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2
제72화. 게일이 움직이다
한편, 황명 전달 임무를 마친 치엘로니아가 복귀하자마자 찾은 곳은 2황자 게일의 집무실이었다. 통창으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건만, 이상하게 그의 집무실은 언제가 냉기가 느껴졌다.
“몰린과 일행을 지하 감옥에 가둬두기만 했다?”
“그렇습니다. 고문이랄 것도 없고 그저 구금 후 특별한 처사 없이 방치 중인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게일은 팔짱을 끼며 손끝만 톡톡, 까딱거렸다. 깊게 생각할 때만 나오는 그의 습관이었다. 모친을 빼다박은 날카로운 눈매가 치엘로니아의 뒤편으로 향했다. 보고서를 읽고 있는 웨슬리로 향한 것이다.
“황궁 예법에도 능통해 보였다?”
“예. 저하의 말을 꺼내자마자 표정이 일순 변했습니다. 자문관이라는 로만드로조차 모르는 눈치였는데 말입니다.”
그때, 서류를 읽으며 돌아다니던 웨슬리가 고개를 휙 돌렸다. 아름다운 검은 머리칼과 붉은 입술이 언제나처럼 완벽했다.
“확실하네요. 마리브와 인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단정하지 마라. 웨슬리.”
“그렇지 않고서는 납득이 안 됩니다. 가난하여 매음굴에서 지낸 아이가 짧은 기간 교육 받고 사막을 넘어갔습니다. 분명 기본적인 것을 겨우 배웠을 터인데, 황궁 예법이라니요.”
웨슬리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리가 있었다.
“애초에 마리브가 이안을 영주로 추천한 것부터가 확실했습니다. 마리브에게 줄 대고 싶어서 돈 갖다 바치는 자들이 한둘입니까? 그런 자들 젖히고 이안이라는 놈이 선택받았어요.”
“마력운용자라 하지 않았나.”
“그래도, 정도가 심합니다.”
마리브는 제국에서 인정한 차기 황제. 그의 눈에 들기 위해 온갖 알랑방귀를 뀌어대는 자가 줄로 세워서 바리엘을 한 바퀴 돌 정도였다.
특히 영주 임명은 신분 역전의 기회인지라, 마리브가 마음만 먹었다면 훨씬 영향력 있는 자에게 넘겨줄 수도 있었으리라.
“영지가 변경인 탓도 큽니다. 워낙에 특성이 짙다보니 제약이 많아서.”
조심스럽게 거드는 치엘로니아 앞으로, 웨슬리가 보고서를 던졌다. 나이 차이가 꽤 나지만, 웨슬리는 마법부 장관이었으며 치엘로니아는 수많은 행정관 중 한 명이었기에. 신분 차이가 확실했다.
“아무튼 수고했네. 그만 나가봐.”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치엘로니아는 공손히 고개를 숙인 다음, 게일의 처소를 나섰다. 웨슬리는 담뱃대를 입에 문 채 중얼거렸다,
“이안, 죽일까요?”
그녀의 말에 게일이 웃으며 턱을 괴었다. 농담이 아닌 것을 알기에 더 웃긴 말이다.
“어떻게?”
“신년회 영주임명식 때 올라오면 마법부 소속으로 들어올 테니까요. 기회도 많고, 방법도 많겠죠.”
후우, 하고 내뱉는 연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게일은 그녀의 입에서 담뱃대를 가져왔다. 웨슬리는 조금 짜증스러운 투로 말을 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일을 방해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요. 어차피 헌납금 1만 닢 갚지 못하면 마법부 소속 노예가 될 터인데, 그 전에 잘라 버렸으면 좋겠어요.”
웨슬리가 게일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한껏 위험한 눈웃음이 이어졌으나, 게일은 꼼짝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마법부 장관에 안 어울려.”
“제가요?”
게일은 말 그대로의 뜻으로 말했으나, 웨슬리는 오인하는 듯했다. 마법부 장관보다는 황제 게일의 황후 자리에 어울린다는 뜻으로.
“게일 저하가 그러하다면, 그러한 것이겠지요.”
게일은 창밖만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웨슬리는 여인으로서는 완벽했으나, 국정을 함께하는 동료로는 영 아니었다. 마법부 장관이면서 어찌 이안을 죽이자는 말을 저리 쉽게 뱉는단 말인가.
그것도 갈수록 마법사의 수가 줄어드는 이 시국에.
진정으로 마법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다면 게일이 죽이자고 해도 회유하여 방법을 모색하는 게 마법부 장관의 자세였다.
“게일. 나 좀 봐봐요.”
이 아름다운 여인은 황후 역시 황제의 정치적 동료인 것을 모르는 것일까? 게일이 마리브를 밀어내고 황제 자리에 오른다 한들, 그 옆에 웨슬리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게일은 여인의 유혹적인 손길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게요?”
“형님에게.”
“마리브 저하 말씀이세요?”
게일은 커프스를 잠그며 웨슬리를 빤히 쳐다봤다.
또다. 가끔 저를 시험하는 듯한 저 눈빛. 웨슬리는 표정을 관리하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안이 왜 몰린을 죽이지 않고 그냥 두었을까.”
“…그야, 황궁의 행정관이고, 여차했다가는 우리 쪽에서 다시 조사단을 내려 보내면 곤란하잖아요. 에리카 단장이랑 그 대거리를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흐음. 그래. 그렇군.”
게일은 더 묻지 않았다. 웨슬리가 보고 있는 전세가 딱 거기까지구나, 하고 판단을 내릴 뿐이다. 두 번의 기회도 없고, 함께 나누는 의견도 없다.
웨슬리가 게일의 뒤를 쫓아 나갔다.
“아니면 왜요?”
“왜요라니? 나도 잘 몰라서 물은 건데.”
쪽.
게일은 웨슬리에게 작별의 입맞춤을 맞추고서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부하들이 그림자처럼 그의 뒤에 따라붙었고, 여인은 허망하다는 듯이 서 있을 뿐이다.
그녀 역시 대외적으로는 칭송받는 마법부의 수장이었다. 평민으로 태어나 부와 권력을 모두 거머쥐었고,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겼단 말이다. 그런데 게일 앞에서는 언제나,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다.
“씨발…….”
그녀가 작게 욕설을 내뱉었지만, 게일의 발치는커녕 그를 쫓는 시종에게조차 닿지 못하고 흩어져 버렸다. 보이지 않는 아우라가 어지러이 울렁이는 기분이다.
타닥타닥!
“저하, 어디로 모실까요?”
“마리브의 궁으로.”
“알겠습니다.”
게일은 짤막하게 대꾸했고, 부하들은 앞서 뛰어가며 게일의 걸음이 멈추지 않게끔 길을 열었다.
‘이안이 몰린을 살려두고 있는 건, 마리브 때문이다.’
웨슬리의 말도 물론 절반은 맞았다.
천려족을 낀 상황에서 몰린이 죽으면 중앙에서 받아들이는 사안의 중대성이 확 올라가게 된다. 조사단이 아닌 정규군을 파견할 수도 있는 문제.
그래서 마리브에게 결정권을 넘겨준 거다. 마리브와 게일의 권력관계를 완벽히 이해하고, 노선을 정했노라 볼 수 있는 선택.
어쨌든, 마리브의 손끝에 몰린의 목숨이 달려있고, 게일에게는 그의 목숨이 퍽 아까운 상황이다. 행정부에서 포섭한 인물이 몇 없을뿐더러, 몰린처럼 경험이 풍부한 노익장은 드물었으니까.
히이잉!
말의 거센 울음과 함께 마차가 움직였다. 하늘을 보며 가만히 고민하던 게일이 창문을 열어 명령했다.
“…잠깐. 길을 틀어라.”
“네?”
“마리브에게 갈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가야겠다.”
“황제 폐하의 궁 말씀이십니까?”
“그래. 서둘러라.”
상전의 지시에 말들이 천천히 코너를 돌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들의 말머리가 북쪽 마리브의 궁 대신, 동쪽 황제의 처소 쪽으로 고정되었다.
* * *
저택은 새벽부터 분주했다.
카칸티르를 비롯한 쉰다섯의 전사가 대사막으로 돌아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원한다면 만날 수 있는 거리지만, 쉽지는 않은 일이었기에 다들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이제 가면 또 언제 봐요?”
“그동안 고마웠다.”
“저기, 이거…….”
“말린 고기랑 물을 챙겼어요. 조심히 돌아가시구요.”
“카칸! 쿠실레 인장은 뭐로 올립니까?”
저택 정문은 시장통을 방불케 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이안도 접경지까지 함께하기 위해 외출 준비를 서두르는 중이었다. 선물과 사례금 그리고 음식 따위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는데, 구석에서 유독 눈시울이 붉은 해나를 발견했다.
“…안녕히 가세요.”
“또 올게.”
가볍게 맞잡은 두 남녀의 손끝. 애틋함이 뚝뚝 묻어져 나와, 어떤 감정인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모른 척 눈을 굴렸다.
그걸 본 베릭이 귓구멍을 후비적거렸다.
“뭘 봤길래 그래?”
“베릭. 이쪽으로 와라.”
“어쭈, 저것 보소? 해-!”
“베릭! 다물어라, 이 눈치 없는 녀석아!”
따악!
베릭의 머리통을 후려친 것은 로만드로였다. 이안도 이어서 경고한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억울하다는 듯 뒤통수만 매만지던 베릭이 연신 꿍얼거렸다.
“내 머리통이 동네북이지, 젠장.”
“생각보다 정든 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도 인연이 생기길 마련인데, 천려인들은 계절을 나고 가지 않나.”
뜨거운 여름에 와서 가을에 떠나가는 인연.
이안은 잠시 고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나쁜 현상은 아니었다. 천려족과의 동맹을 더욱 견고히 하거나, 문화적 융합을 이루려면 제일 좋은 게 ‘결혼’이었으니까 말이다.
‘…너무 정치적인 판단이었나.’
이안은 연신 울먹거리는 해나를 보며 자중했다.
‘이안 님. 이안 님의 선택이 누군가의 삶을 바꿀 것이기에, 글자 아래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올라오는 안건만 확인할 게 아니라 직접 마음으로 느끼셔야 합니다.’
순간, 회귀 전 나움이 했던 충고가 떠올랐다. 명운이 다한 황제의 곁을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유일한 친구이자, 스승인 마법사 나움. 이안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안 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출발하지.”
“정문을 열어라!”
“돌아가자! 우리의 대사막으로!”
“우와아아아!”
“잘들 계시오!”
“이봐들, 천려에서 만나자고!”
저택에 남는 천려인들이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개중에는 네르사른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카칸은 위엄있는 자세로 저택을 나섰다. 소식을 듣고 나온 영지민들이 그들을 배웅했다.
“고마웠소! 조심히 가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쪽들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정말!”
솨아아아!
사방에서 들꽃과 낙엽이 휘날렸다. 바람을 따라 일렬로 흔들리는 굴라까지 장관이다.
카칸티르는 맨 앞으로 달려와 꽃다발을 건네주는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처음 브라츠에 입성했을 때, 그의 발치에서 넘어져 울던 그 아이다. 잠깐의 스침을 아이는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고, 고맙습니다.”
아이의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카칸은 꽃다발을 받아들고 그냥 떠나려다가 멈칫, 다시 몸을 틀었다.
“데모샤.”
아이의 얼굴은 애써 확인하지 않았다. 쿠실레가 다시 움직였다. 접경지까지는 금방이리라.
그리고 이내, 진짜 작별의 시간이 왔다.
“여기까지. 이안 경.”
“카칸. 노고 많으셨습니다.”
이안이 화친 제물로 팔려갔던 그곳이다. 국경을 알리는 거대한 두 개의 바위. 그리고 버려진 작은 신전.
“메렐로프 건은 천려로 돌아가자마자 시작하겠소.”
“그리하면 감사하겠습니다.”
“중앙으로 가서 잘하길 바라오. 그렇지 않으면 이날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 테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건 굴라와 사례금입니다.”
카칸티르는 이안을 잠시 보더니, 굴라 씨앗만 가져갔다. 오른손에는 보란 듯이 들린 꽃다발이 흔들리고 있었다.
“손이 모자라서. 그건 됐네.”
“아.”
“가자! 천려로!”
“데모샤!”
“데모샤! 잘 가라!”
전사들의 선창에 베릭 역시 크게 소리쳤다. 그들은 힘차게 사막으로 내달려 사라졌다. 바람보다 빠르고 모래보다 가벼운 몸놀림. 이안과 베릭은 한참이나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우리도 돌아가자.”
“좋아. 가서 뭐 할까?”
“뭐 하긴?”
이안의 웃음에 베릭 역시 웃으며 말고삐를 잡았다.
할 거라고는 정해져 있지. 굴라 재배 작업 그리고…….
‘메렐로프 담그기 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