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9
제69화. 황실의 규율
저택 문으로 위풍당당하게 들어서는 마차. 이전에 조사단이 들이닥쳤을 때와 비슷하지만, 확연히 달랐다. 멀리서 장님이 보아도 긍정적인 소식을 담고 있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마차가 지나온 길을 따라 영지민들이 호기심으로 따라붙었다.
“뭐지? 또 중앙에서 온 마차인가?”
“설마! 조사단이 다시 내려온 건 아니겠지?”
“그때랑 깃발이 다른걸. 그리고 마차가 너무 비싸 보이지 않나? 무슨 일이람, 흐음.”
“마차는 원래 비싸, 멍청아.”
“어어? 저택으로 올라간다!”
저택에서 일하고 있던 사용인들 모두 밖으로 뛰쳐나왔고, 이안 역시 흙을 털며 정문으로 걸어갔다.
끼익.
거대하고 화려한 마차 뒤로 길게 이어진 행렬. 황궁 병사들이 의식용 검을 든 채 자세를 바로 하고 있었다. 위엄있는 모습에 모두 크게 수군거리지 못했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리는 한 노인.
“아. 행정관 치엘로니아다.”
로만드로만이 그녀가 누군지 알아챘는데, 몰린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자 같았다. 깊은 주름과 달리 형형히 빛나는 눈빛이 날카롭다. 그녀는 우아한 자세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안을 바로 찾아냈다.
“그대가 이안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황제 폐하의 말씀을 싣고 왔소. 모두 무릎을 꿇으시오.”
이안은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고, 이내 저택의 모두가 그를 따라 엎드렸다. 여인은 기품있고 묵직한 목소리로 서신을 읽어내렸다.
-마리브 베로시온 1황자와 로만드로 자문관의 추천서가 총회의 승인을 받았다. 영지 재건 및 변경 수호에 대한 공적을 높게 치하는 뜻으로 이안을 전 브라츠 영지의 새로운 자작으로 임명하노라. 다만…….
영주로 임명한다는 말에 사용인들이 불경도 모른 채 고개를 바짝 들었다. 밖에 몰려든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귀를 바짝 세우며 황궁에서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훔쳐 듣고 있었다.
-그대가 데르가 브라츠의 서자인 것은 어느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낙인일 것이다. 이에 조건부를 제안하겠노라. 영주로서 데르가 브라츠가 누락한 조세와 그대의 처우 개선 기회비용을 황궁에 헌납한다면, 새로운 가문의 영광이 후대까지 이어질 것이다.
‘어허라.’
이안은 눈썹을 살짝 휘며 웃었다. 한마디로, 기간제 영주라는 뜻이다. 그 안에 헌납한다면 문제없이 직위를 이어갈 수 있겠으나, 실패한다면 모든 것이 황궁의 처분 아래 들어가겠지.
이안의 신분을 비롯한 영지의 모든 재산이.
“이상, 황제 폐하의 전언이셨습니다. 연말에 황궁에서 정식으로 영주임명식이 있을 것이니, 이에 동의한다면 날을 맞추어 올라오십시오.”
영주임명식에 가면 새로운 성(姓)을 부여받음과 동시에 가문의 인장 따위를 공식으로 선언할 수 있다. 이안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혹시 헌납 기간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습니까?”
“임명식 기준으로 한 해가 될 것이며, 변제 금액은 총 금화 1만 닢입니다.”
“흐익!”
누군지 모를 하인의 기함이 터져 나왔다. 살면서 금화 1만 닢이라는 금액을 들어본 것도 처음인데, 그걸 무슨 수로 만들어낸단 말인가? 그것도 평년 조세와 별개로.
치엘로니아는 서신을 돌돌 말아 이안에게 건넸다.
“그대에게는 거절할 권한도 분명히 있습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감히 황제 폐하의 말씀인걸요.”
진짜 당치도 않다. 서신에는 ‘처우 개선 기회비용’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었다. 아마 마력운용자인 이안을 노예로 강등하여 귀속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일 테다. 여기서 임명을 거절하면 노예로 만들어주십사,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대사막으로 도망간다 한들, 황궁이 마음먹고 토벌한다면 가능성이 없다.
“무궁한 영광으로 받들겠습니다.”
“임명식은 신년회와 함께 열릴 것입니다. 자세한 일정은 따로 전달할 것이고, 공표할 가문의 문양을 준비하십시오.”
성(姓)은 황제가 내리는 것이라, 이안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축하합니다. 이안 경.”
정식으로 선포하지는 않았으나, 그에게 황제의 명이 닿은 셈이다. 치엘로니아는 이안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잠시 말을 골랐다.
“예?”
“몰린 경은 무사하십니까?”
같은 행정부 소속에 비슷한 나이대. 분명 오랜 세월 함께한 동료이리라. 로만드로의 보고서를 통해 이안과 마찰이 있었다는 것까지는 확인할 수 있었으나, 정작 신변에 대한 언급이 없어 이만저만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무사하다마다요.”
“지금부터는 황제 폐하의 명이 아닌, 게일 2황자 저하의 명을 전달하겠소.”
그녀는 마차 앞에서 한 걸음 걸어 나왔다. 그리고 이내 안주머니에서 다른 서신을 꺼내 펼쳤다.
-몰린과 맥 그리고 드고르의 신병을 확보하여 함께 복귀하라.
차악!
치엘로니아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어서 이행하라는 듯 눈짓했다. 이안은 팔짱만 낀 채 그녀를 쳐다봤다.
“무엇하십니까?”
“그건 제가 묻고 싶군요. 무엇하십니까?”
뜻밖의 태도에 그녀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받들겠노라 허리 숙여도 모자랄 판에, 반문이라니? 하지만 이안이 덧붙이는 말은 로만드로조차 깜짝 놀랄 정보였다.
“황제 폐하는 태양과 같은 존재입니다. 태양이 쉬지 않고 움직이듯 마차가 멈추는 것을 최소화해야 하며, 하늘에 태양이 하나이듯 폐하의 명만 전달해야 합니다. 행정관께서 그걸 모르실 리는 없을 텐데요.”
“……!”
황제의 명엔 사족이 붙을 수 없다. 황명은 오롯이 황명으로만 전달되어야 하며, 거기엔 어떠한 잔가지도 있어선 안 된다. 이는 오래된 황궁의 예법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게일의 말을 덧붙이냐는 것이다.
“실로 불경한 일입니다. 황제 폐하가 아시게 되면 파면당할 수도 있다는 걸, 행정관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옆의 로만드로가 당황해하며 눈을 굴려댔다.
“그, 그것이 진짜인가? 이안?”
“기본 중에 기본이지요. 로만드로 님은 모르셨습니까?”
“황제 폐하 명을 직접 받아본 적이 있어야지…….”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니면 황명 전달은 대부분 총회에서 마무리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먼 곳까지 전달해야 할 일이 거의 없기도 하고. 이는 이안이 한때 황제였기에 알 수 있는 일종의 암묵적 규율이었다.
치엘로니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만 갔다.
‘변방의 천민 출신 서자가 그걸 어떻게…….’
어지간한 귀족들도 관심이 없으면 모르는 것인데, 그가 알고서 이리 되받아칠 줄은 몰랐다. 무어라 말을 덧붙이면 좋을까 고민하는 것도 잠시. 이안이 먼저 선수쳤다.
“황제 폐하와 마리브 저하께 굉장히 불경한 행동인 것 같습니다. 치엘로니아 행정관님. 몰린과 그 일행의 신변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확인시켜’ 줄 수 있으나, 그 이상은 무리입니다.”
예법도 예법이지만, 몰린 일행은 적의 충성스러운 수족들이다. 언제 다시 비수가 되어 날아들지 모르니.
‘마법부를 비롯해서 행정부 역시 게일 쪽인 건가? 아니면 몰린과 치엘로니아만 그러한 것인가? 무엇이 되었든 미안하지만, 저 세 놈의 몸을 내줄 순 없다.’
이안은 단호한 얼굴로 치엘로니아의 안색을 살폈다. 게일이 나름 책임지고 구해내려고 한 듯하나, 마리브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 그 누구도 손댈 수 없으리라.
“…이안 경. 이번 경우는 특수한 경우입니다.”
“특수라. 어떤? 참고로 지금 하시는 말은 이 자리의 모든 자들이 들을 겁니다. 신중히 하세요.”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 이안은 어서 말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명 전달 예법에 빠삭할 정도인데, 그 이상을 모를까.
치엘로니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난감한 표정을 지워냈다.
“…우선 몰린과 일행의 안전을 확인해 보지요. 이는 황궁으로 보고될 것입니다.”
“그러십시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베릭!”
“알겠슴니다아.”
“마차가 오래 서 있었으니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치엘로니아 행정관님.”
치엘로니아는 이안을 무시하며 본관으로 들어섰다. 그녀 뒤를 따르려던 이안, 문득 일렬로 서서 그를 바라보는 사용인들과 눈이 마주쳤다. 반짝반짝, 별이 반짝이는 듯했다. 그들은 복화술 하듯 이를 꽉 깨물며 조용히 속삭였다.
“축하드립니다. 이안 님!”
“세상에나, 귀족이 되셨어요. 정말이지 이게 무슨…….”
“이안 님이 자작 작위를 받을 거래!”
“자작이면 세상에, 남작 위지 않습니까?”
한마음 한뜻으로 이안의 신분 상승을 축하했다. 그건 곧 그들의 고향인 브라츠가 정상화될 것이란 의미였고, 저택의 고용 안전이 더욱 견고해진다는 걸 뜻했다.
이안은 웃음으로 고맙다는 뜻을 내보이며, 치엘로니아를 따라 지하 감옥으로 들어섰다.
“이쪽입니다.”
베릭의 안내에 치엘로니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그걸 붙잡는 이안의 한마디.
“섣부른 대화는 하지 마십시오.”
“뭐라?”
“몰린은 외부와 결탁하여 저를 죽이려 한 혐의가 있습니다. 영주로 임명된 지금, 저는 제 안위를 위하여 몰린을 구금할 권한이 있습니다.”
허튼짓을 하면 저들을 시체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성 경고였다. 치엘로니아는 자꾸만 예측된 상황이 빗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보름간 그려왔던 그림은 이것이 아닌데 말이다.
‘아까부터 말리는 기분이군…….’
이럴 때 좋은 방법이 있긴 했다. 바로, 말을 최대한으로 아끼는 것. 치엘로니아는 정면만 바라보며 침묵했고, 이안은 그녀를 훑어본 다음 천려족에게 명령했다.
“문을 열어라.”
끼익.
문이 열리자, 안에서 낯선 곰팡내가 훅 쏟아졌다. 매일 쓸고 닦지만, 창문이 없는 터라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몰린!”
“…치엘로니아?”
“치엘로니아 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니, 그것보다 저희 좀 꺼내주십시오! 저 되먹지도 못한 놈이 우리를…….”
우리를 가두었다고 소리치던 맥. 치엘로니아의 복장을 보고서 말을 흐렸다. 황명을 전할 때 차려입는 정식 예복이 아니던가. 지금 이 시기에 황명이라 하면, 딱 하나뿐이다.
“설마, 이안 저놈에게 영주임명장이 내려왔습니까?”
맥의 망연자실한 물음에 침묵으로 대답이 돌아왔다. 몰린은 의자에 앉아서 눈두덩이를 지그시 매만졌다. 그들 입장으로는 최악 중의 최악이다. 풀리는 것 없이 계속해서 일이 꼬이는 기분.
“게일 저하께서는 잘 계십니까?”
“하하하.”
몰린의 질문에 옆에서 듣고 있던 이안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찌나 청명하고 맑게 울리는지, 치엘로니아는 당황스럽게 쳐다볼 뿐이다.
“보십시오. 남 걱정할 만큼 잘 드시고, 주무시고, 할 것 하고 계십니다. 창문 없는 것 빼고는 지낼 만하지요. 암살 주모자에게 이만한 호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치엘로니아는 이안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들이 남루해지긴 했으나, 고문의 흔적이나 학대의 흔적 따위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감옥이 맞나 싶을 정도로 널찍하고 가구도 모두 들어서 있었다.
“하실 말씀 있으면 나누시지요. 그리고 맥 경, 짚으셨다시피 현 시간부로 저는 자작 이안입니다. 호칭을 제대로 하시길 바랍니다.”
귀족 가문 자제인 것과 귀족의 작위를 잇는 것엔 큰 차이가 있었다. 이안은 엄연히 영지를 책임지는 자가 되었으니, 예우를 확실히 하라는 경고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욕죄로 고발당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안… 경. 잠시 내 얘기를 나누고 싶소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치엘로니아가 끼어들며 간청했다. 하지만 이안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오, 불허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