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86
제686화. 혼자 있지 마세요
“이안 님. 이쪽입니다.”
“마법사들에게 전해라. 여독을 잠시 풀고, 정리되는 대로 업무에 복귀하여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특히 다르시 부인에 대한 것은 폐하와 관료들에게 내가 직접 전할 것이니 상세히 살필 것이다.”
“예, 이안 님. 분명히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끼이익.
냉기로 가득했던 칼라마트 성 내부의 공기가 따스하게 변해 있었다. 황제를 모시는 자들의 노력인가. 아니면 주인 잃은 성이 오랜만에 만난 사람의 온기를 기꺼워하는 것인가.
이안은 겉옷 단추만 대충 풀고서 소파에 몸을 뉘었다.
‘하아.’
눈을 감으면 기억의 파편들이 문득문득 가시를 세우는 듯했다. 그 끝에는 네르사른이 있고, 해나와 주민들이 있었으며, 자아를 잃고 자멸한 금기의 마법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더 깊은 곳에는-
‘어머니가 아시면…….’
필리아가 있다.
그녀가 네르사른과 함께 있을 적 얼마나 환히 웃었는지를, 이안은 선명히 기억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두려웠다. 자신에게 ‘연인을 잃은 슬픔’이란 미지의 감정이었으니. 그녀가 감당해 내야 할 감정의 깊이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되지 않았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긴다는 표현이면, 충분할까?
필리아에게 있어 이안이 과거, 즉 그녀를 붙들어 준 돌멩이와 같은 존재였다면, 네르사른은 현재와 미래의 행복일 것이다.
쪼륵.
이안은 탁자 위에 놓인 술을 따라 한 입 머금었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필리아 걱정을 흘려보내기 위해서였다.
지금 그는 진과 함께 전쟁 중이었고, 지하신의 근거지인 토올룬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어머니만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채 지옥을 헤매고 있을 터.
‘정신 차리자.’
이안이 그리 생각하며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을 때였다.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에리카 사태로 보아, 분명히 하완에는 토올룬의 마수가 그득하다. 그런데 그들은 마법사에게 대적할 동방의 화총을 갖고 있지.’
자신이 토올룬의 지도자라면 어떤 선택을 내리겠는가? 바리엘 동부를 압박하던 루스웨나의 역할을, 하완 쪽으로 넘겨 대응하지 않겠는가?
루스웨나는 금기의 마법사를 내세웠고, 하완은 화총이라는 신무기를 쥐고 있다…. 이안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꾹꾹 눌러댔다.
‘변경 쪽에 문제가 계속 생긴다면 바리엘의 전력은 분산될 수밖에 없다. 성가시군.’
유일한 대책은 하나. 변경에서 하완이 밀고 들어오기 전, 바리엘에서 끝장을 보는 것이다. 토올룬을 치고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클리포포드의 도움을 받아 하완을 견제하는 것.
하나 하완의 잔존 세력은? 에리카는 바리엘의 자비를 바라며 죽었다만, 그들은 아직 살아 있지 않나?
투욱.
이안은 지도 위에 나뭇조각 말을 올리며 고심했다. 하완 혼자만의 힘이라면 클리포포드로 견제하는 데 문제없지만, 화총, 즉 동방의 힘이 함께한다면… 글쎄.
‘차라리 방패 말을 바꾸는 건?’
뒤에서 거슬리게 하는 하완을 먼저 정리하고, 앞에서 토올룬이 치고 내려오는 걸 버고스로 막아내는 방법도 있다.
‘카일라 홀린 영애가 버고스를 얼마나 잘 결집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겠지.’
버고스가 토올룬을 잘 막아내 견딘다면 그들이 흘린 피만큼 단단해질 터.
하지만 이건 위험성이 너무 높았다. 버고스는 전쟁의 피해가 극심했고, 주술사와 인형술사를 막아낼 만한 전력이 부족했다. 혹여 놈들이 버고스를 흡수하기라도 한다면, 이는 곧 고스란히 바리엘의 부담으로 다가올 것이다.
“찢어지는 수밖에 없겠는데…….”
이안이 그리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바깥에서 뭔가 우당탕탕, 큰 소리가 들려왔다. 어렵지 않게 베릭임을 알 수 있었다.
“이안아아!”
콰앙!
기세 좋기 문을 박찬 베릭이 이안의 낯을 잠깐 살폈다. 아주 찰나였지만, 이안은 베릭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체력도 좋아. 베릭.”
쉬라고 해산했거늘 그사이를 못 참고 저리 뛰어다니니 말이다.
이안은 술잔을 내려놓고서 그를 돌아봤다. 콧구멍을 벌렁벌렁, 믿을 수 없다는 낯이었다.
“이안아. 시발, 이게 뭔 일이래?”
“뭐가?”
“시아오시랑 클로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래! 찐으로!”
베릭이 기함하며 괴성을 내지르자, 이안은 가만히 귀를 막았다. 아코렐라와 물약 부작용 이후로 뭔가 진전이 있었나 보다.
놀랍긴 했지만, 새삼스러울 건 없는 일이다. 원래 사교계란 그랬으니까. 마법의 힘 없이도 별별 일이 다 일어나는 게 청춘인데, 시아오시와 클로이 사이에는 이미 잔불이 인 상태였다.
“잘된 일이니 소란 그만 피우고 들어가서 쉬어라.”
“미쳤나 봐. 클로이라니까? 그 싸대기 짜악!”
“오히려 폐하께는 이로운 일이다. 시아오시가 다비온가의 사위가 되면, 그쪽의 지지는 온전히 폐하의 것이 될 테니까. 아군이 하나 늘어나는 셈이지.”
클로이의 인성은 차치하고, 솔직히 배경만 따지고 본다면 시아오시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상대다. 다비온은 명문가였고, 황궁의 실질적 권한을 꽉 쥐고 있었으며, 부유했다.
“계속 그렇게 소란 피울 거면 제이럿 대장에게나 가서 하여라. 반가워하실 거다.”
“반가워하면서 뺑이 돌리겠지.”
“힘이 남아도는 자가 더 일하는 건 당연하다.”
이안은 그리 이르며 지도 위의 말을 내려다봤다.
아직 고민거리가 남았다. 하완으로 보낼 마법사 전력이 필요하긴 한데, 누구를 보낼지 결정하지 못했다.
자신을 포함하여, 마법사 대부분 마력이 바닥난 상태다. 아코렐라와 합류하였으니 마력회복제를 맞는다 한들, 육체에 누적된 피로까지는 어찌할 수 없으리라.
‘그나마 내가 화총에 대한 이해가 있으니 가는 게 맞겠다만, 그보다 진 옆을 지키는 게 옳다. 토올룬이 언제,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모르니까. …여러모로 헤일이 적격이군.’
헤일이 복귀하면, 잠깐의 휴식 후에 다시 하완으로 보내야겠다. 임무는 화총 수거 및 동방 세력 조사, 나아가 클리포포드와 함께 하완을 저지하는 것. 마검사도 몇 차출하여 붙여주면 수행에 문제는 없을 터다.
“베릭. 이제 네 방으로 돌아가.”
“너는?”
“여기가 내 방이다.”
“아니, 뭐 할 거냐고. 술 먹을 거면 대작(對酌)해 주고.”
“…대작이란 말은 어디서 배웠어?”
“내가 술 1짱인데, 이쯤이야 기본이지!”
그러고는 주류 진열장을 기웃거리는 베릭. 마법부 장관은 대체 얼마나 좋은 술을 마시려나? 찬찬히 술병들을 살폈으나, 라벨에 뭐라고 적힌 건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클리포포드 원산의 버고스 판매 와인이라서 그렇다.
그런 줄도 모르고 베릭이 미간을 찌푸리며 끙끙거리는 사이, 이안은 또 다른 인기척을 느꼈다.
우당탕탕!
…아무래도 쉬기는 글렀군. 보아하니 보고서 갖고 오는 인기척은 아닌 것 같은데.
이안이 눈매를 가늘게 하고서 문 쪽을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아코렐라와 마법사들의 고함과 애원이 연달아 섞여 들려왔다.
콰앙! 쾅!
“이안 님! 이안 님!”
“새끼들아, 진짜 이럴 거야? 해보자, 이거지?!”
“도와주십시오, 이안 님! 아코렐라 대장이 다르시 부인을 지지고 볶으려고 합니다!”
“아니이! 그런 거 아니라고! 나는 순수하게 그저 다르시 부인이 어떤 식으로 생명 활동이 가능한지 보겠다는 거잖아! 너희도 궁금한 거 다 알아!”
유리병에 담긴 다르시 부인의 눈알이 빙글빙글 돌았다.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이다. 저 미친 마법사의 손에 들어가면, 하나 남은 시각마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마법사들이 이리저리 유리병을 옮겨가며 아코렐라의 손길을 피했고, 그녀는 절뚝거리면서도 발길질하여 공격해댔다.
“이안 님 앞에서 이러실 겁니까아?!”
“그러니까 왜 이쪽으로 왔는데?”
아뵤오!
헤일 대장이 없으니까 아코렐라의 폭주를 감당할 만한 자가 없었다. 베릭은 술병 입구를 아예 입에다 대고 꼴딱꼴딱 마시며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봤고, 마법사들은 이안을 바라보며 애원했다.
“아코렐라.”
“예?”
이안은 그런 아코렐라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우뚝, 허공에서 멈춰 선 그녀의 손끝. 이에 다르시 부인이 거의 혼절할 것처럼 눈알을 뒤집었다.
“새로운 연구를 하기 전에, 이전의 것을 먼저 마무리하는 게 올바른 실험자의 자세라 생각한다. 우리가 히엘로에 가 있었던 동안 진행했던 광산 개발 보고서부터 올려주게.”
“아, 그게-”
아코렐라가 삐죽 웃으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클로이 영애 관찰 일기라면 준비가 됐는데, 광산 보고서는 아직인데용…. 그녀가 머쓱하게 눈을 깜빡거리자, 마법사들은 이때다 싶어서 쪼르르 이안의 뒤에 붙었다.
“‘이게’ 단순히 기이한 생명체 정도로 보이십니까? 토올룬 인형술사 놈들 목숨줄이랑 이어져 있는 놈이라고요. 괜히 뭐 잘못해서 눈알이라도 터트렸다가는… 아주 끔찍합니다!”
“맞습니다! 아코렐라 님은 아무것도 못 봤으면서!”
“어쭈, 이것들이 지금?”
“우우우. 아코렐라는 물러나라.”
마지막에 야유한 것은 마법사들이 아니라 베릭이었다. 그 짧은 사이, 놀랍게도 술병을 반이나 비운 채였다. 그는 엄지를 아래로 내리며 연신 장난스레 일러댔다.
“이게 미쳤나!”
휘익! 아코렐라가 직선으로 주먹을 날렸으나, 베릭은 고개 까딱이는 것만으로 가볍게 피하며 웃었다.
“내가 아무리 바보라도 허접데기 마법사한테는 안 맞지!”
빠악!
하지만 말하기가 무색하게 아코렐라의 정수리가 그의 턱을 들이받았다. 이를 신호로 한바탕 또 시끄러운 고함이 오갔다.
이안은 그들을 모두 밖으로 물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베릭이 자신의 방에 찾아온 진짜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특한 녀석.’
문을 박차며 나타났던 베릭의 눈길이 너무 적나라하여 의도가 훤히 보였다. 혹, 혼자서 ‘그’ 기억을 끌어안고 힘들어하지는 않는지 살폈던 게다.
아니라 부정하고 싶어도, 이안은 그럴 수 없었다. 네르사른과 히엘로 영지민들의 죽음을 생각하며 술을 한 모금 흘려보냈으니까 말이다.
이안은 알고 있었다. 옆에서 이리 왁자지껄 흔들어 놓지 않으면, 수면 아래 가라앉았던 그것들이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올 것임을.
“다들 쉬지 않을 셈인가?”
그럼 일한다? 이안이 장난스레 묻자, 마법사들과 베릭이 멈칫했다.
이안 혼자 두기 대 꾸역꾸역 일하기.
죽음의 이지선다였지만, 마법사들의 고민은 짧았다. 별다른 선택지도 없었고. 차라리 지금 미리 해 두면 나중이 편할지도? 도르르 굴러가는 눈알을 보니 다르시 부인 역시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럼-”
여기서 일하겠습니다, 마법사들이 그리 이르려는 때였다.
“……?”
다들 낯선 마력의 기운을 느끼고 우뚝 멈추었다. 아주 작고 희미하지만, 분명히 흐름이 느껴졌다. 다르시 부인을 제외한 모두가 동시에 창문 바깥을 쳐다봤다.
“다들 방금 느꼈지?”
“어. 뭐였지? 엄청 짧았는데.”
“이안 님. 확인해 볼까요?”
“그게 좋겠군.”
이안의 지시에 자리를 박찬 마법사들이 문손잡이를 잡으려 할 때였다. 또다시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또? 오늘따라 손님이 너무 잦았다.
벌컥!
“헉!”
마법사들이 문을 열어젖히자, 사색이 된 시종이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이, 이안 님. 실례합니다.”
“무슨 일인가?”
“방금 창공에서 정체불명의 포탈이 생겼다 사라졌습니다. 그 크기가 너무 작고 순식간이라 큰일은 없었습니다만…….”
시종이 손을 벌벌 떨며 작은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마법사들은 그걸 받들어 바로 이안에게 건네주었고, 이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에 포탈을 열고 연락해 올 사람이라면 하나뿐이지 않나.
“이안 님. 혹시 헤일 대장 연락일까요?”
사락.
쪽지 뒤에 핏자국이 은근하게 묻어 있다. 이안은 불길함을 느끼며 펼쳐 읽었고, 이내 내용을 확인하고서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안 님. 가용 마력의 한계로 어쩔 수 없이 쪽지로 소식을 전하는 점 송구합니다. 큰 문제가 있습니다. 필리아 님의 생명이 위독합니다. 저와 토미가 마력으로 붙들고는 있지만, 모르겠습니다. 당장 치유 마법사를 보내주십시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