃이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저 일 좀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편한 대로.”
해나가 인사하며 잠시 자리를 비웠고, 리엔은 방 안을 둘러보다 테이블 위에 놓인 한 서신을 발견했다. 중앙에서 내려온 것들이다.
훔쳐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지만, 저리 떡하니 펼쳐져 있는 걸 어찌 그냥 외면하나? 리엔은 멀리서 글자를 훑어보다,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아버지. 어제는 로만드로 님이 오라버니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아기아르라는 도시에 당도했다고 해요. 거기서 뜻밖의 조력자를 만났다고 하더군요. 오래전 토올룬으로 떠났던 시종과 어릴 적 인연이 있는 영애라 합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다행입니다. 어머니는 잘 계세요. 저도 잘 있고요. 비비안나 부인이 참으로 친절하십니다. 비비는 조금 귀찮지만, 마음이 따뜻한 아이고요. 그럼 히엘로 소식, 또 전해주십시오. 보고 싶습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