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3
제73화. 수작
메렐로프 집사의 하루는 언제나 똑같이 시작됐다.
일어나자마자 침구 정리를 하고 하인들을 통솔하여 아침 분담을 확인하였으며 식사 준비가 되는 동안 각종 서신을 정리하여 집무실로 올려주는 것.
이 모든 것이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이뤄져야 했다.
똑똑.
“일어나셨습니까? 백작님?”
메렐로프 백작의 대답이 들리자, 집사는 문을 열고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세 개의 방으로 이뤄져 있는 침실 맨 안쪽. 아직 기침하지 못한 부인을 뒤로 하고, 백작은 옷까지 멀끔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날씨가 확실히 추워지는군그래.”
“벽난로 청소를 해놓겠습니다.”
메렐로프 백작은 쟁반 위에 놓인 서신을 하나씩 확인했다. 대부분 사교 관계 유지를 위한 형식적 서신일 뿐이다.
“이건 뭐지?”
“아. 실례했습니다.”
백작이 들어 보인 것은 이안이 보낸 답신이었다. 주인이 축전에 무관심하니, 대외적인 평판을 챙기는 것도 집사의 역할 중 하나.
메렐로프 백작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중얼거렸다.
“자네도 쓸데없이 부지런하군그래.”
그러던 중, 백작의 손짓이 멈췄다. 이안이 백작뿐만 아니라 백작 부인에게도 답신을 보낸 것이다. 백작은 망설임 없이 실링왁스를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이건…….”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툭 튀어나온 눈썹 뼈마디가 더욱 도드라졌다. 있는 힘껏 찡그린 눈매에서, 집사는 경계심을 느꼈다.
“리엔 앞으로 온 것이네?”
“그, 백작님께서 축전 보낼 예정이 없다는 걸 아시고 대신 보내셨습니다. 마님께서 워낙 내조에 신경을 쓰시다 보니.”
메렐로프 백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뚫어지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럴수록 집사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는데, 하루의 시작이 이런 식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선물도 보낸 것 같고.”
“창고에서 안 쓰는 물건을 선별하셨습니다.”
“직접?”
“…예.”
“직접 선별해서 축전까지 보냈다? 그런데 이안은 그걸 아주 좋아라 받았네? 둘이 따로 만난 적은?”
집사는 가볍지만 확신을 담아 도리질 쳤다.
있는 줄도 몰랐던 고철 덩어리다. 주고받는 인사말이 예의 있다고 한들 그것이 진심이 아닌 것은 귀족인 백작이 더 잘 알고 있을 터.
사락.
맨 안쪽 침실에서 부인이 뒤척이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오늘, 일진이 사나운 것은 집사뿐만 아닐 것이다.
“없을 겁니다, 백작님.”
“이안과 중앙 저택에 왔을 때, 만난 적이 없어?”
“아, 그, 배웅 나갈 때 마주치긴 했습니다. 그래도 아주, 아주 잠깐이었고 별다른 말을 나누지도 않았습니다.”
집사가 필사적으로 변명하듯 덧붙였으나, 백작의 귀에는 닿지 않은 모양이다. 안 그래도 거무죽죽한 얼굴색에 핏기까지 돌았다. 혈압이 쭉쭉 오르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다.
“좋은 아침.”
그때, 백작 부인이 가벼운 옷차림새로 안쪽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고양이처럼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백작의 손에 들린 서신을 뺏어 들었다.
“나한테 온 걸 왜 멋대로 읽어요?”
“이봐, 리엔.”
“보자, 뭐라고 왔나. 흐음. 진심으로 마음에 든다고 하네요.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하하하.”
백작 부인은 남편의 심상찮은 분위기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웃어 젖혔다. 집사는 아예 안 보겠노라 다짐하듯 고개를 돌렸고, 그럴수록 침실의 분위기는 더욱 뒤틀려갔다. 한없이 가벼운 쪽과 한없이 무거운 쪽이 만들어내는 효과였다.
“식사를 준비해.”
“네. 백작님.”
“나는 오늘 사슴고기 스테이크가 먹고 싶어.”
“네. 마님.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번에도 그 말 해놓고, 안 올려줬잖아?”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수확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가을이다. 대저택은 언제나 풍족한 터라 주방 운영에 문제가 없었지만, 외부 수급이 있어야 하는 재료는 하루 만에 구하기 어려울 때가 왕왕 있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사슴고기 같은 경우.
메렐로프 부인은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남편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보. 듣자 하니, 브라츠 사람들은 죄다 굴라를 재배해서 먹고 있대요. 그게 생각보다 맛이 엄청 좋다고 하네?”
“짐승 새끼들이랑 어울리다 보니 짐승이 된 거지. 먹을 게 없어서 그런 걸 먹나?”
“우리는 그렇다 쳐도 저기 아랫것들은 사정이 또 다르잖아요. 이안 경이 감사 인사도 할 겸 한번 보자고 하는데, 내가 갔다 와 볼까요?”
“어디를? 브라츠를?”
메렐로프 백작의 눈매가 의심스럽게 휘었다. 하지만 부인은 별로 거리낄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 제가 다른 곳이라도 갈 것 같으세요?”
“쓸데없는 소리. 매년 이 시기 되면 똑같이 앓는 소리지. 먹을 게 없네, 어쩌네. 곧 있으면 하완 왕국에서 대상단이 올 거니까, 그때까지만 좀 참으면 될 일. 어찌 다들 학습 능력이 없어. 쯧쯧.”
학습 능력이 왜 없겠는가. 있으므로 매해 농작하는 수가 줄어들었고, 유흥업이나 숙박업 따위를 여는 영지민들이 늘어만 갔다. 겨울을 앞두고도 대상단만 믿고 대비하지 않는 자들도 즐비했다.
‘…안팎으로 문제가 있지.’
집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침실을 나섰다. 메렐로프 백작 부인은 그를 보며 싱긋 웃을 뿐, 별다른 말을 꺼내진 않았다.
“여보.”
문이 완전히 닫히자, 리엔은 남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백작의 기분은 여전히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요, 하완에서 상단이 언제 온대요?”
“그건 왜 묻지?”
“물어보면 안 되나요?”
“…한 달 뒤에 출발한다는 연락을 받았어.”
“한 달 뒤라. 그러면 산을 넘어와야 하니, 한 달 반? 아니다. 한 달 하고 일주일 정도 걸리려나…….”
부인의 중얼거림에 백작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졌다. 평소에도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이었으나, 요즘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어서 왔으면 좋겠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침실을 쏙 빠져나갔다. 복도에서 창을 닦던 한 남자가 멈칫거리며 문 쪽을 바라봤다. 여인은 차갑다 못해 살벌한 표정으로 남자를 쏘아보았다.
“클라크. 창 좀 반짝반짝 닦아두렴. 한 달 뒤에 하완 왕국에서 손님들이 오신단다.”
“…네. 알겠습니다.”
클라크라는 사내는 고개만 끄덕이며 알겠노라 답했다. 그는 연신 창문을 닦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한 달 뒤, 하완 왕국 출발. 한 달 뒤 하완 왕국 출발…….
* * *
카칸티르가 떠나고, 이안은 집무실에서 본격적인 메렐로프 조사에 열을 올렸다. 전장에서 적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었으니. 메렐로프와 접촉하기 전에 그쪽과 관련한 것은 최대한 상세히 알아두는 게 유리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메렐로프 부인이요.”
“부인?”
로만드로의 부하가 보고서를 뒤적이더니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름이 리엔 메렐로프인 것까지는 확인했는데, 출신이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문을 모른다는 뜻인가?”
“가문도 그러하고, 신분도 정확히 무슨 계급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혼한 지는 3년째인데, 당시 결혼식도 조촐하게 한 터라 나중에 안 영지민들도 많답니다.”
로만드로와 부하의 대화를 듣고서,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제아무리 단출하게 한다고 한들 백작이었다.
“신분 차이가 심하게 난다는 뜻인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평민이 아니었을까요?”
“음. 글쎄요.”
이안은 묘하게 웃던 메렐로프 부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단 외부인 출신인 건 확실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드리퍼를 알고 있으니, 평범한 출신은 아닐 것이다.
“하완 왕국에서 출발하는 대상단은 파악되었는가?”
“일락 상단이라고, 5년 주기로 도는 상단이라 합니다. 상단주를 포함한 인원은 총 100여 명.”
“생각보다 그리 크지는 않군.”
“대신 경로가 일정해서 의탁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여행하는 개인이나 작은 상단이 돈을 내고 합류하여 안전을 도모하는 방식이었다. 그 수가 쉰이 넘어가니, 대략 잡아 150에서 200명 정도 되는 규모라 보면 될 것이다.
“일락 상단을 선두로 보름 간격으로 계속해서 크고 작은 상단들이 들어올 예정이라 합니다.”
“그러면 초반, 그놈들을 잡는 게 중요하겠구먼.”
“의탁을 받는다면, 우리로서는 꽤 수월하겠습니다.”
네르사른의 말이었다. 그는 서류를 넘기며 글자를 천천히 짚어 읽었다. 바리엘어인지라 다른 자들보다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긴급 상황 시 대응하지 못할 인력이고, 무엇보다 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면 슬슬 날짜를 때려 맞춰야겠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 도착하려 할 터이니 늦어도…….”
“아, 날짜는 알고 있습니다.”
로만드로의 부하가 기쁘게 손을 들었다.
“한 달 뒤, 하완 왕국에서 출발하니 산 넘는 시간 더해서 도착할 거라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소문이 퍼져? 어디서?”
“메렐로프에서요.”
정확한 날짜까지 알게 되자, 로만드로와 부하들은 되었노라 외치며 서로를 격려했다. 오직 이안만 웃지 못하고 가만있을 뿐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여기서 하완 왕국까지는 열흘이면 충분히 갑니다.”
“아니아니. 그것이 문제가 아닐세. 이쪽에는 도적이랄 게 없나 싶어서.”
특히나, 산적. 대상단이라 함은 용병이 많지만 그만큼 지니고 있는 것도 많다는 뜻이다. 미리 시기를 알려오면 도적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지 않나. 도적이 끼어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넘어오는 게 좋을 것인데 말이다.
“음. 도적이라. 아무래도 전투 여파로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도착 예정 시기를 알려두어야지 영지에서도 이것저것 준비할 것 아닙니까.”
이안은 조금 꺼림칙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상단이나 메렐로프 입장에서나 중요한 거지, 이안 입장에서는 상관없는 처사였다.
“그래. 그럼 진행을 슬슬…….”
쿵쿵쿵! 쿵쿵! 쿵!
그때였다. 복도 끝에서부터 울리는 우렁찬 진동.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지간한 인간의 인기척이라 여길 수 없을 정도.
로만드로와 그 부하들이 재빨리 검을 찾았지만, 이안과 네르사른 그리고 베릭은 태평하게 서류를 덮었다.
콰앙!
“왔냐?”
먼저 인사한 것은 베릭이요.
“예의가 없구나.”
가볍게 꾸중한 것은 네르사른이었다.
“수.”
“아아니이! 왜 난데!”
그녀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주먹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카칸티르가 천려로 돌아가자마자 수를 이쪽으로 보낸 것이었다.
“얼씨구. 오자마자 우렁차다.”
“베릭! 너지! 네가 나 추천한 거지?”
“내가 뭔 힘이 있다고 그래. 나 지금 안 보여? 다들 테이블에서 일하는 동안 소파에 찌그러져서 누워있잖아.”
“왜! 왜 저예요? 예? 안 그래도 사막 밖으로 나오면 추운데, 저보고 지금 산을 타라고요? 저 산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뻥치시네.”
“입 닥쳐, 베릭! 나 지금 제정신 아니니까!”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단 수를 맞이했다. 가쁜 숨을 내쉬며 그를 올려다보는 눈빛에 원망이 가득했다.
“왜 제가 저 멀리 하완 왕국까지 가서 대상단에 잠입해야 하는데요오! 여기는 인재가 그렇게 없나?”
그래서 빈둥빈둥 잘 먹고 놀던 자신을 이리 불렀단 말이냐고! 카칸께서 제 그릇에 고기를 넘겨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세상에, 세상에! 하완 왕국이라니!
이안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인재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만 한 적임자가 없더구나. 앉아서 숨부터 돌리면, 내가 작전을 보다 상세히 얘기해 알려주겠다. 카칸께 대충은 들었겠지?”
그 말에 수는 이마를 짚으며 한탄을 금치 못했다.
“하, 대충요. 아주 대충. 상단에 잠입해서 굴라 독을 풀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