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09
제709화. 벽 뒤로 일렁이는
사람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었다.
라주 대신관과 러더포드는 현재의 시간선을 산다고 하기에는 너무 긴 시간을 살아왔으며, 인간에게 허락된 하나의 육신을 넘어 기억조차 못 할 만큼의 무수한 삶을 살아왔다.
거기다 신의 양지가 아닌 그림자의 음지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고 있으니, 이것이 마물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스윽.
이안의 외침을 들은 라주 대신관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백색의 관복은 구겨짐이 없었고, 이목구비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마법사들을 살폈다. 한 놈, 두 놈, 세 놈…. 어떠한 덧붙임도 없었으나, 머릿수를 세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노골적이라 재수 없군.”
“예, 그렇습니다. 대장.”
“뭘 봐, 인마? 당장 저 오수나 멈춰라!”
헤일과 토미, 나키나가 동시다발적으로 대신관에게 따지고 들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이안에게 온 시선과 감각이 집중된 터라 듣지 못했다는 게 옳을 것이다.
“그래, 그래. 긴 시간이었지…….”
그는 몸을 천천히 돌리더니,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 움직임을 따라 이안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아무래도 이곳은 단순히 함정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닌 듯싶다.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 아닐까? 손때가 은근히 타 있는 가구들로 하여금 그리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앉지.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상황과 맞지 않는 권유다. 베릭은 바로 이를 드러내며 이안에게 속삭였다.
“이안아, 안 돼. 가까이 가지 마. 저 새끼 환각쟁이다.”
이미 보고를 받아서 알고 있다. 손끝을 튕기는 것만으로도 베릭의 정신을 완전히 헤집어 놓았다고.
하지만 동시에, 환각에서 벗어나는 방법 또한 쉽다는 것도 인지했다. 어떠한 물리적 반응 없이, 클라크의 부름만으로 베릭이 제정신을 차렸으니까.
달그락.
라주 대신관은 테이블 위에 놓인 티백을 찻잔에 넣으며 웃었다. 붉게 퍼지는 액체. 베릭은 어디선가 맡아본 냄새인지라, 코를 연달아 킁킁거렸다. 아, 이거-!
“네 어미의 일은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다.”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이안이 손을 가볍게 뻗으며 이드갈 검을 생성해 냈다.
“진작 이곳으로 왔더라면 의미 있게 죽었을 것인데. 안 그런가?”
초라한 들판에서, 자아 없는 누군가에 의해 죽을 바에는 말이다.
이에 이안은 이드갈 끝으로 바닥을 질질 끌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베릭이 뒤에서 다급히 속삭였다.
“이안아, 저거 라로메디아다.”
저 새끼가 홀짝거리고 있는 거, 분명히 그걸 타 섞은 거라고!
하지만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그는 물론이고 주위를 둘러싼 신관들도 미동하지 않았다. 마치 하나의 조각상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나의 어머니는 그 누구보다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셨다. 네놈은 헛된 걱정 말고 스스로의 운명이나 가엾이 여기거라. 다만 괜한 말을 놀려 고통을 늘리고 싶다 하면, 내 말리지 않지.”
“하하하! 하하!”
대신관의 웃음은 공간을 요란하게 울렸다.
뭐랄까. 이건 단순한 소리의 울림이 아니다. 이안은 파동을 온몸으로 느꼈고, 이자의 몸속에 무언가 다른 게 존재하고 있음을 짐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러더포드는 인두겁을 수없이 바꿔 가며 존재했지만, 라주 대신관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대신관이라는 모습으로만 존재했다. 혹 그 외형조차 바뀌지 않은 것이라면, 저 안에는 분명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들어 있을 터.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네놈이 그걸 정의할 수 있다 여기는가? 사막의 별을 보며 죽어 가던 야만족의 시체나, 금빛 머리칼을 피로 물들인 네놈 어미의 시체나 지금은 흙과 섞여 썩어 가고 있는데. 그 누가 그런 것들을 보고 의미가 있다 여기겠는가?”
“기어코 선을 넘는군.”
타앗!
이안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이드갈 검을 휘두르며 날아들었다.
이에 더하여 베릭과 헤일, 토미, 나키나도 전투 자세를 취하며 이안의 뒤를 따랐다. 혹여 사각지대에서 공격이 날아오면 이안을 대신하여 쳐내고, 이안에게 지지대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무릎을 내줄 요량으로.
촤아악!
티잉-!
하지만 그들은 이내 침묵하여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라주 대신관이, 앉은 자리에서 이안의 검을 막아낸 것이다. 베릭에게 그랬던 것처럼, 손끝만으로.
“……!”
이안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허공에서 머무른 그 찰나의 시간. 검 끝과 손끝이 맞닿은 지점에서, 굉장히 묵직한 힘이 맞물린 것이다.
타앗!
이안은 반동을 이용하여 곧장 뒤로 물러섰고, 베릭은 별거 아니라는 듯 코를 문질러 댔다.
“괜찮아, 이안아. 쫄지 마. 나도 그랬어. 근데 저 새끼 별거 아님. 진짜로.”
“너도 느꼈단 말인가?”
“뭐를? X같음을?”
베릭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라주 대신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고맙다. 그리고 진심으로 환영한다. 이리 제 발로 여기까지 걸어와 줄 줄은 정말이지 몰랐거든. 거기다 마법사들까지 데리고서 말이지. 조금 격이 떨어지긴 하지만, 어쨌거나 ‘신과 가까운 자들’ 아닌가? 신성함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라주 대신관은 베릭을 보며 덧붙였다.
“물론, 너는 필요 없단다. 천박한 검사여.”
“뭐래, 시발. 나도 너 필요 없어. 더러운 사이비 새끼.”
‘신과 가까운 자들’. 그리고 신성함. 이안은 라주 대신관의 말에서 그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게 뭔지 알아챘다.
“…그래서 그랬군.”
서자 이안은 신의 분신. 지하신에게 바칠 제물로서는 아주 제격이다. 그림자는 신의 자리를 넘보는 자이니까, 당연지사 신의 분신을 흡수하면 그 힘을 키울 수 있을 터.
“검은 씨앗으로는 부족했나?”
바리엘 황가나 버고스 왕가에 숨어들어 ‘귀한 피’를 꾀어내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던 게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다몬 왕의 혈육들이 마산타르 신전으로 넘어왔다곤 하나, 신의 근간을 이루는 바리엘의 황족만 하겠는가? 아르센을 통하여 진을 처리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이에 합당한 다른 제물들을 계속 찾아왔으리라.
‘서자 이안. 게다가 황가의 축복을 받은 영혼. 내가 제일이긴 하나, 쉽지 않았겠지.’
바리엘의 마법부 장관을 저들이 어찌하겠나.
그래서 필리아가, 그리고 로엘이 마산타르 신전의 목표가 된 것이다. 그 두 사람은 서자 이안과 피를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네놈이 그리 이르니 더더욱 확실해진다. 어머니가 옳았어.”
그 자리에서, 로엘을 지키고 난 후 죽은 것이 말이다.
마법사들의 가호 아래 죽었기에 그녀의 시신은 온전히 보호받고 있다. 이런 곳에서 지하신의 발판이 될 바에는 그것이 낫다는 걸, 어머니는 진작 알고 있었던 걸까.
“기꺼이 죽어라. 신의 조각들이여. 네놈들은 우리의 신을 이루는 조각이 될 것이다.”
스으윽.
라주 대신관이 두 팔을 크게 뻗었다. 그러자, 그의 뒤로 난 유리 벽에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물속에 뭔가가 있다.
“이, 이안 님!”
“시발, 이안아! 저게 뭐, 헉!”
거대하다. 너무도 거대하여, 유리 벽 너머의 바다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의문의 검은 물체는 유리 벽 쪽으로 가까이 붙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왜 저러는 거지?”
“이안 님, 뭔가 낌새가 심상치 않습니다.”
헤일이 말린 궐련을 또각 부러트렸다. 어지간해서는 끝까지 물고 있겠는데, 저건 뭐…….
“다시 돌아와서 반갑나?”
히죽히죽, 라주 대신관이 유리 벽에 등을 기대며 웃었다. 그러자 그의 뒤로 거대한 물고기가 주둥이를 쩌억 벌리며 모습을 온전히 보였다. 톱니바퀴 같은 이빨과 수십 갈래로 갈라진 혀, 그리고 사람의 눈이 달린…….
“마물.”
“생선.”
마법사들과 베릭의 평가가 조금 갈렸지만,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쿵! 쿠웅! 쿵!
마물이 온몸으로 유리 벽에 돌진하여 부딪쳤다. 거대한 진동이 울리고, 천장이 곧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놈은 지금 저걸 깨고 나오고자 하는 게다.
촤아아악!
이안은 재빨리 자세를 낮춰 라주 대신관에게 덤벼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놈이 ‘저것’과 감응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여기서 물이 쏟아지면 상당히 곤란하기에, 정신을 잃게 만들어 생포하는 것이 우선이다.
지이잉! 지잉!
퍼어어엉!
「기속(羈束)」.
이안의 두 눈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순식간에 주위로 빛이 퍼졌다. 캄캄한 어둠 속, 기하학적인 무늬가 사방으로 끝도 없이 펼쳐 나갔고, 이내 저 멀리 천장까지 올라간 다음 라주 대신관의 머리 위에서 모여들었다.
솨아아악!
“진동이 크군.”
콰앙! 쾅!
하지만 라주 대신관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구속 마법을 여유롭게 피했다. 그때쯤 되자, 조각상처럼 서 있던 신관들이 기합을 내지르며 이안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미친것들이!”
그들은 이안 일행을 죽이고자 덤벼드는 게 아니다. 그저, 온 힘을 다하여 붙드는 게 다다. 나키나는 귀찮다는 듯 주먹과 발차기를 연달아 해 대며 이안에게 소리쳤다.
“이안 님! 의도가 빤합니다! 우선 나가시지요! 여기서는 큰 힘을 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였다. 유리 벽에 한쪽 손을 올린 라주 대신관이 크게 외쳤다.
“궁금하지 않은가?! 크로니, 그자가 과연 검은 씨앗이었을지.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는지!”
“……!”
크로니. 그 이름을 단박에 알아챈 건 베릭이었다. 황당하고 분하여 피가 확 솟구쳤다. 이안이 멈칫거리는 사이, 베릭이 앞장서서 놈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너 이 시발 새끼가! 어디서 그 이름을-!”
“그렇다면 보아라! 어디 한번 마주해!”
“닥쳐, 시바아알!”
“베릭!”
쿠웅! 쿵!
베릭의 고함에 흥분하기라도 한 것처럼, 마물이 더욱 크게 날뛰었다. 이에 라주 대신관이 다시금 손끝을 들어 올리자, 베릭은 방향을 전환하여 놈의 손가락을 베어 버렸다.
촤아악!
“아아악-”
그리고 연달아 목을 베려고 자세를 고쳐 잡는 순간, 베릭은 쩍 벌린 라주 대신관의 치아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인지했다. 유리 벽 너머, 저 마물과 비슷한 치아의 형태. 베릭은 눈썹을 움찔거렸다.
“하하하학!”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이 시발 새끼가 처웃고 있다. 베릭이 놈의 멱살을 잡아끌어 벽으로 밀어붙이자,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쩌어억!
유리 벽에 금이 간 것이다.
그 틈으로 물이 조금씩 흘러나왔고, 이안은 그 모든 걸 가만히 지켜봤다. 그러고는 마법 전언으로 신전 안에 흩어져 있을 마법사들에게 지시했다.
“다들 당장 신전 밖으로 나가라.”
“이안 님! 이안 님은요?”
토미가 귀 한쪽을 누르며 소리쳤다. 곁에 있음에도, 이안의 음성은 너무 먼 곳에서 날아오는 듯했다.
“나가서 기다려.”
심연의 바다, 시간선이 다름을 이제는 잘 알고 있으니 이전처럼 늦지 않을 게다. 이안은 자신의 몸 주위로 보호막을 생성해 냈고-
지이잉! 지잉!
라주 대신관을 보며 웃었다.
“꽤 흥미로운 미끼를 던졌어.”
크로니. 자신의 운명 그 시작점에 있는 검은 그림자.
이안은 로브를 벗어던지며 이드갈 검을 쥐었다. 그 순간-
콰지지직! 콰아앙! 펑!
유리 벽이 완전히 무너지며, 그 안에 있던 것들이 모조리 쏟아져 내렸다. 푸르게 일렁이던 물도, 그 안에서 주둥이를 쩌억 벌리며 달려들던 거대한 마물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