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11
제711화. 이안의 어둠
“아니, 다들 자고 있으면 어째?”
투욱. 누군가 종이 더미를 가볍게 내려놓았다.
헤일은 그 작은 기척에 눈을 떴고,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봤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공간. 분명 마법부였으나 구조가 조금 달라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앞의 마법사는 처음 보는 자다.
헤일은 자신이 팔짱 낀 채 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뭐지? 여긴 어디지? 설마, 꿈속인가?
“어제 회식이라도 했어? 누워 있을 거면 일 처리나 다 하고서 누웁시다. 곧 있으면 결재 마감인데, 이러면 곤란해.”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고개를 드는 토미와 나키나. 두 사람도 혼란스러운 낯빛을 보이더니 이내 조심스레 일어났다. 처음 보는 마법사는 세 사람을 깨운 뒤, 볼일이 끝났다는 듯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덩그러니 놓인 세 사람. 그들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래요?”
“나도 모르겠다. 방금 눈뜨니 여기였어.”
“헤일 대장, 어디까지 생각나요? 이거 꿈 아니지?”
“…….”
세 사람은 서로를 가만히 살피더니 동시에 손을 들어 올렸다. 준비됐나? 오케이, 가 보자고!
짜아아악-!
헤일은 토미의 뺨을, 토미는 나키나의 뺨을, 나키나는 헤일의 뺨을 동시에 후려쳤다.
“아오, 시발. 토미 너 이 새끼, 감정 실었지?”
“아파 죽겠습니다. 적당히 좀 때리시지.”
“나키나에게 맞는 것보다는 나을 게다.”
그들은 화끈거리는 볼을 붙잡은 채로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종이의 질감, 햇살의 따스함, 멀리서 들리는 인기척, 누가 먹다 남긴 육포 등등…. 모든 게 현실이었다. 그들은 의자에 주저앉아 황당한 투로 중얼거렸다.
“방금까지 마산타르 신전이었는데.”
“라주 신관의 피에 잠긴 것이 마지막 기억입니다.”
“나도 그렇다.”
“이안 님이 그러셨잖습니까. 심연의 바다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고. 혹시 저희가 다른 시간대로 온 건 아닐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랬으면 방금 그 마법사가 저희를 ‘원래 있던 자’로 대할 리 없잖습니까.”
“그것도 그렇네. 그럼 여긴 대체…….”
헤일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젖지 않은 궐련갑이 들어 있었다. 그는 궐련을 입에 문 채 라주 신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환각술을 사용하는 자다. 라로메디아를 복용했고, 베릭을 손가락 하나로 산산이 조각내었다.”
“그럼 이게 다 환각이라고요? 믿기지 않는데요.”
“진짜면 여러모로 대단한 새끼네.”
우선은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심연의 바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안에게 들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복도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오가는 자가 없는지 살폈다.
“그럼 이안 님은 어디 계실까요?”
“나는 베릭이 걱정된다. 망할 망아지 녀석.”
“한번 나가서 둘러보죠. 황궁이니까, 이동하는 건-”
아. 잠깐. 말을 잇던 토미가 뭔가를 깨달았는지 멈칫거렸다.
“여기는 황궁이잖아요.”
“그렇지? 어디 뒷마을 마구간처럼은 안 생겼으니까.”
“라주 신관이 황궁을 알고 있을까요?”
“…뭐?”
“환각이라고는 하지만, 상황을 그리고 있는 건 ‘우리’입니다. 황궁을 겪어본 적 없는 자가 황궁의 환각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원인이 어찌 되었든, 이건 ‘우리’로 인한 현상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그리고 아까 이안 님이 그러셨잖아요. 심연의 바다에는 온갖 어둠이 있었노라고.”
“토미. 본론만.”
헤일과 나키나, 토미가 마법부 복도 가운데 쪼그려 앉아 속삭였다. 오가던 직원들이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마법사 로브를 보더니 납득하며 스쳐 지나갔다. 마법사들이 이상한 짓 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러니까 이건, ‘누군가의 어둠’을 기반으로 한 환각이라는 겁니다. 제 생각에는 이안 님일 가능성이 커요.”
“근거는?”
“…황궁에 어둠을 가질 만한 분은 이안 님밖에 없으니까요.”
흠…. 일리가 있는 것 같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헤일에게서 궐련을 건네받은 나키나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덧붙였다.
“근데, 여기가 진짜 황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환각이라면, 어딘가 심연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까?”
“오. 그럴듯합니다.”
“그치? 아까 마법사가 우리 깨우면서 준 서류 보니까 월간 계획서 알차게 적혀 있더구먼. 근데 문제는 심연 관련 자료를 과연 우리가 열람할 수 있는가거든.”
“한번 가 보죠. 복도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좋다. 그리고 베릭이랑 이안 님도 찾고. 어때요, 대장?”
헤일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곧장 복도를 나와 마법부 밖으로 걸어갔다. 직원들의 눈인사를 능청스레 받아 주며 말이다.
그리고 이내,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아.”
마법부 별채. 이안이 그토록 원하여 밀어붙이던 그것이었다.
세 사람은 순간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환각이긴 하지만, 이안이 속으로 품고 있던 어떠한 희망을 훔쳐본 기분이었다.
제아무리 말과 글과 그림으로 설명한다 한들,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같은 것을 보았으니, 떠올릴 수 있다.
“자, 잠시 들렀다 갈까요?”
“그래.”
세 사람은 괜히 긴장한 채로 별채에 들어섰다. 본관과 달리 한산한 분위기. 각종 서적과 자료 따위가 끝도 없이 들어서 있었다.
“실례.”
그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비켜달라 이르는 것 아닌가.
갈색 머리칼에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의 사내다. 그는 책을 위태로이, 한가득 들고 있었다. 그때, 맞은편 복도에서 직원이 달려와 그를 거들었다.
“나움. 이쪽입니다.”
“그래. 간다, 가.”
나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헤일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나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곧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자다.”
“누구요?”
“이안 님을 위해 금기의 마법을 사용했다는.”
이안의 친우이자, 스승이고, 가족인 분.
나키나와 토미가 화들짝 놀라 그 뒤를 쫓아갔다. 서고에서 책 정리하던 나움이 고개를 들어 의아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무슨 일?”
“아. 저기-”
“이, 이, 이안 님은요?”
토미가 이안의 이름을 부르자, 나움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는 구석에서 책 정리를 돕던 직원에게 나가 달라 이르고서 문을 닫았다.
“이보게들. 안 그래도 황궁 내 흉흉한 말이 도는데 그대들까지 그래서는 안 되지 않겠나?”
“예?”
“황제 폐하의 존함을 어찌 함부로 입에 올리는지에 대한 질책일세.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마법사들은 폐하를 지지해 드려야지. 어찌 이렇게 방종한 태도로-”
“헉!”
이안 님이 황제일 적의 시대로구나! …그렇지. 맞아. 이안 님의 어둠이라 한다면 당연히 그때일 것인데, 왜 그걸 간과했을까?
나움이 한마디 덧붙이려고 하자, 나키나가 황급히 토미의 머리통을 잡고서 테이블에 박아 버렸다.
콰앙!
“죄송합니다! 이 새끼, 잠깐 정신이 나갔습니다!”
“억! 예예, 죄송합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혼내려던 나움의 의도가 무색해질 정도의 거친 반성이었다. 그가 황당한 얼굴로 나키나와 토미를 쳐다보자, 헤일이 끼어들었다.
“방금 자다 일어나서 제정신이 아닌 자들입니다.”
“아니…….”
“그런데, 흉흉한 소문이라니요?”
나움은 고개를 돌리고서 잠시 침묵했다. 무엇이겠는가? 제국방위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곳곳에서 떠도는 불손한 자들의 입방정이지.
나움은 책을 덮으며 세 사람에게 엄중히 지시했다.
“언행을 조심히 하라.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니 내 더는 문제 삼지 않겠다. 하지만 실언에 대한 책임은 져야겠지. 여기 들어온 책을 모두 정리하도록.”
나움은 그리 이르고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에 멍하니 서 있던 나키나가 토미의 머리에 꿀밤을 내리꽂았다.
따악!
“잘하는 짓이다.”
“죄송합니다아…….”
바빠 죽겠구먼, 얼어 죽을 책 정리 같은 소리! 그녀는 확 튀어 버릴까 생각했지만, 나움이 복도에서 직원과 뭔가 얘기하며 단단히 지키고 서 있는 걸 확인하고는 단념했다. 에휴, 어느 시대나 마법부 장관들은 만만치가 않네.
“X 됐네. 여기서 튀면 분명히 소란이 일 건데.”
“후, 후딱 할까요?”
“네가 다 해, 인마.”
토미는 툴툴거리며 책을 집어 들었고, 헤일과 나키나는 뭔가 단서가 없을까 싶어 여기저기를 헤집었다.
그러다 문득, 토미는 책 겉면에 쓰인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어라.’
-비비.
비비? 로만드로 님 딸 이름 아닌가?
특이한 이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흔한 이름도 아닌데. 토미는 책장을 사라락 넘겼고, 이내 멈칫했다. 눈동자가 조금씩 커졌다.
“헤일 대장. 나움 아저씨, 슬슬 가는 것 같은데요. 이 틈에 나가죠? 토미! 뭐 해?”
“아, 자, 잠시만요!”
토미는 허둥지둥 펜을 잡고서 책장 맨 앞에 뭔가를 써 내려갔다. 나키나와 헤일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그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뭔데?”
“나중에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우선은 나가요.”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나키나는 민첩하게 모퉁이를 따라 움직이며 밖으로 빠져나왔고, 헤일과 토미 역시 어렵지 않게 뒤따랐다.
세 사람은 황궁 자료실이 있는 본관 쪽으로 걸음을 빠르게 했다.
“그쪽으로 가면 이안 님도 뵐 수 있을까요?”
“황제인 이안 님과 우리가 아는 이안 님이 같은 분인지는 모르겠다.”
“만나 보면 알겠네요. 이쪽에 길이 나 있습니다!”
“조금씩 바뀐 부분이 있군.”
타닥타닥!
마법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이는 시대를 막론한 황궁 안의 규율이었고, 하물며 지금은 마법부 장관 나움의 감시를 따돌리고 도망쳐 온 처지가 아닌가.
게다가 자신들의 마법이 이 환각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모르니, 이 또한 조심스러웠다. 우선은 자료실로 가 최대한 정보를 모은 다음…….
타닥타닥!
히이잉!
막 본관에 다다랐을 때였다.
저 멀리서 위용 넘치는 마차들이 줄지어 들이닥쳤다. 계단 밑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차례로 경계하여 예를 다했고, 오가던 사람들 역시 자리에서 멈췄다.
“저 마차……?”
오가던 사람들이 멈추고 예를 다하는 건, 오로지 황족에게만 적용되는 예법이었다.
헤일과 토미, 나키나는 가만히 서서 마차를 노려봤다. 병사가 문을 열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한 남자-
“크로니 경.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런 말 말게. 황제 폐하께서 나를 찾으시는데, 응당 따라야지.”
크로니였다.
나키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자신도 모르게 달려들려 했고, 헤일과 토미가 반사적으로 양팔을 붙잡아 겨우 말렸다.
“…시발놈.”
“선배. 시발놈 듣겠습니다.”
“토미. 너도 조용히 해.”
크로니는 옷깃을 탁탁 턴 다음 본관 계단을 올라갔고, 세 사람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 이안에게 다가가는 그 모습을…….
타닥타닥!
“으아하하합!”
그때다. 세 사람은 아주 익숙한 기운을 감지했다. 저 멀리서, 힘차게 기합을 넣으며 달려오는 한 남자.
“개새끼가아-!”
베릭이었다.
어디서 뭐 하다 여기서 튀어나오는지, 원. 헤일과 토미 그리고 나키나는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베릭을 잡아채고는 그대로 수풀 속으로 숨어들었다.
촤악!
“흡! 으읍!”
“닥쳐, 이놈아.”
“쉿. 쉬잇!”
계단을 오르던 크로니가 때아닌 소란에 뒤를 돌아봤지만, 이미 수풀 속에 숨은 그들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계속 정면만 바라보고 있던 몇몇 병사들만이 겨우 눈에 담았을 뿐.
“…마법사였지?”
“어. 모른 척해. 요즘 좀 그렇잖아.”
병사들은 헤일과 토미, 나키나의 옷차림을 보고서 쉬쉬 눈을 돌려 댔다.
한편, 수풀 속에서 만난 네 사람. 토미는 베릭의 입을 틀어막으며 재빨리 속삭였다.
“베릭. 여긴 이안 님의 어둠이다. 얌전히 좀 있어 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