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1
제71화. 물밑 작업
이안은 창밖으로 손을 뻗었다. 습했던 바람이 점차 건조해지고, 차가운 기운을 물씬 품고 있었다. 뜨겁고 치열했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려는 순간이다.
똑똑.
“주인님. 일어나셨습니까?”
“그래.”
“식사를 들이겠습니다.”
황궁에서 작위임명장이 내려온 이후, 이안의 처지는 확실히 견고해졌다. 일상생활은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 없다만, 사소한 부분에서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예컨대, 지금 저를 부른 저 ‘주인님’이라는 호칭.
‘재미있군.’
일전에는 그래도 공작가에서 태어나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던 몸인데, 지금은 자작이라는 작위 하나로도 큰 산을 넘은 기분이다.
이안은 로만드로의 맞은 편에 앉으며 식사를 준비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로만드로 님.”
“아, 이안 경. 잘 주무셨는가?”
“덕분에요. 미지근한 물 좀 주게.”
“네. 주인님.”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로만드로는 작은 접시에 놓여있는 굴라 씨앗을 까먹으며 말문을 떼었다.
“그리고 이안, 정리할 것이 하나 있는데.”
“무엇 말씀이시죠?”
“황궁에서 갖고 온 지원금 말일세.”
“아.”
금화 3,000닢 정도 되는 액수. 하지만 영지 복구와 굴라 구매로 인해 꽤 많은 지출을 한 상태였다. 앞으로 나갈 일은 더 많겠지만 말이다.
“남은 지원금은 다시 귀속하는 게 관례 아닙니까?”
“그렇긴 하다만, 말 그대로 관례 아닌가.”
로만드로의 재량에 따라 그걸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장부를 처리하여 이곳, 정확히는 이안의 주머니에 넣어주겠다는 것.
이안은 놀라며 눈썹을 크게 올렸다.
“그래 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지요.”
“아니. 생각해 봤는데, 이게 맞는 것 같네. 여러모로 자네 공이 커. 굴라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당장 3,000닢은 일회성으로 날아갔을 걸세. 자네라면 더 의미 있게 쓸 거라 믿어.”
“감사합니다. 유의하겠습니다.”
“또, 겨울 중으로 올라가게 해주어 고맙고. 흐음.”
“신혼이라고 하셨나요?”
“얼마 전에 소식이 왔는데, 애를 가졌다는구먼.”
뜻밖의 소식에 이안이 박수를 쳤다. 식기를 옮기던 사용인들도 듣고서는 한마디씩 축하 인사를 던졌다.
“축하드립니다. 로만드로 님.”
“아버지가 되셨군요. 축하드려요.”
“출산은 언제랍니까?”
“내년 여름으로 예상하네.”
“와아. 축하드려요.”
로만드로는 쑥스럽다는 듯 수염을 매만지며 웃었다. 얼굴에 미소가 환하게 물드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란 저런 건가 싶기도 했다.
“지원금과 내역서는 집무실에 있습니까?”
“그러하네. 식사 마치고 바로 넘겨주지.”
“네. 알겠습니다.”
이안은 머릿속으로 얼추 재무를 계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이 맞는다면 남은 지원금은 금화 1,200닢 정도. 브라츠 저택에서 돈이 될 만한 건 조사단에서 몰수했으니 그게 다라고 보는 게 맞을 거다.
“그런데 카칸과 네르사른은?”
“어제 접경지 관측대로 나가셔서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별자리를 본다고 하셨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이안은 단박에 의도를 알아차렸다. 대사막을 연구하던 가정교사도 그곳을 꼭 들르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잘은 모르겠지만, 천측을 통해 대사막을 파악하는 저들만의 학문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돌아오면 내 잠시 보고자 한다고 전하라.”
“네. 알겠습니다.”
“이안 님, 메렐로프에서 서신을 보내왔는데요.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라 할까요?”
아침부터 들려오는 소식이 많다. 이안은 삶은 굴라를 반으로 자르려다 멈칫거렸다. 로만드로 역시 마찬가지. 입을 와앙 벌리고 먹으려다 뚝하고 멈췄다.
“아니. 들라 하여라.”
이안의 명령에 문이 다시금 열렸다. 나름 깔끔하게 차려입은 시종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메렐로프 백작님과 백작 마님의 취임 축하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그래? 다른 말은 없으시던가? 순서가 좀 이상한데.”
암살 시도에 대한 항의서가 먼저 갔거늘, 어째 그건 입 싹 닦고 축하 서신을 먼저 보냈냐는 의미였다.
시종이 난감해하며 대답할 말을 찾자, 이안은 되었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 위로 고급스러운 서신이 올려졌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래. 고맙네.”
“그리고 마님께서 보내신 선물이 있습니다.”
이안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뒤에 놓인 상자를 쳐다봤다. 첫인상부터가 특이했던 여인인지라,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걸 보냈을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인이 뚜껑을 여는 순간.
이안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국에서 들어온 기록장치입니다.”
“기록장치?”
물은 것은 로만드로다. 이안은 천천히 다가가 기계를 자세히 뜯어볼 뿐이다.
작은 나무 상자 안에 복잡하게 들어서 있는 톱니바퀴. 그 아래에는 종이를 끼울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옆에는 작동을 위한 손잡이가 달려있었다.
“이게 뭔가? 어디에 쓰는 거지?”
“사실 사용 방도는 알려진 것이 없고, 명칭은…….”
이안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드리퍼.”
“마, 맞습니다. 드리퍼라 하셨습니다.”
“오, 이안 경. 이것을 아는가?”
알다마다.
드리퍼란 일종의 자동기록장치였다. 손잡이를 잡아당기는 시간적 간격마다 자동으로 점이 찍히는 기계였는데, 쓸모없어 보여도 훗날 자동공정기계의 초석이 되는 발명품이었다.
이안이 죽기 직전까지 진행되던 대국가 프로젝트 중 하나였으며, 분명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킬 만한 미래 혁명 기술로 연구되던 분야 중 하나였다.
“여, 역시 이안 님이십니다! 박학다식하여 모르시는 게 없으시군요!”
이안은 한껏 어색한 아부를 가볍게 무시했다.
“이걸 메렐로프 부인이 보냈다고?”
“그, 그렇습니다.”
“무어라 하며 보내셨는가?”
“분명 이안 님께 도움이 될 것이고, 음, 귀한 것이지만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 하셨습니다.”
시종은 그 말을 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창고에서 처음 꺼냈을 때, 먼지가 너무 쌓여서 닦아내느라 대여섯 명이 고생했다. 그만큼 메렐로프 저택에서는 그 누구도 신경 안 쓰는, 애물단지 고철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물 먹이려고 보낸 선물이 아닌가?’
먹지도 못할 거, 그저 일정한 간격으로 점만 찍어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이안의 반응이 심상치 않은 것으로 보아, 뭔가 이상하게 진행되는 것 같다.
“하!”
이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닌가? 물 먹인 거 맞나?
아는 게 없는지고,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다. 시종은 불똥이 튈까 봐 한껏 허리를 조아리며 시선을 깔았다.
이안은 마른 눈으로 기계만 봤다가, 그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미묘한 한숨만 내쉬었다.
“이안 경, 일단은 앉지. 앉아서 고민하자고.”
보다 못한 로만드로가 슬쩍 일어나 이안을 달랬다. 모욕적인 선물이라 여긴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누가 보더라도 그것이 맞았다. 이안의 시대로부터 100여 년 전인 지금, 드리퍼의 디자인은 볼품없었으며, 기능은 간결했고, 인식이랄 것도 전혀 없었다.
혹여 지금의 황제라 한들, 드리퍼의 가치를 알지 못하리라.
“드리퍼 이거, 라자산에서 온 물건임은 알고 있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네. 잠깐 기다리지. 내 부인에게 답신을 써야겠다.”
이안은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냅킨을 아예 접어버렸다. 식사를 마치겠다는 신호였다. 로만드로가 당황해서 기계와 이안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제 메렐로프에 굴라 작업을 본격적으로 들어갈 것인데, 이런 도발과 대응은 계획에 없던 일이다.
“뭐, 뭐라고 쓸 건가?”
“선물 아주 잘 받았다고, 말씀하신 대로 유용하게 쓸 것 같다고요. 그러니 한번 뵈었으면 좋겠다 전하려 합니다.”
로만드로는 끄응, 앓으며 턱을 매만졌다. 그가 보기에는 날을 세운 듯한 공격을 주고받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이안은 손끝으로 쩍쩍 갈라진 나무 틈을 매만졌다. 드리퍼가 가져올 가치와 미래를 헤아리는 것처럼.
‘확인해 봐야겠다.’
메렐로프 부인이 진정으로 볼품없는 선물을 보낸 것인지, 아니면 그녀 또한 드리퍼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인지.
이안은 해나에게 눈짓했다.
“식사를 마무리하겠다. 이건 잘 보관해 두어라. 그 누구도 손대게 해서는 안 된다.”
“아, 네네. 알겠습니다.”
“로만드로 님. 식사 마저 하십시오. 저는 답신을 쓰고 잠시 시찰을 다녀오겠습니다.”
“아, 으응. 그래. 그러겠네.”
이안은 그대로 식당을 나섰고, 이내 답신을 받은 메렐로프의 시종 역시 브라츠를 떠나갔다. 이안이 시찰을 나간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후였다.
“자작님. 오늘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그래. 날씨가 점점 선선해지는군.”
하루가 다르게 싹이 오르는 굴라를 확인하던 참이었다. 낙엽 지는 나뭇잎들과 달리 영지에는 파릇파릇한 이파리가 가득했다.
“오늘 굴라를 수확하려 합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뒷집 메건은 어제 씨앗 분류 작업에 들어갔다 하던데요. 이쪽이 굴라와 토질이 잘 맞는지, 아주 쑥쑥 자랍니다. 자고 일어나면 한 뼘씩 커져 있어요.”
“그거 다행이군.”
영지민들의 창고가 풍족해지면서 영지 내 굶주림이 사라지고 있었다. 매시간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아이들 역시 주머니에 찐 굴라를 한가득 넣고 뛰어다녔으니.
“아저씨! 아저씨! 돼지가 새끼 밴 거 맞아요!”
“그래? 맞지? 그놈 아침부터 골골댄다 했다.”
꾸에에엑!
가축들 역시 마찬가지다. 금세 살이 오르고 새끼를 뱄다. 아마 이런 식으로 가면 겨울에는 그 누구도 죽지 않고, 그 누구도 춥지 않게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 터.
“아, 카칸티르 님.”
저 멀리,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는 천려족 일행이 보였다. 쿠실레가 천천히 속도를 줄여 이안 옆에 섰다.
“오늘도 나와 있군그래.”
“마침 잘 되었습니다. 전달할 내용이 있는데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 그러면 우리 좀 걷지.”
앞서 걷는 두 사람 뒤로 부하들이 쿠실레를 천천히 몰았다. 베릭 역시 마찬가지. 친한 전사와 장난을 치며 말고삐를 끌어당겼다.
“나는 내일 중으로 먼저 천려로 돌아갈 것이네.”
“내일이요?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네르사른을 두고 갈 것이니 걱정할 것 없지.”
“천려에 일이 생겼습니까?”
“그건 아니고, 별자리 점을 쳐보니 내일이 적당한 시점인 것 같아 그리 정했네.”
카칸티르가 떠나가면 전사들 절반 이상이 빠져나갈 것이다. 하지만 영지도 어느 정도 자생력을 갖추었고, 굴라 재배 외에는 크게 노동력 필요한 부분이 없었으니 문제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저도 배웅 준비를 해야겠군요.”
동맹의 수장이 돌아가는 것이니, 예를 다하는 게 도리였다. 게다가 천려에게는 사례금이라는 명목으로 줄 것도 있었다.
“자네가 할 말이라는 건?”
“아. 아까 저택에 메렐로프의 시종이 왔습니다. 슬슬 물밑 작업을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요.”
“아아. 그래.”
이안이 말하는 물밑작업이란, 메렐로프에서 굴라를 구매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카칸티르의 말에 이안이 걸음을 멈추었다.
“메렐로프에서 비빌 언덕이라고는 추운 날 들어오는 대상단뿐인데, 그쪽만 처리하면 일이 쉬워질 것 같습니다.”
“음. 하완 왕국에서 들어오는 자들이지? 산맥 쪽은 가본 적이 없어서 지리적으로 불리하네. 그렇다고 불가능은 아니지만.”
대상단의 규모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분명 호위를 위한 용병도 다수 있을 터. 무력으로 밀어붙이는 건 효율적이지 못한 방법이었다.
“아니요. 전투는 안 됩니다. 천려가 개입했다는 걸 들켜서도 안 되고요. 여차했다간 메렐로프에 빌미를 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상단의 안전을 책임지는 메렐로프 입장에서는 천려족이 위협하면 당연히 반격하려 들것이다. 이는 천려족과 동맹을 맺은 이안에게도 부담이 되는 상황이다.
“생각해 둔 방법이 있나?”
카칸티르의 말에 이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처럼 자신만만하게 반짝이는 눈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