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46
제646화. 궤멸
이안의 기억과는 너무도 다른 히엘로였다.
몰린 경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마차를 타고 내달렸던 들판, 뱃놀이를 즐길 수 있던 호수, 지붕에 널려 있던 마른 건초, 저택 아래로 길게 늘어진 돌담…. 그 어느 것도 온전한 게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참혹한 파멸.
“씨발.”
베릭의 동공도 크게 흔들렸다.
중앙군과 브라츠가 격돌했을 때도 이만한 피해는 아니었다. 잔해가 온통 거리로 쏟아져 길이라는 게 보이지 않을 정도다. 혹여 살아 있는 자가 있을까? 집중하여 곳곳을 살펴보았으나, 움직임이라고는 타오르는 불길뿐.
“이안아, 이거, 이거 어떻게…….”
이안은 대답 대신 저택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찬가지로 반파되어 거의 무너진 상태다.
이안과 베릭 그리고 상단 직원은 저택 마당으로 착지하여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여 인기척이라는 게 있을까 싶어서.
“해나-! 네르사른-!”
베릭이 입가에 손을 모아 소리쳤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안은 잔해에 깔려 뭉개진 누군가의 팔과 다리를 가만 내려다봤다.
“아무도 없어?! 제발 대답 좀 해봐! 나 베릭임! 여기 이안이도 같이 왔어!”
직원은 그저 놀란 눈만 데굴데굴 굴려대며 이안의 옆을 따라다녔다. 어떤 위험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 살고자 한다면 마법사 옆을 지키고 있는 게 현명했다.
“해나! 누구라도 좋으니까, 살아 있으면 대답해! 구해줄게!”
투욱.
그때, 아주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이안과 베릭이 동시에 반응하여 뒤를 돌았고, 직원은 그저 고개만 휙휙 돌리며 움찔거렸다.
이안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곧장 걸어갔다. 밑동이 잘려 쓰러진 나무가 잔디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뭔가를 알아챈 이안이 베릭에게 손짓했다.
“…베릭. 이 나무 치워.”
“나무? 아아, 여기 거기네!”
“서둘러라.”
이전 변경백이었던 데르가의 아내와 아들, 메리와 첼이 숨어 있었던 비밀 공간이 위치한 지점이다. 쓰러진 나무가 입구를 막고 있는 터라, 안에서 열지 못하는 듯 보였다.
베릭이 나무를 가볍게 들어 올리자, 잔디밭으로 위장해있던 입구가 슬쩍 열렸다.
“아.”
빼꼼. 아래에서 고개를 들이민 해나가 제일 먼저 본 것은 이안의 발치였다. 천천히 올라가는 시선. 곧 해나는 잔불을 받아 더욱 짙어진 금발과 녹안을 마주했다.
“주, 주인님.”
이안 히엘로. 그는 마법부 장관이기 전에 히엘로의 영주였고, 나아가 자신의 주인이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자, 해나는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멍하니 그 손을 잡고 올라왔다.
“오랜만이구나, 해나. 살아서 다행이다.”
“이, 이안 님은-”
살아서 다행이라고는 하지만, 여기저기 긁히고 그을려 해나의 꼴은 엉망이었다. 해나는 마땅한 인사말을 찾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이안 님은 놀라울 정도로 예전과 같으시네요.”
10년이 훌쩍 넘은 세월이다. 그사이 해나는 숙녀가 다 되었건만, 이안은 마지막 기억 그때와 똑같다.
필리아, 네르사른 그리고 로엘이 이안의 상태에 대해 언질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해나는 주인의 외형이 그대로일 것이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키, 키는 더 크셨을 줄 알았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식사 좀 덜 뺏어 먹을걸… 그랬습니다.”
“해나, 난 안 보여?”
“헉. 베릭. 너는 어찌 그리 컸어? 산짐승이 다 되었구나.”
베릭과 나란히 있으니 그 차이가 더욱 크다.
어리둥절한 해나의 뒤로, 낯선 자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이밀었다.
“지, 집사님. 괜찮습니까?”
“다들 올라오시오! 주인님과 베릭이 돌아왔소!”
“예? 주인님이라 하면… 이안 자작님 말씀입니까?”
“다들 밖으로 나가자! 이제 안전하다!”
“아이들을 먼저 올립시다. 위에서 잡아주십시오!”
“알겠소! 베릭, 여기 좀 도와주라!”
해나는 반가운 인사를 뒤로하고, 함께 숨어 있던 사람들이 올라올 수 있도록 도왔다. 저택 사용인과 인근에 살던 영지민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이들이었다.
“어, 엄마랑 아빠는요?”
“쉬잇. 울지 마. 이제 찾아보자. 근처에 계실 거야.”
아이들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서는 두려운 눈빛으로 황폐해진 히엘로를 둘러봤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런 곳에서 부모님이 살아 있을 리 없을 거라고.
“어떻게 된 거지, 해나.”
이안은 리엔 부인이 보낸 서신을 보여주며 물었다.
“아버지가 영지를 나갔다고 적혀 있던데. 중앙으로 출발하신 것인가?”
“아…….”
짤막한 서신에는 클라크에 대한 물음과 네르사른의 상황이 적혀 있었다. 아무래도 기다리기 힘들어 메렐로프로 돌아가자마자 서신을 보낸 듯싶다. 그것이 어찌하여 몇 시간 만에 이안에게 닿았는지는 의문이지만.
“필리아 님과 연락이 닿지 않아 네르사른 님이 중앙으로 올라가려 했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니에요. 얼마 전, 리엔 부인이 찾아와서는 상단들이 대거 피난해 왔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정세가 불안하다고요.”
이어서 해나는 네르사른이 매를 뒤따라 나선 것, 매 혼자 돌아온 것, 이에 자신의 남편 무이가 병사들과 함께 사막 쪽으로 정찰 나간 것을 침착하게 설명했다.
“무이는 금방 돌아왔어요. 그러고 나서는 사람들에게 모두 피하라고, 마법사가 오고 있다고…….”
“마법사?”
“카칸께서… 전사하셨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습니다.”
“……!”
카칸의 죽음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바 또한 놀라웠다. 천려가 기습을 당했다는 것 아닌가? 해나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주저앉았다.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말. 하아…. 아무튼 무이의 전언에 히엘로의 모든 병사들이 결집해 이드갈로 무장했습니다. 저택을 사수하기 위해서요.”
해나는 저택으로 몰려드는 아이들을 보호했고, 영지민들도 하나둘씩 무기를 들고 나섰다. 영지를 지키는 건 병사들이었지만, 집을 지키는 건 본인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실수였습니다.”
해나가 가까이 선 아이를 깊게 끌어안으며 한숨 쉬었다. 자책과 한탄 그리고 슬픔 등이 잔뜩 묻은 숨이었다.
“맞서면 안 됐어요.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지하 공간에 대피시키고, 중앙 쪽으로 도망쳤어야 했어요.”
마법사 한 명.
아무리 신에 가까운 자들이라 하지만 고작 한 명이었던 데다, 그들에게는 이드갈 무기가 있었다. 맞설 수 있을 거라 자만했던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저는 평생 바다를 본 적 없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보이는 모든 곳에 불길이 치솟고, 휘몰아쳤어요. 세상이 흔들리는데…….”
저택이 위치한 언덕 위에서 모든 걸 지켜보았다. 사람의 피부가 어떻게 녹아내리는지, 단단했던 건물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두려워 절규하는 자의 비명이 얼마나 스산한지를 말이다.
해나가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이었다.
타앗!
살아남은 자들 중 하나가 갑자기 이안의 팔을 붙들었다. 중년 사내였다. 눈물 자국이 시커멓게 난.
“…자, 자작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보시게! 무엄하네.”
“대체 왜, 왜 마법사가 우리를 공격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이안 님은 마법사시니까 잘 아시겠지요. 왜, 대체 왜! 내 아이들이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미친 새끼가, 이안이한테 왜 그래?”
해나와 베릭이 사내를 만류했지만, 자식 잃은 부모의 눈엔 보이는 게 없었다.
“지난 10년간 영지에는 코빼기도 안 보여놓고, 이제 오시면 어찌합니까? 중앙에서 일을 보셨다면 이런 일이 없도록 하셨어야지요! 주인 된 자가 이리 자리를 비우니 아랫것들만 죽어 나가는 것 아닙니까?”
이안이 히엘로에 남아 있었더라면 막아낼 수 있었을 거라고, 그는 그리 울부짖었다. 베릭이 한마디 하려 했으나, 이안은 손짓으로 그를 저지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움의 마지막 말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시간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히엘로는 영주의 공백이라는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해나와 천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통치되고는 있었다만, 그건 평화를 앞세운 일종의 속임수지 않았던가.
“크흐윽…….”
사내는 엎드린 채 울부짖었고, 이안은 살아남은 자들의 시선을 읽어냈다. 겉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대부분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때, 해나가 굳은 얼굴로 다가와 이안 앞을 가로막았다.
“아닙니다. 이안 님. 지금 다들 정신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평화로울 때는 이안의 부재가 주는 이점이 있었다. 세금이 낮았고, 영주의 폭정 따위 먼 나라 이야기이었으며, 누구나 노력한 만큼 결실을 얻는 사회라는 걸 몸으로 느끼며 살았으니까.
이안은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질문뿐.
“…마법사는 어디 있지? 본 자가 있나?”
“열기가 저택으로 들이닥치자마자 저도 아래로 내려가 입구를 굳게 닫았습니다. 죽었는지 아니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는지… 어찌 되었는지는 알 방도가 없습니다. 어쩌면 메렐로프로 향했을지도…….”
“근데 이안아. 메렐로프는 우리에 비하면 멀쩡했잖아. 물론 사람들도 없긴 했지만. 그쪽으로는 아예 안 간 거 아닐까?”
메렐로프는 히엘로 사태를 전해 듣고서 무사히 대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례로, 그림을 통해 움직이는 발리주아드도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았던가?
옆에서 듣고 있던 상단 직원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 그림 속으로 그림을 들고 가면 구축한 경로를 폐기하는 것이라 최대한 지양했는데, 상황이 급하면 어쩔 수 없지요.”
마법사가 메렐로프 쪽으로 넘어간 게 아니라면, 중앙 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것일까?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마법사는 분명 루스웨나 출신일 터. 그렇다면 같은 편인 하완을 위해서라도 메렐로프를 무력화시키는 작업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천려를 상대하고 와서 마력이 부족했나? 그랬더라면 히엘로를 절멸시켰으니 여기서 회복되길 기다리는 게 자연스러운 판단이다. 내가 오는 건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니.’
메렐로프도, 중앙도, 휴식도, 전부 아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루스웨나 마법사는 되돌아갔음이 분명했다.
어쩌면 히엘로 병사들의 이드갈 공격에 맞아 회복을 위해 돌아간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상당한 깊이의 마력을 지닌 자다.’
이안은 회중시계를 딸깍거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서신을 받고 여기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히엘로 전체를 그 짧은 시간 동안 파멸시킬 정도라면, 어지간한 마법사가 아니다.
‘혹은 증폭제를 사용했거나…….’
…금기의 마법을 부리는 자일 수도.
이안은 시계를 품에 넣으며 사람들을 돌아봤다.
“그대들은 히엘로를 떠나 가까운 영지로 몸을 피하라. 어디든 좋다. 인장이 찍힌 증서를 내어줄 것이니, 그쪽 영주에게 사정을 말하도록. 그 과정에서 메렐로프와 마주한다면, 그때 생존자를 수색하는 게 최선이다. 아버지도, 해나 그대의 남편도, 당장은 찾지 말고 몸부터 피해.”
“…그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히엘로는 당장 재건이 불가능하다는 뜻이지.”
훗날 천천히 공을 들인다고 하더라도, 시일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다. 그만큼 지금의 히엘로는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험했다.
“이는 루스웨나에서 닦아놓은 길이다. 언제고 그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면, 그러면 저희는 어찌합니까?”
“살아만 있으면 된다.”
이안은 마법부 장관 배지를 떼어서 해나에게 건네주었다.
“살아만 있으면 언제고 다시 보아. 나는 그걸 알고 있어. 그러니 그대들은 끝까지 살아남아라.”
“이안 님.”
“…죽은 자의 몫은 나의 것이다.”
히엘로에서 생명을 앗아간 자에게서 대가를 치르게 하겠노라. 이안은 모두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울부짖었던 중년 사내의 말처럼, 여기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은 자신이었다. 히엘로의 저택, 들, 나무, 사람, 그리고 미래.
“베릭. 쫓아간다.”
“어디로?”
이안은 로브를 단단히 여미며 저택 밖으로 걸음 했다.
“루스웨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