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694
제694화. 이안의 밤 나들이
밤이었다. 고롱고롱 잠들어 있던 마법사들이 하나둘씩 깨어나는 시간.
창밖으로 흰 달이 떠 있었는데, 이게 하루가 지난 건지 아니면 이틀이 지난 건지 모르겠다. 마법사들은 뻐근한 허리를 주무르며 몸을 일으켰다.
“하아암. 잘 잤다.”
“몇 시래?”
“몇 시인 것보다 며칠인지가 더 궁금한데.”
“나 배고픈 거 보니까 이틀은 지난 듯.”
“호들갑 떨지 마. 고작 열 몇 시간 잤으면서 그런 말 하면 대장들이 가성비 좋다고 안 재워.”
헙! 그렇네. 마법사들은 퉁퉁 부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안 님을 비롯한 대장직 마법사들은 없었다.
꼬르륵.
누군가의 배에서 난 소리를 신호로 마법사들이 비척비척 일어났다. 배가 심하게 고픈데, 식당 쪽으로 내려가서 뭐라도 주워먹을까?
왕궁 안 불은 대부분 꺼져 있었으며, 경비들 또한 최소한만 세워져 있었다. 그들조차 고개를 뒤로 꺾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지만.
“저저, 빠져서는. 쯧쯧.”
“어? 저기.”
그리고 저 멀리, 로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는 인기척 하나. 밤중에도 환하게 빛나는 금빛 머리칼이다. 마법사들은 시선을 마주했다.
“…이안 님 맞지?”
“어. 그렇네. 이 밤중에 어딜 가시는 거람.”
“밖으로 나가시는 것 같은데?”
혼자? 마법사들은 이안이 나간 문 쪽을 빤히 쳐다보더니, 동시에 몸을 숙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이럴 때는 정말이지, 자신들이야말로 동고동락하는 사이라는 걸 실감하고는 했다. 말하지 않아도 척척 통하는 게 있으니까.
“불안하네. 혼자서 어딜 나가실 분이 아닌데.”
“그러니까. 쉬어도 폐하 옆에서 쉬실 분이.”
“호, 혹시 멀리 가시려는 건 아닐까?”
누군가의 주장에 마법사들이 사색이 된 채로 돌아봤다.
“워낙 안 좋은 일이 많기도 했고, 감수성 풍부하실 나이다 보니까… 마음과 달리 몸이 먼저 움직일 수도-”
“허튼소리 할 거면 들어가서 잠이나 더 쳐 자.”
그렇게 일갈하면서도 마법사들은 이안의 뒤를 밟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안은 피곤에 곯아떨어진 병사들을 스윽 살피더니 스쳐 지나갔고, 이내 성문 밖까지 발걸음했다. 확실히 이상했다. 어쩌지? 저것도 따라가야 하나?
“늬들, 여기서 뭐 해?”
“헉!”
모퉁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던 차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릭이었다. 그는 마법사들처럼 고개를 쭉 빼내며 이놈들이 뭘 보고 있나 살폈다.
“엥? 이안이잖아? 이-!”
“쉿! 쉿쉿!”
마법사들이 베릭의 입을 겨우 틀어막으며 막아섰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휴식이 소중하듯, 이안에게 역시 그러했다. 특히 언제나 사람들에게 파묻혀서 일하는 터라, 혼자 있는 시간은 귀하기까지 할 것이다.
“미친놈들인가? 그러면 돌아가서 늬들 할 거 해.”
“아니, 그렇다고 뭔가 저리 혼자 두기에는 좀 불안하고.”
“뭔지 몰라? 베릭, 너 이 새끼. 이런 마음 정말 뭔지 몰라? 실망이다.”
끄응. 베릭이 귀를 후비적거릴 때였다. 타앗! 이안이 가볍게 날아들더니 시내 쪽으로 빠르게 내려가는 것 아닌가.
마법사들도 후다닥 로브를 뒤집어쓰고서 그 뒤를 밟았다. 놀란 베릭이 마법사들의 다리를 붙잡으며 따라붙었다.
“아! 무거워, 인마!”
“조용히 날기나 해라. 이안이한테 들키고 싶어?”
“콱 씨, 떨구어서 죽여 버릴까 보다.”
“헹. 그런 걸로 죽을 거면 진작 뒤졌지.”
“후배도 받았다면서, 철 좀 드는 건 어때?”
“그럼 너희들은 철들어서 상사 뒤나 밟고 있냐?”
…할 말이 없네.
마법사들은 입매를 딱 굳히고서 이안과 간격을 유지했다. 너무 가까워지면 들킬 것이고, 너무 멀면 놓친다.
과연, 이안은 어디로 가려는 걸까? 여기가 바리엘도 아니고, 버고스 한복판인 칼라마트에서 볼일이라는 게 무엇 있다고?
타앗.
“담당자 있는가.”
이안은 버고스의 젖 인근 장벽에 착지하더니, 경비조를 불렀다. 비몽사몽 정신이 반쯤 빠져 있던 경비대가 후다닥 달려와 경례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다. 오수(汚水)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고 싶은데, 판자를 걷어 줄 수 있나?”
“아, 일부분이라면 가능합니다. 잠깐이면 될까요? 악취가 너무 심한지라, 오래 열어두면 인근 주민들이 난리 납니다.”
“물론이다.”
열어 둔 시간이 길수록 악취도 심해지는 터라, 급한 대로 강 위를 나무판자 따위로 막아둔 상태였다.
경비대장의 손짓에 병사들이 바삐 움직였고, 이윽고 나무판자 하나를 끌어냈다. 이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소매로 코를 가렸다.
“…심하군.”
“강과 맞닿은 토질이 눈에 띄게 상하고 있습니다.”
“되었다. 다시 덮어도 된다.”
오수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선발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차도도 없고, 들려오는 정보도 없으니, 원.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역설적이게도 버고스와 클리포포드의 피해가 커질수록, 단기적이지만 바리엘에는 이득이었다. 토올룬이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서 버고스 국민의 지지와 클리포포드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얻을 수 있었으니까.
“인근 주민들은 어찌 지내는가?”
“악취 때문에 살 수가 없으니 점점 강가에서 먼 곳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대부분 시내 안쪽에 몰려 사는 듯하더군요.”
사장(死藏)된 땅이 넓어질수록 인구 밀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건 곧 삶의 질과 관련된 사안.
‘홀린 모녀는 골치 좀 아플 터다.’
기존 버고스 왕궁 세력을 몰아내고 집권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지지가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부디, 분노를 결집하여 힘으로 치환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를.
“그래. 그럼, 다들 수고하시게.”
“아, 예옛!”
타앗!
이안은 경비대에 그리 이르며, 이번엔 시내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닌 밤중에 무슨 날벼락인가, 후우. 경비대가 식은땀을 훔쳐내려 하자, 순식간에 무언가가 촤아악 스쳐 지나갔다.
“헉!”
마법사들이다. 그것도 붉은 머리칼 사내를 대롱대롱 매단 상태.
경비대들은 순식간에 사라진 마법사들의 뒤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긴장이 풀린 듯 스르륵 주저앉았다.
“이안 님 지금 쉬는 거 맞지?”
“강가에서 소풍 놀이 해도 모자랄 판에, 왜 저런 걸 보고 다니시는 거여.”
“이번엔 어딜 가시려는 거지?”
하늘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던 베릭이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어딘가 굉장히 익숙했다.
그러다가-
“어, 여기!”
기억났다! 자신이 창문 깨고 들어갔던 그 화랑! 술 먹고 마력석 그림 쌔볐던 거기! 거기서 튀어나온 상단 놈이 히엘로의 상황을 전해주지 않았던가.
이안은 문제의 그 화랑을 찾아온 것이었다. 혹여 새로 얻을 만한 단서가 있는지 확인할 겸.
투욱.
마법사들과 베릭이 골목에 착지하여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안은 굳게 잠긴 화랑 문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안이 일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돌아가지?”
“잠깐.”
그때였다. 화랑 맞은편 술집에서 양동이를 든 주인이 나왔다. 그는 거리에 물을 쏟아버리며 물었다.
“밤중에 거기서 무슨 볼일이시오?”
“실례합니다. 여기 화랑, 언제부터 문이 잠겨 있었는지 아십니까? 바리엘 황궁에서 나와 조사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어어, 그 지랄 난 이후로는 계속 열려 있었지. 그런데 이틀 전이었나? 화랑 주인이라는 자가 와서는 대충 정리하고서 문단속했다오.”
“화랑 주인이요?”
이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화랑은 원래 왕궁에 그림을 납품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다몬이 인질로 붙잡히면서 자연스레 몰락, 근 10년 가까이 닫힌 채 방치되어 주인이 누군지조차 파악 불가하다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주인이라니?
“왜? 황궁 관계자이신가?”
“네. 그렇습니다. 물어볼 것이 있는데, 그 주인은 어디 계십니까?”
“저기, 안에서 술 한잔하고 있지.”
마침 잘되었다며, 주인이 고갯짓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10년 동안 화랑 앞 지켜줘서 고맙다나 뭐라나. 참나, 술이란 술은 다 팔아주고 있지 뭐요. 나는 뭐, 여기서 내 장사 한 것밖에 없는데.”
운이 좋았다. 이안이 막 술집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주인장이 빈 양동이로 그의 앞을 휙! 막아섰다.
“어허!”
“……?”
무슨 문제라도? 이안이 의아하게 그를 돌아보자, 주인장은 덥수룩한 눈썹을 꼼지락거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술집은 열 시 이후 어린아이 출입 금지라서.”
“…버고스에 그런 법이 있었나?”
“버고스에는 없고, 내 주점에는 있지!”
꼭 치기 어린 것들이 머리끝까지 취하도록 처먹고 행패를 부리더라고. 귀찮고 더러워서 내가 만든 법이오! 그리 말하는 주인장의 태도는 단호했다.
이안은 한발 물러선 채로 주점 안을 살폈다. 사람이 꽤 많아서 누가 화랑 주인인지 모르겠다.
“황궁 소속 직원이라는 걸 증명하면 되겠소?”
“미안하지만 그것도 안 되겠네. 얼마 전에 황궁의 마검사인가 뭔가 하는 놈이 술 왕창 털어먹고 그대로 튀어 버렸거든! 그 후로 신분 외상은 불가하네.”
술 왕창 털어먹고 튀어? 대화를 훔쳐 듣던 마법사들이 눈알을 도르륵 굴려 베릭을 쳐다봤다.
“이 새끼, 뭐 하고 다녔대?”
“아니,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그림 때문에 정신없었어. 그때는.”
주인장은 곱상하니 생긴 이안을 슬쩍 살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긴 하지만 안감이 꽤 고급으로 보였고, 무엇보다 풍기는 분위기가 참으로 위엄 있다.
아무래도 말단 병사는 아닌 것 같고… 술 먹고 사고 칠 위인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흠, 어느 정도 예외를 둘까?
“크흠. 돈은 좀 있으신가?”
“돈…….”
이안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가볍게 나온 터라 빈털터리다. 주인장은 어이없이 하-! 하고 탄성을 내지르며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참나, 바리엘 황궁 소속이라는 작자들은 왜 이리 하나같이 뻔뻔하나 몰라. 어찌 돈도 없이 주점에 들어오려고 하시나? 응?”
삭삭삭! 그러고는 서둘러 가줬으면 좋겠다는 듯, 보란 듯이 빗자루질을 해댔다.
이안은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둠 속, 골목에 숨어 있는 마법사들을 정확히 바라보는 각도였다.
“다들, 갖고 온 돈 좀 있나?”
“……!”
“아니면 베릭, 네가 몸으로라도 좀 때워야겠다.”
쉬발. 어떻게 알았지? 마법사들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베릭이 가자고 할 때 갈걸!
다들 모습을 보이길 망설였으나, 베릭은 거리낄 것 없이 손을 흔들며 위풍당당 걸어 나갔다.
“하여간, 눈치는. 언제부터 알았대?”
“그게 중요한가?”
“헉! 다, 당신은!”
“주인장, 오랜만. 내가 그때 먹고 튄 게 의도한 건 아니었거든. 미안하게 됐수다. 돈은 없고, 그… 빗자루질이라도?”
이어서 마법사들도 꼬물꼬물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자다 일어나서 꾀죄죄한 얼굴이다. 그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주머니를 털었다.
“이안 님. 자다 와서 푼돈밖에 없는데요.”
“죄송합니다아…….”
딸그락!
하지만 그들이 푼돈이라고 내민 것은 모두 금화였다. 주인장의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런데 잠깐만. 지금 저치들이 이 소년더러 뭐라고 부른 거지?
“이, 이안?”
바리엘의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 그자가 맞나?
이안은 마법사들이 헌납한 금화를 하나씩 살피더니, 주인장에게 보여주었다. 이만하면 들어가도 되겠냐는 듯.
“어어, 들어가. 들어가.”
안내한 것은 주인장이 아니라 베릭이었다. 그는 어느새 빗자루를 들고서 직원처럼 행세하고 있다.
끼이익.
이안은 허리 높이의 나무판자 문을 밀고 들어가 안을 살폈다.
술집 한구석, 술이란 술은 다 팔아주고 있다는 말에 걸맞게, 유독 술통을 많이 쌓아둔 사내가 보였다.
“……?”
동시에 어디선가 희미하게 나는 낯익은 냄새. 이안은 그의 맞은편으로 걸어가 앉으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화랑 주인이시라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