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
제7화. 까막눈
“이안 님. 집중하셔야지요.”
이안은 가정교사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서쪽 별채의 손님방. 이전과 달리 사방으로 트인 창에서 맑은 바람이 들어왔다. 심드렁한 제자의 모습에, 교사는 한숨을 쉬며 펜을 끼적였다.
“자. 다시 해보겠습니다. 영지민 100명이 밀 다섯 자루를 조세로 바쳤다고 합시다. 그중의 절반은 수도로 보내고, 다시 남은 것의 절반은 저택 하인들에게 나눠줬다고 하면 최종적으로 남는 것이 몇 자루입니까?”
이안이 가볍게 하품하며 시선을 돌렸다. 오후에 두어 시간씩 보내는 공부 시간은 정말이지, 지겨워서 견딜 수가 없다.
“모르겠습니다.”
바로 바뀌면 이상하게 볼 것 같아, 맨 처음에는 손가락까지 세워가며 계산하는 척을 했다.
근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하려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이안은 마음을 고쳐먹고 아예 모르겠노라 시치미를 떼었다.
“계산이라도 해보십시오.”
“음. 100자루 아닐까요?”
게다가 서자의 아둔함을 이용하면 뜻밖의 소득도 있었다. 이안의 교육 과정을 두고서 가정교사와 집사가 필담을 종종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시답잖은 내용이었지만. 가끔은 가주의 일과 같은 정보를 흘리기도 했다.
“…수학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은 문학입니다. 저번 시간에 을 읽었지요?”
가정교사는 열의가 없는 자였다. 이안이 이해하든 말든 자신에게 주어진 범위만 우직하게 해나가며 봉급을 타 먹었다.
이안으로서는 다행이었다. 모른다고 하면 깔끔하게 포기하니, 아등바등 공부하는 척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실례합니다.”
집사가 간식거리를 들고 들어왔다. 하인이 아닌 집사가 직접 가져오는 것은 아이의 학습 태도를 관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을 터.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나요?”
“문학으로 마무리하려 합니다.”
“그렇군요. 오늘은 마침이 빠른 것 같네요.”
“이안 님이 워낙 잘 따라주시니.”
얼씨구. 웃기고 있네.
이안은 간식을 와작거리며 그림이 절반인 책을 내려다봤다. 집사가 가정교사 쪽으로 손바닥을 보이더니 뭔가를 빠르게 써 내려갔다. 이안의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네. 집사님.”
타악.
가정교사는 몇 없는 글자를 읽어주고, 양피지에 적어주었으며, 이안에게 따라 적기를 시켰다.
그렇게 지루한 오후 공부시간이 마무리되었다. 벽에 걸린 자명종이 울자, 가정교사가 책을 챙기며 일어났다.
“배웅하겠습니다. 선생님.”
“아니. 괜찮습니다. 오늘은 바빠서요. 이안 님은 글씨 공부를 마저 하세요.”
항상 가정교사를 마중, 배웅하며 걸음걸이와 인사 혹은 사교 예절을 익히곤 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거절하는 날은 그가 집안의 누군가를 만나고 간다는 뜻이었다.
“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이안은 별다른 말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트를 챙겨 입은 가정교사가 웃으며 방을 나섰다.
‘집사를 만나러 가는 것인가?’
간혹 백작이나 백작 부인을 보는 것도 같다만. 별채로 옮겨진 이후 근처를 배회하는 시종이 많아 뒤를 따를 수는 없었다.
미련을 버린 이안은 양피지를 대충 치우고서 몸을 가볍게 풀었다. 방이 넓어져서 다행인 것은, 밖에 안 나가더라도 신체를 단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체력이 곧 마력이다.’
마력으로 체력을 기르고, 그 체력으로 다시 마력을 담아내는 것이다. 대마법사라 불리는 현자들이 백발노인이 되어서도 정정한 게 바로 그 이유였다.
“이안 님.”
똑똑.
그리고 그날 밤.
저녁 식사까지 마친 이안을 집사가 불렀다.
“백작님이 집무실로 올라오라 하십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
* * *
데르가의 집무실은 저택 꼭대기 층에 있었는데, 한 층을 다 쓰다 보니 그쪽 복도를 거닌 적이 없었다. 이안은 의아해하면서도 의연하게 집사를 뒤따랐다.
“백작님. 이안 도련님 오셨습니다.”
두꺼운 문손잡이를 몇 번 두드리자, 안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들어와라.”
끼익.
야광돌 하나만 달렸던 이안의 예전 방과 달리, 집무실은 대낮처럼 훤했다. 빼곡하게 들어선 마력 랜턴이 곳곳에서 빛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중충한 분위기가 풍기는 것은 데르가 백작의 존재 탓이겠지.
“부르셨습니까?”
이안이 공손히 물었으나, 데르가는 답이 없었다. 밤낮으로 밭 가는 평민들에 비하면 실로 천하태평인 업무 환경이지만, 백작은 백작 나름대로 바빠서 정신이 없을 것이다.
“···모레 오찬이 있는 건 알고 있겠지.”
“네. 물론입니다.”
데르가는 여전히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다른 보좌관들도 대동한다 하는구나.”
첫 번째 식사가 꽤 인상적이었나 보다. 시골 변경, 그것도 서자 출신 아이가 푈른의 철학을 논하고 있으니 흥미가 돋은 듯싶다.
“저번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고작 이걸 단속하려고 부른 것인가?
방을 바꿨을 때도 별말 않던 데르가였다. 이안은 참을성 있게 뒷말을 기다렸다. 양피지 위로 그어지는 펜촉 소리가 이어지고, 백작은 무겁게 닫았던 입을 다시 열었다.
“천려족에서 네 친필 서신을 요구했다.”
이쪽에서 화친의 조건으로 데르가의 둘째 아들을 보내겠다 전달했음은, 이안도 아는 사실이었다.
동질의 가족에게만 반응한다는 물약도 함께 동봉했으니 핏줄에 관해서는 가타부타 언급할 것이 없었다.
물론 천민 출신 서자인 것은 모르고 있겠지만. 어쨌거나.
“제 친필을요?”
그들은 나름대로 보안장치를 원하는 듯하다.
혹여 데르가가 아들을 안쓰러워한 나머지 막판에 바꿔치기할 수도 있지 않은가? 가족 간의 유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천려족인지라, 그렇게 생각할 여지는 충분했다.
“야만족답게 귀찮은 일을 사서 만든단 말이지. 쯧쯧. 협약식에서 동질 물약을 또 쓸 터인데.”
바리엘 제국과 달리 천려족은 마법사가 따로 없다. 그들은 짐승과 진배없는, 핏줄부터가 자연을 거스르는 존재들이니까.
“뭐. 나로서는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친필 서신을 받아 놓고, 나중에 필체 대조를 하려는 것이다. 이안이 데르가의 서자이며 점찍어 두었던 대상이 맞는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서신을 써서 보내도록 하여라. 가정교사에게 일러둘 터이니 너는 받아쓰기만 해. 설마 그것도 못 하는 천치는 아닐 테지.”
“실수 없이 하겠습니다.”
끼익.
그 순간. 집무실에 딸려있던 작은 방문이 열렸다. 집무관이 바싹 절은 낯빛으로 데르가를 찾았다.
“백작님. 아무리 해도 계산이 맞지 않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쌓인 서류 더미를 한가득 안은 채였다. 조금만 삐끗해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에 백작이 손을 내저었다.
“됐다. 내가 움직이지.”
이안에게는 잠시 기다리라는 눈빛이었다.
업무를 보던 서류들이 책상 위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지만, 백작은 별로 경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안은 까막눈에 가까웠고, 읽는다 해도 음절을 나열하는 수준에 그쳤으니까.
“기다려라.”
데르가는 집무관의 사무실로 들어가며 명령했다. 알겠노라 공손히 웃던 이안의 표정이 단번에 뒤바뀌었다.
‘한번 보자. 무엇이 그리 바쁜지.’
지금은 초봄이었다. 성실한 가주들은 땅이 얼었을 때도 영지를 돌보지만, 아무리 봐도 데르가는 그럴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몰린을 만났던 날까지 뒷골목 나들이를 즐기지 않았던가.
차락.
이안은 서류를 빠르게 훑었다. 순서가 섞이지 않게끔 종이 흩트리는 솜씨가 아주 부드러웠다.
‘음?’
이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추측대로 데르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브라츠 변경의 크기라면 많아 봤자 300 안팎이어야 무리 없이 돌아갈 터. 하지만 군량미 지출 숫자로 봤을 때 2,000에서 3,000까지도 가능한 수였다.
‘안 망한 게 용하군.’
게다가 영지민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수도 권장비율보다 두 배 이상이었다. 역사에서 천려족이 브라츠를 멸문시킨 건, 어찌 보면 순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가만두어도 자연히 붕괴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황. 이안은 작은 집무실을 어이없이 노려봤다.
저자는 대체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기에 영지 운영을 이따위로 한단 말인가? 어중이떠중이도 아닌, 벌써 몇 대째 내려온 가문이면서.
‘혹시 다른 돈줄이 있나?’
얼마나 오래 이리 경영했는지는 몰라도, 세금만으로 충당하기에는 상당히 빠듯해 보였다.
‘브라츠 쪽은 뭐 없을 텐데.’
짚었다시피, 변경 밖 천려족 땅과 인접한 브라츠 영지였다. 땅이 비옥한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다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억에 남을 만큼 중요한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면 선대에서 다른 귀족에게 영지를 나눠주지 않았겠지.’
선황은 천려족을 함께 물리친 귀족들에게 영지를 잘라서 하사했다. 중요 자원이 있으면 황궁에서 그랬을 리 없다.
달깍.
그때, 예고 없이 문이 열렸다.
백작 책상에 팔을 기대고 있던 이안은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며 마력을 쏟아냈다.
지이잉. 지잉.
“음?”
동시에 방안의 랜턴이 죄다 꺼져버렸다.
집무관 사무실도 마찬가지.
달이 구름 뒤에 가려져 있는 터라, 사방은 순식간에 어둠으로 잠겼다.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마력 랜턴 바꾼 지 얼마 안 되었을 텐데?”
“잠시만요. 초를 키겠습니, 으악!”
쿵!
집무관이 어딘가에 몸을 박았다.
이안은 달이 나오기 전, 슬그머니 기척을 숨기며 방 가운데로 움직였다. 데르가가 앞을 더듬거리며 제 책상을 찾았다.
“이안. 대답해라.”
“네. 아버지.”
어둠 속에서 이안의 목소리가 또랑또랑 울렸다. 소리로 보아, 소파 근처에 서 있는 것 같다.
“밖에 누구 없어?!”
초를 찾는다던 집무관은 계속에서 넘어졌고, 어둠은 가실 줄을 모르니. 데르가가 짜증을 확 부리며 소리쳤다.
지잉. 지이잉.
그러자 랜턴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숨을 고른 이안이 마력을 거둔 것이다.
데르가는 차분히 서 있는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압생트색 눈이 형형했다.
“괜찮으십니까?”
“······.”
백작은 책상 짚은 제 손을 내려다봤다. 서류가 좀 흐트러져 있었으나, 어둠 속에서 자신이 건드린 것이라 치부할 만했다. 그는 의심 없이 서랍을 열었다.
“되었다. 이리 와 받아라.”
“무엇입니까?”
손수 수를 놓은 작은 주머니였다. 데르가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가볍게 던졌고, 정확히 이안의 발치에 떨어졌다.
“네 어미가 주는 것이다.”
바닥에 널브러진 작은 주머니.
이안은 천천히 주워들었다.
“항시 그걸 보며 네 처지를 떠올리고 행동거지를 유념하라.”
해나를 통해 듣던 이안의 소식이 뚝 끊어지자, 어미는 자살을 시도했다. 살아서 만나지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만나겠다고.
그 돌발 행동에 백작은 어쩔 수 없이 타협점으로 서신과 선물을 전해주겠노라 한 것이다. 그녀가 죽으면 이안의 족쇄가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
해나가 마부를 통해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노라 빠짐없이 말해준 사실이었다. 평소 심부름 값을 후하게 쳐주었으니 거짓이 섞여 있진 않을 테다.
“그만 나가.”
데르가가 손을 내저었다.
이안은 낡은 주머니를 들고서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어두운 복도에 기대어 줄을 풀자, 잡다한 것들이 쏟아졌다.
쨍!
금화 다섯 개. 말린 꽃. 아주 작은 쪽지.
금화 하나는 평민이 한 달에 벌 수 있는 금액과 맞먹었다. 이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편지를 살폈다. 글씨가 정갈한 것이, 분명 누군가에게 대필을 부탁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처음부터 끝까지 어미의 진심만 담겨있을까?
‘아니. 데르가의 속내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있지. 편지를 바꿔치기했다든가…….’
이안은 금화를 만지작거렸고, 이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