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03
제703화. 베릭식 파훼법
멜라니아는 왕궁 벽에 걸린 초상화를 올려다봤다.
수백 년 동안 이어온 왕조는 끝났고, 이제는 홀린 가문의 이름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터. 금박으로 각인된 ‘런크비스’라는 왕가의 이름을 조심스레 매만지며, 그녀는 감회에 젖었다.
순간, 그 위로 자신의 일생 한 부분이었던 ‘하이만’이라는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하이만은 아직 죽지 않았다.’
자만도 아니고, 현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일곱 가문 숙청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신이 지금까지 버젓이 존재하지 않나. 그러니 아직 하이만은 죽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지만.
어쨌건, 가문을 재건하기 위해 멜라니아가 처리해야 할 문제들은 너무 거대한 것들이었다. 단 하나라도 엮였다간 모든 걸 잃게 될 만큼 중대한 사안들. 그것은 바로.
‘반역죄. 그리고 러더포드와의 연관.’
그러나 놀랍게도, 이 모두와 연관되었던 멜라니아는 살아남았다. 그것도 황제와 같은 성에 기거하며.
톡. 톡.
그녀는 시선을 차갑게 하며 런크비스 이름을 손끝으로 튕겨 댔다. 곧 있으면 바리엘과 토올룬 간의 전쟁이 발발할 터. 그리고 정해진 역사대로 바리엘은 승리할 것이다. 미래에서 온 황제, 이안의 존재가 그 증거였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 상황에서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전쟁은 기회다. 누군가는 파멸로, 또 누군가는 영광으로 이끌어.’
바리엘의 승리를 바탕으로 그녀가 행할 수 있는 일. 하여, 하이만가의 재건을 이루어 낼 방법. 절대적인 공로가 필요했다.
멜라니아는 메인 홀 쪽의 인기척을 알아채고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카일라 영애와 다니트 부인이 황제와의 알현을 마치고 나오는 중이었다.
‘저거다.’
들리는 말로는, 채굴한 마력석의 바리엘 운반 일을 홀린 가문이 맡았다지? 멜라니아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서 계단을 올라갔다.
마침 이안도 황제와의 만남을 마무리하고서 복도로 나온 참이었다.
“이안 경.”
“멜라니아.”
무슨 일? 이안의 얼굴에 의아함이 피어났다. 사실상 멜라니아의 존재는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되는 터라, 왕궁 내에서의 움직임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10년 전이라고는 하지만, 하이만 가문의 막내딸을 알아볼 자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알아본다고 한들 세상이 뒤집히는 건 아니고 그저 ‘소란’ 정도에서 그치겠지만, 괜한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나.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알 터인데.
하나 멜라니아의 표정은 결연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 걸으실까요?”
이안은 마법사들을 뒤로 물리며 멜라니아와 걸음을 맞췄다. 그녀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동쪽의 마법사, 제가 끌어오겠습니다.”
루스웨나 전쟁에서 마법사들을 위협했던 화총이 동쪽에서 건너왔음을 멜라니아는 알고 있다. 그러니 바리엘도 동쪽 마법사들과 교류를 트게 되면, 어느 정도 화총에 대한 대처법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안은 뜻밖의 제안에 놀란 듯 보였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떤 방법으로 말입니까?”
“방법은 아직 확실치 않지만, 수단은 정해졌습니다. 제 ‘핏줄’을 이용할 것입니다.”
핏줄.
이안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멜라니아의 핏줄은, 런크비스 가문의 처지와 상당히 비슷한 면이 있음을.
‘무엇보다, 멜라니아는 바리엘의 귀족이자 루스웨나 왕가의 먼 혈족이다.’
서자 이안과 멜라니아가 처음 만났던 것도, 멜라니아가 루스웨나 왕족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브라츠를 방문했을 때였지 않나. 하이만 숙청 당시, 루스웨나 왕족의 핏줄이라는 빌미로 이리저리 이용되기도 했고.
분명 쓸모가 있다. 하지만 이안은 냉철했다.
“하나 멜라니아. 그대가 1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갑자기 나타나면 도리어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소용없다는 뜻이다. 엘바사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10년 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왕족의 먼 핏줄이 갑자기 나타난다고 한들 무슨 힘을 보이겠나? 차라리 뒷수습은 클리포포드에게 맡기는 게 옳았다.
그러나 멜라니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홀린 가문처럼 저를 선전의 대상으로 사용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몰락한 루스웨나를 두고서 하완의 견제가 걱정되는 현시점, 제가 직접 하완으로 넘어가 동쪽 마법사들의 행방을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듣기 좋은 말이나,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하완에서 멜라니아의 존재를 알게 되면 어찌 나올까? 바리엘은 반역자를 완벽히 처단하지 못했다는 오점을 남길 것이고, 하완은 루스웨나 왕족의 핏줄을 ‘우선이나마’ 손에 쥐게 되었다는 이점을 얻게 될 터다.
어찌 될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정세. 멜라니아의 존재는 하완에게 있어 안개 속 그들이 잡을 수 있는 동아줄과 같다.
“필시 수월할 것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마법사들이 진입하거나, 클리포포드와의 무력 충돌로 길을 트는 것보다 훨씬 말입니다.”
“…….”
“이안 경. 저를 아시지 않습니까. 클라크가 제자리를 찾기 위해 북진한 것처럼, 저 또한 제자리를 찾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임을요. ”
잘 해낼 수 있습니다. 10년 전, 살아남기 위해 흙바닥을 구르고 굴렀던 저를 잊으셨습니까.
멜라니아가 이안의 앞을 가로막으며 허리를 숙였고,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아직 그녀는 모른다. 미래, 자신이 황제였던 시절의 바리엘에, 하이만이라는 이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무엇을 바라는지 아실 줄로 믿습니다. 이안 경, 저는 바리엘의 귀족입니다.”
반역죄로 멸문한 가문의 생존자가 이르기에는 상당히 오만한 대답이었으나, 방도가 없다. 지금 그녀가 이를 수 있는 최선의 맹세였으니.
“좋습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클라크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멜라니아 영애, 황궁은 당신의 여정을 돕지 않을 것이고, 배후 의혹에 대해서도 부인할 것입니다. 당신의 존재 자체 또한 마찬가지.”
“물론입니다. 그것이 지금의 저이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저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법이지요.”
“그리고 그대가 무엇을 희망하든, 확답할 수 없습니다.”
가문의 재건? 미안하지만, 진의 시대에서는 절대 불가한 사안이다. 황제의 얼굴을 가르는 상처의 원흉이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음에 이른 사건이었으니까.
멜라니아는 이안의 언질이 어딘가 묘하다는 걸 알아챘다.
‘확답할 수 없다라.’
자신이 아는 이안이라면, 이리 말했을 것 같다.
‘어떤 공로를 세우든, 재건은 불가합니다.’
멜라니아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반짝였다. 미래, 이안이 황제인 바리엘에서는 하이만이라는 이름이 존재하는 걸까? 자그마한 희망을 품어도 되는 걸까?
“…확답, 없어도 괜찮습니다. 제 운명은 제가 정하겠습니다.”
멜라니아는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이안에게 인사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왔던 길을 돌아갔다. 황궁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여 여정에 지장이 있진 않을 것이다. 홀린 가문이 바리엘 쪽으로 가는 호송단을 꾸린다고 하니까. 그들은 버고스의 신왕조인 동시에, 무기 팔아먹던 사업가 가문. 거래를 할 수 있을 게다.
멜라니아가 사라지자, 마법사들이 수군댔다.
“멜라니아 영애, 되게 즐거워 보이네요.”
“기질인 거지, 뭐. 폭풍 속으로 몸을 내던져야 살아 있음을 느끼는 그런 거.”
“아코렐라 대장 같네요. 거침없는 게.”
“무슨 소리. 오히려 대장은 연구 때문에 몸 사리는 쪽에 가깝지. 정치, 파벌, 아무것도 관심 없잖아.”
그런가? 마법사들은 턱을 긁적거리며 이안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안 님, 베릭 놈, 잘 하고 있을까요?”
“황궁친위대에서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던데요. 세드릭이라는 수습 마검사 딸려 보낸 것도 그렇고.”
“뭐…….”
걱정이 아예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안은 이성보다는 경험을 믿기로 했다.
“매번 걱정을 일으키긴 하지만, 베릭은 임무에 실패하는 법이 없으니까.”
“네?”
정말? 그런가? 마법사들이 아예 걸음을 멈춘 채로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라자산에 있던 이안 님을 찾아온 것도 베릭, 북쪽 대마물의 습격 때 활약한 것도 베릭, 러더포드를 잡은 것도 베릭, 어디 나갔다 하면 중요 단서를 물고 왔던 것도 베릭…….
“이상하네.”
“상당히 저평가되어 있어…….”
“이래서 평소 행동거지가 중요하다고 하나 봐. 세상에.”
놀랍다! 마법사들은 새로운 마법진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어댔다. 객관적인 공로로만 따지면, 차기 대장감이나 다름없지 않나? 소름 돋을 정도로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이안은 피식 웃으며 그들을 지나쳐 걸었다.
“출정 준비에나 집중하도록. 이번 전쟁도 단번에 끝낼 것이다.”
루스웨나를 밀어 버렸던 것처럼, 그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잿더미로 만들리라. 이안의 지시에 마법사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으아뵤! 차핫! 찻!”
타오마의 기합은 꽤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공격만큼은 신기할 정도로 잘 먹혔는데, 이는 베릭과 세드릭처럼 신관들도 그의 무기를 처음 봤기 때문이다. 사슬로 이어 붙인 몽둥이가 이렇게나 강력할 노릇인가?
촤악! 퍽!
날아드는 검을 사슬로 꼬아 던져 버리는 것도 모자라, 공격자의 안면을 빠르게 타격한다. 제멋대로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타격의 정확도가 상당했다.
타악! 탁탁! 탁!
“아호오-!”
촤아악!
신관 서넛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자, 베릭이 가볍게 박수 쳤다. 대체 호위를 왜 부탁한 건지 모르겠네.
“혼자서도 잘 하잖아. 괜히 바쁜 사람 도와달라 하고 말이야.”
“신관이잖아, 신관! 무인들 상대론 어림도 없는 실력일세. 크흠. 으하핫! 그래도 좀 치지?”
“흠, 신기하긴 해. 나도 해 보자.”
“안 돼!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이래 봬도 바다 건너온 거라고 두 배 값이나 줬다고.”
“알 바임? 줘 봐아!”
베릭과 타오마가 쌍절곤을 두고서 옥신각신 다투자, 남아 있던 신관들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덩치 있는 놈은 알 수 없는 무기를 사용하고, 나머지 두 놈은 어딘가 모자라 보이지만 어쨌거나 마검사.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신전 안, 결계 안으로 돌아가 상황을 전달하고, 대신관님의 도움을 받는 게 좋아 보였다.
“후퇴!”
타닥타닥!
누군가의 외침에, 다들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 튄다.”
어쩌지요? 세드릭은 어정쩡한 자세로 베릭을 돌아봤고, 타오마와 에이린 역시 그의 ‘지시’를 기다렸다.
얼떨결에 대장 노릇을 하게 된 베릭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손을 대충 내저었다.
“도망가게 내비둬. 어차피 가 봤자 이 근처 아님?”
“신전 주변으로 결계가 있습니다. 들어가기 쉽지 않을 거예요.”
“아, 그래?”
“그리고 서신을 전해 줬던 바누사 말입니다. 뭔가 바리엘의 도움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신전에 억류되어 있는 것 같던데, 어쩌면 우릴 도와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에이린의 ‘보고’에, 베릭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흐음. 보자보자…….”
결계라…. 이내 베릭은 이안과 함께 루스웨나 국경선 넘을 때를 기억해 냈다. 땅속에 뭔가를 박아서 경계를 그었던 것 같은데…….
오케! 그럼 되겠다. 베릭의 양손에서 붉은 마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지이잉. 지잉!
“타오마. 일단 마을까지 데려와 줬으니까 우리 임무는 여기서 끝이다. 그림 찾는 건 알아서 하고 있어 봐.”
“뭐 하게? 그러지 말고 같이 찾아 주지?”
“안 돼. 바빠바빠. 에이린, 그쪽은 내 뒤로 바짝 붙어.”
“알겠습니다!”
“세드릭, 너는-”
베릭이 붉게 타오르는 대검을 어깨에 걸치며 씩 웃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득거렸다.
“잘 보고 배워라, 꼬맹아.”
타앗!
촤아아악!
베릭은 순식간에 발돋움하여 수풀 속으로 달려들었다. 도망간 사냥감을 쫓는 맹수와 같다. 뒤이어 에이린이 있는 힘껏 그를 따랐고, 세드릭도 지지 않겠단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뜀박질했다. 타오마만이 덩그러니 남아, 기절한 신관 멱살을 잡아 흔들 뿐.
잠시 후, 추격을 감지한 신관들이 소리쳤다.
“쪼, 쫓아온다!”
“서둘러!”
하지만 절대 모를 것이다. 베릭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쫓고 있다는 걸.
그렇게 한참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가자, 신전 결계가 나타났다. 신관들이 결계 쪽으로 손을 뻗는 순간.
“오케이.”
지이잉! 퍼어엉!
베릭의 붉은 대검이 거대한 불길을 일으키며 주위를 모조리 태워 버렸다. 화염 폭풍이 일며 뜨거운 바람이 마구 휘몰아쳤다. 불길에 닿는 모든 것이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했지만-
“아주 잘 보이고요.”
결계 안쪽은 여전히 푸릇푸릇했다. 마치 대지 위에 선을 그어놓은 것 같다.
베릭은 결계가 거대한 반원 구 형태라는 걸 알아채고는 눈짓으로 가늠했다. 보호막 형성기? 여기 어디쯤 있을 텐데? 에라, 모르겠다.
“여기 결계 따라서 다 날려 버리면 되겠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