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78
제678화. 엘바사의 최후
아오오-
클리포포드의 병사들은 끝없는 돌림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루스웨나의 풍경은 클리포포드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탁 트인 갈대숲과 유려한 곡선의 언덕들…. 노아 왕자는 망원경으로 앞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거의 다 왔군.”
“예, 왕자님. 한 시간 내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메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동의했다.
클리포포드는 수도 프로드호나를 균열 사태로 잃은 후, 동쪽으로 임시 수도를 마련하여 근 10년 동안이나 평화로이 지내왔다.
역사 깊은 땅을 균열에 빼앗긴 것은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지만, 또 모든 일에 있어서 완전한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루스웨나 국경과 가까워진 탓에 쉬이 움직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으니.
“바리엘에서 전언이 계속 오는지 확인해, 메이.”
“물론입니다. 혹 놓치는 것 없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바리엘을 중심으로 동남쪽의 정세가 심히 어지러웠다. 하완국이 반란에 반란을 거듭하였고, 이는 바리엘이 우려했던 것처럼 루스웨나 동맹으로 이어졌다. 맨 처음, 진 황제가 버고스 원정을 나설 때 당부했던 말이 실현된 것이다.
“루스웨나와 하완이 바리엘 동쪽을 압박하려 든다면, 클리포포드가 나설 것.”
루스웨나의 서쪽, 즉 클리포포드와 접경한 지역은 그들의 수도 엘바사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주둔 병력이 허술했다. 아마 쇠락해가는 클리포포드보다는, 수도와 가까이 있는 바리엘 쪽을 더 신경 쓰겠다는 판단일 것이다. 그 덕분에 노아 왕자는 수월하게 루스웨나 땅을 밟을 수 있었지만.
“가자!”
히이잉!
그들이 거점으로 삼을 지점은 루스웨나 제일 서쪽 끝에 있는 소도시. 클리포포드는 미리 병사들을 보내 살고자 하는 주민들은 항복하거나 대피하라는 전언을 날렸고, 그럼에도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칠 자들은 기꺼이 숨을 거두어주었다.
아오오-
클리포포드의 병사들은 느긋하고 여유로운 편이지만, 검을 휘두를 땐 우직하게 행하는 자들이다. 노아 왕자의 단호한 명령에 병사들은 포도밭에서 한목소리로 노래 부르며 달려들었고, 손쉽게 소도시의 성문을 개방할 수 있었다.
“영주는?”
“오래전부터 영주 성이 비어 있었다 합니다. 피신했거나 달아난 듯합니다. 그간 임시로 뽑힌 시장이 대신하여 돌보았던 것 같은데, 자세한 것은 더 확인해 보겠습니다.”
“의아하군. 아무리 서쪽 외곽이라고 하나 왕의 직할령도 아니고, 영주가 없다니.”
노아는 낡고 비루한 성을 둘러보다가 한 그림에 시선을 두었다. 누군가의 자화상이었는데, 방금 눈동자가 살짝 움직인 것 같다.
“음?”
노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림을 노려보자, 메이가 그를 불렀다.
“왕자님! 그림 구경하실 때가 아닙니다!”
“아아, 그래. 곧 가지.”
“선발대를 수도로 올려보내 볼 예정인데요. 이쪽으로 와서 확인을 좀…….”
두 사람이 멀어지자, 도르륵, 멈춰 있던 그림 속 눈동자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여기도 피난 오긴 글렀군.’
그림 속 사내는 그리 생각하며 한숨 쉬었다.
그는 엘바사에서 피난 온 루스웨나의 관료. 성 곳곳에 클리포포드 병사들이 돌아다니는 걸 확인한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여기나 저기나,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다.
* * *
“그래도 서쪽에는 마법사가 없습니다. 그쪽으로 피신하시어 차라리 클리포포드 쪽을 보시는 것이-”
“아니지. 우리를 보시오! 저쪽에 마법사가 없다 한들 제대로 싸울 수나 있겠소? 차라리 드래곤 한 마리라도 데리고 갈 수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넘어갈 수 있는 수도 정해져 있지 않소?”
“뭐 어쩌자는 말씀입니까?”
“차라리 수가 적더라도 병사들이 있고, ‘사냥꾼’들과 연락 가능한 왕궁에서 버티는 게 옳다 봅니다. 아직 드래곤과 흑갑옷 기사들이 건재합니다. 지금이라도 잘 수습해서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지금 마법사 놈들이 왕궁 바로 앞까지 쳐들어왔는데! 안 됩니다, 전하. 차라리 서쪽으로 넘어가시어 돌파구를 찾으셔야 합니다.”
“토올룬에서 다시 마법사를 보내줄지도 모르지요. 버티셔야 합니다. 왕이 왕궁을 버리는 순간, 정말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전하!”
“전하! 서두르십시오! 한시가 급합니다!”
“전하!”
“다들 좀-!”
입들 좀 닥치시오! 엘더트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버럭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쿠구궁! 쿵!
지금껏 느껴졌던 진동과는 차원이 다른 흔들림으로 왕궁 전체가 휘청였다. 관료들은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고, 엘더트 또한 균형을 잡기 위해 팔을 휘저었다.
“으으!”
보다 못한 신하 한 명이 엘더트를 뒤로하고 먼저 그림 속으로 뛰어들었다. 황당함도 잠시, 엘더트는 그림 끝부분이 피로 물드는 것을 확인하고는 뒷걸음질 쳤다.
“이-!”
미친것들! 그는 계단 쪽을 향해 발걸음 했다. 다시 올라가 드래곤을 찾을 생각이었다. 아직 활은 멀쩡하고 화살도 넉넉하다면 넉넉한 편이었으니 쫓아오는 마법사들을 따돌릴 수만 있다면…….
콰직!
거대한 유리 돔으로 만들어진 메인 홀의 천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엘더트가 올려다보자, 기다렸다는 듯 산산조각 나며 펑 터졌다.
채애앵!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유리 조각들. 마치 한낮에 내리는 별처럼 아름다웠다. 상황은 전혀 아름다운 상황이 아니었지만.
엘더트는 황급히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그 틈으로 보이는 것은, 뻥 뚫린 천장 위에 떠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마법사들.
마치 장난감 상자에 갇힌 기분이었다. 거센 바람이 그들의 머리칼과 로브를 흔들었지만, 단단한 시선만큼은 굳건했다. 그중 한 마법사가 작게 중얼거렸다.
“찾았습니다. 엘더트.”
속삭임에 가까운 말소리임에도 크게 들리는 건, 건물의 구조 탓일까? 아니면 온 감각이 예민해진 엘더트, 그만의 착각일까? 엘더트는 반사적으로 활을 꺼내 들어 천장 쪽을 겨누었다.
피잉-!
촤아아악!
궤적은 정확했으나, 한낱 발악일 뿐이다. 마법사들의 보호막에 가로막혀 어떠한 흠집도 내지 못했다. 속절없이 떨어져 부러지는 화살. 엘더트는 저것이 자신의 모습인 것만 같아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으, 으아아앗!”
“전하! 전하를 보호해라!”
“마법사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아, 또 붙었네. 정리 좀 제대로 하라 했지?”
바깥에서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들려왔다. 장벽 근처의 마법사들을 어찌 따돌리고 왕궁 가까이 붙은 흑갑옷 기사들이다. 바람이 유독 거셌던 것은 드래곤의 날갯짓 탓이었나 보다.
엘더트는 마법사들을 올려다보는 채로 뒷걸음질 쳐서 복도로 들어섰다.
타닥타닥!
미로와 같은 궁이다. 제아무리 마법사라 한들 쉬이 파악하지는…….
콰아아앙! 퍼엉!
길게 이어진 복도, 엘더트 앞쪽으로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창을 통해 들이닥친 마법사들의 공격 마법이 벽 한 면을 완전히 밀어버린 것이다.
기둥이 무너지고, 내부였던 곳이 한순간에 바깥과 이어졌다.
“계속 그렇게 도망쳐라. 그래야 우리가 이 개 같은 왕궁을 죄다 부술 수 있으니까.”
엘더트는 몸을 돌려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방, 그리고 다시 그 안의 방…….
벌컥! 타다다닥!
발 닿는 대로 뛸 때마다 바깥에서 저를 추적하는 마법사들의 공격이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수백 년, 아니 그 이상 이어져 온 역사의 산물이 계속해서 파괴되었다. 천장은 곧 무너질 것처럼 비틀렸고, 왕궁의 기둥 또한 크게 기울었다.
‘토올룬!’
이제는 방법이 없다. 루스웨나 서쪽으로 가지 못한다면, ‘사냥꾼’들이 토올룬으로 갈 때 썼던 그림 통로를 이용하는 수밖에.
엘더트는 나선형 계단을 미친 듯이 올라갔다.
타앗!
계단 옆에 난 창문으로 그림자가 계속 나타났다 사라졌다. 바깥에서 엘더트를 지켜보는 마법사들의 기척이다.
그는 비틀거리며 겨우 위층에 당도했고, 거친 숨을 헐떡이며 곧장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벌컥!
“……!”
그런 그가 마주한 것은-
“생각보다 늦었군.”
먼저 당도하여 집무실을 살피고 있던 이안 히엘로.
이안은 책상에 걸터앉아 문서를 천천히 살피고 있었다. 루스웨나 왕은 무엇을 위하여 인장을 찍었는지, 그리고 혹여 그가 모르는 모종의 일이 있지는 않은지 등등, 마치 자신의 집무실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엘더트는 말문이 턱 하고 막힌 채 이안을 쳐다봤다.
“엘더트. 그대는 에리포니와 상당히 닮았어.”
타악.
이안은 읽던 책을 소리 나게 덮으며 중얼거렸다. 이는 청록색의 긴 머리칼과 큰 키, 그리고 이목구비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었다.
“선을 모르지.”
왕이라는 이름에 갇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선을 보지 못한다는 점. 그 무엇보다 에리포니를 닮은 부분이었다.
“10년이나 지난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대는 기억해야지. 황궁에서, 죽은 상관의 시체를 직접 짊어지고 도망치듯 귀국하지 않았던가? 바리엘이 그어놓은 선을 밟으면 어떻게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안이 차게 웃었다.
“모두 나의 착각이었다. 그대의 오만을 너무 과소평가했어.”
“닥쳐라!”
엘더트가 활시위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은빛 시위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팽팽해졌다.
아주 가까운 거리다. 이안의 흰 목이 엘더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운이 좋다면, 혹여 신께서 운명의 장난을 좋아하신다면, 저 흰 목선을 따라 피가 흐르도록 할 수도 있으리라.
“히엘로는 나의 영지다.”
“…….”
“내 이름 아래 살아가던 자들이었고, 내 기억 속에서 영원할 자들이었어. 특히 그대가 보낸 마법사로 인하여 죽음을 맞이한 나의 아버지는-”
“아아. 그 천한 짐승 족속을 아비라 부르는 것인가? 하하!”
엘더트가 이안의 말을 잘라먹으며 소리쳤다. 어색한 비웃음, 몸이 덜덜 떨리는 게 훤히 보이는데도, 입만 살았구나.
“…그들은 대사막의 별이자, 진정한 전사였으며, 의(義)를 아는 자들이었다. 제국의 가장 낮은 자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릴 줄 아는, 호방한 자들이었어.”
“그래봤자 짐승족이다! 부정할 걸 부정해!”
“그리고 나의 어머니가 선택한 사랑이기도 했지.”
꽈아악!
활시위를 당긴 엘더트의 손이 크게 떨려왔다. 지금의 긴장감은 일종의 절벽이었다. 이걸 놓으면, 이안 히엘로를 공격하면, 그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되리라.
그 끝이 죽음일지 아니면 다른 길로 통하는 기회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기로에 선 것은 분명했다.
“엘더트.”
이안은 자못 가여운 투로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너를 어찌 죽여줄까.”
“……!”
“나의 아버지가 그리되었던 것처럼 뜬눈으로 허리를 잘라 줄까. 그리하여 루스웨나의 모든 백성들이, 어리석은 네 선택을 영원토록 기리게 해줄까. 그것도 아니라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묻어 조국을 버리고 도망간 왕이라 기록되게 해줄까.”
“이, 이-!”
“너무도 많은 선택지가 내게 주어졌어. 그중 무엇이 너를 가장 끔찍하게 할지, 나는 차마 고를 수가 없구나.”
“닥쳐라!”
엘더트가 와락 소리치며 활시위를 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티잉!
어느새 엘더트의 뒤로 다가온 헤일이 그의 활시위를 가볍게 끊어냈다. 은빛 시위가 거칠게 튕기며 엘더트의 뺨을 갈랐고, 그는 고통에 절규하며 몸을 휘청거렸다.
찰나다. 이안은 재빠르게 엘더트의 목을 붙잡고서 벽에 밀쳤다.
콰앙!
반쯤 쓰러진 엘더트는 급히 자세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온몸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마력 탓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이런 작은 어린아이에게, 내가…….
지이잉, 지잉!
이안의 금빛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목을 틀어쥔 손에는 계속해서 힘이 들어갔으며, 엘더트의 목과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안은 죽음으로 추락하는 루스웨나의 왕을 두 눈에 각인하며, 작게 속삭였다.
“에리포니에게 전하라. 너희의 세상은 무너졌노라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