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32
제732화. 무엇을 위해
두웅-! 둥둥! 두둥-!
황제의 진영 쪽에서 거대한 북 울림이 들려왔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제이럿을 노려보던 베릭이 경계를 풀고 뒤쪽을 쳐다봤다.
제이럿 역시 마찬가지. 그는 베릭에게 겨누었던 검을 거두고서 자세를 풀었다. 복귀 명령이었다.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걸 안 진영에서 일시적인 소강을 명령한 것이다. 그는 쓰러진 채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헬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헬나라고 했나?”
“…그렇소.”
“운이 좋은 줄 알거라.”
스릉.
제이럿은 검을 완전히 집어넣었다. 그에 따라 베릭도 긴장이 탁 풀렸는지, 검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이어 그대로 무릎 꿇은 채 엎드려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안 친위대원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동료의 뒤를 지켰다.
‘젠장.’
하필이면, 하필이면 이런 데서 누나를 만나다니. 차라리 적국 수도에서였다면 이렇게까지 절망적이진 않았을 거다. 하필이면 황제가 보는 앞에서 길목을 막아서고 바리엘인을 죽이겠노라 겁박하였으니… 베릭도 어찌할 방도가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베릭. 일어나라.”
“선배님.”
머리로는 안다. 너무도 잘 안다. 누나와는 함께할 수 없다는 걸. 폭풍우 치던 그날 밤과 같이 누나를 구할 수 없다는 걸. 아니, 구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러나 몸이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누나를 베지 않으면 곁의 모든 것들이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쉽지 않았다.
타닥타닥!
제이럿은 진영 쪽에서 달려 나오는 병사를 살폈다. 대충 묶은 갈색 머리칼이 휘날리고 있었다. 에이린이다.
“다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에이린?”
“베릭 님. 일어나십시오. 바리엘 병사들이 보고 있습니다.”
에이린은 잇새로 조심히 속삭였다. 동시에 헬나와 작당들의 몸 상태를 살핀 다음, 단검을 꺼냈다. 베릭이 놀라서 막아서려 했지만, 그뿐이다. 에이린에게서는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악!
“윽!”
에이린은 검으로 헬나의 팔과 다리에 생채기를 내며 설명했다.
“지엄하신 황제의 명은 바리엘 백성들을 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릭, 이자가 정말 당신의 누이가 맞는다면 이자 또한 바리엘의 백성입니다. 지금은 이름을 버리고 새로이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게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아니, 모르, 모르겠는데.”
헬나는 자신의 몸에 검을 그어 대는 에이린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봤다. 정확히는 뭘 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는 것이었다. 상처를 낸다기보다는 뭔가를 끊어 내고 있는 듯한 손짓.
에이린은 충분하다 싶었는지, 헬나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서 일으켰다. 다정하고 따스한 부축이 아니었다.
꽈악.
“황제의 명을 모두가 들었기에, 베릭 님의 사사로운 정 하나에 이를 물릴 수는 없습니다. 하여 눈속임으로 잠시 시간을 벌 것입니다. 이자는 토올룬 왕의 계책으로 인형술에 현혹되어 불손한 짓을 저질렀고-”
헬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베릭. 너, 정말이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구나.
“그를 간파한 황궁친위대원들이 인형술을 파훼하여 바리엘인들 모두를 구해 낸 것입니다. 대외적으로는 그리할 것입니다. 다만!”
헬나의 어깨를 쥔 에이린의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조건이 있었다.
“누이의 죄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틀 내로 죗값을 받아야 합니다. 혹, 베릭 님이 이것을 못 받아들이겠다면… 또 다른 방도가 있어야 할 겁니다.”
헬나를 데리고 도망이라도 쳐라. 운이 좋다면 영원히 숨어 살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황궁의 추격대에 의해 죽을 것이다.
갈림길이다. 제 운명을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 이것이 베릭을 아끼는 황제의 마지막 배려였다.
베릭은 흔들리는 눈으로 에이린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따뜻하되 단단하여 흔들림이 없었다.
“괜찮습니다. 베릭. 그대는 신의 선택을 받아 바리엘을 위해 희생한 자 아닙니까. 어느 길이든 분명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아닌데. 신의 선택을 받는 건 이안이인데.”
“그런 이안 경을 따라 옳은 일을 하셨으니, 베릭 님도 그러한 사람입니다.”
죽음을 각오하는 게 쉬운 일인가? 낯선 신전 저 아래로 내려가 마물들과 생과 사를 겨룬다는 게, 모두에게 허락된 일이던가? 베릭처럼 강한 자는 많고, 신념을 위해 나서는 자 또한 많다. 하나, 둘 다인 자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
“선택하십시오.”
그러고는 에이린은 헬나의 목뒤를 가볍게 내려쳐 그녀를 기절시켰다. 혹여라도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황제가 어렵게 내려 준 기회를 망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베릭의 선택뿐.
“…….”
베릭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을 뜬 채 죽은 바리엘 백성들. 위쪽에서 상황을 주시하는 적들. 에이린과 제이럿, 황궁친위대원들까지. 모두가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베릭은 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비볐다.
스윽.
울어서는 안 된다. 그건 자신의 해결 방식이 아니다. 가능하다면 누이도 살리고, 자신의 주위 사람들도 지키고 싶지만… 혹여 불가하다면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미련 없이, 단 하나만.
베릭은 토올룬 수도로 올라간 이안 일행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은근히 풍겼으나,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과거와 미래.’
헬나는 과거였고, 베릭이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은 미래였다. 그는 마산타르 신전에서 미래를 보고 왔으며, 그것들이 얼마나 찬란하고 위대한 과정인지를 알고 있다. 베릭은 계속 차오르는 눈물을 문질러 지워 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었나?’
누이들을 만나기 위해? 아니다. 누이들은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렇다면?
…강해지기 위해.
‘무엇을 위해 강해지려 했더라?’
베릭은 이안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사막으로 가 천려족들과 몸을 부딪치며 대전했던 날과 황궁친위대에 뽑히기 위해 시아오시와 주먹을 겨루었던 날을.
황자들이 난을 일으켰을 때와 러더포드와 맞섰을 때를. 그 모든 순간, 그는 이기기 위해 힘썼다. 자신은 대체 무얼 위해 그랬던 걸까.
‘아.’
맞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누이들을 그리 보냈던 과거가 반복되지 않게끔 하기 위해…. ‘지금’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솨아아-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쯤이었다. 베릭은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돌아가자.”
진영으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 * *
촤아악-!
헬나의 얼굴에 차가운 물이 끼얹어졌다. 숨을 겨우 토해 내며 정신을 차리자, 어두운 내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물이나 형상을 바로 알아볼 수 없었다.
“누나. 정신 들어?”
“…베릭?”
“드나 보네. 더 자게 두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베릭은 헬나 가까이 앉아 있었다. 작은 의자에 걸터앉아서는 무릎에 팔꿈치를 댄 모습이었다. 그에 헬나는 베릭이 고뇌에 빠져 있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자신의 사지에 묶인 족쇄가 꽤 단단하다는 것도.
“베릭. 이것 좀 풀어 줘.”
“누나. 메디아는?”
“…메디아?”
“응. 같이 잡혀갔었잖아.”
베릭의 담담한 물음에 헬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자신의 치부가 밖으로 튀어나오려 애쓰듯, 몸 안에서 기분 나쁜 울림이 이어졌다. 베릭은 채근하듯 눈썹을 까딱거렸고, 헬나는 아랫입술만 계속 짓이겼다.
“누나?”
“몰라. 나도 어떻게 됐는지. 팔려 가는 중간에 헤어졌거든.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만날 것 같아. 지금 너를 만난 것처럼.”
헬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렸다.
베릭은 한숨을 깊게 쉬더니, 헬나의 사지를 묶은 족쇄를 빤히 바라봤다. 풀어 주고 싶지만, 안 된다. 그것은 곧 자신의 결심을 거스르는 행위이니.
“대체 왜 그랬어?”
“…뭐가?”
“토올룬 편도 아니잖아. 그냥, 우리가 지나가도록 뒀으면 이런 식으로 일이 꼬이진 않았을 건데.”
“그게 쳐들어온 쪽이 할 말이니?”
쳐들어온 쪽. 그 말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헬나의 핏속에 바리엘이라는 나라의 흔적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뜻 아닌가. 그녀에게 조국이란 토올룬이었다. 그렇기에 죽음을 불사하고 황제의 행군을 막아설 생각까지 한 것이다.
베릭은 이를 깨달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누이는 바리엘의 작은 마을에서 꽃 따는 걸 좋아하던 어린아이였는데….
헬나는 뭐가 불편한지 연신 몸을 뒤틀며 부탁했다.
“베릭. 나 이것 좀 풀어 줘.”
“…왜 그런 일을 한 건데.”
“무슨 일?”
“노예 상인.”
헬나는 몸부림을 멈추곤 베릭을 차갑게 쳐다봤다.
“웃기네.”
명백한 조소였다. 헬나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
“황궁에서 좋은 밥, 좋은 대우 받으면서 지내니까 세상살이가 같잖아 보이니? 내가 왜 사람 파는 일을 시작했냐고? 그것밖에 길이 없었으니까!”
콰앙!
헬나의 언성이 높아지자, 천막 바깥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혹시 몰라 베릭을 걱정하는 동료들이 몰려든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끌려가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네가 알아? 난 참 궁금했거든. 사람들은 왜 힘든 사람 등쳐먹기만 하는 걸까. 좀 도와주면 안 되는 걸까. 근데 대가리 좀 크니까 알겠더라. 그게 살아남기 제일 쉬운 방법이었어. 절박한 놈들은 옆구리만 살살 긁어 줘도 훌러덩 넘어오게 돼 있거든. 아! 내가 바리엘에 고마운 게 딱 하나 있었네.”
헬나가 분에 찬 괴성을 질러 댔다. 언뜻 보기에는 베릭을 힐난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나무라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베릭을 마음 깊이 기뻐하지 못하는 데 대한 분노. 동생에게 도란도란 지난날의 삶을 일러 줄 수 없음에서 비롯된 부끄러움.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비집고 올라오는, 살아남고 싶은 욕망…….
이 모든 것들이 한데 뭉쳐, 이제껏 애써 무시했던 그녀의 밑바닥을 훤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바리엘 인간들만큼 꾀기 쉬운 게 없거든.”
“누나. 그만해.”
“베릭. 나 한 번만 살려 주라. 이런 식으로 죽기에는 내가 너무 불쌍하지 않니? 너 보니까 정말 중요한 직책인 것 같던데. 응?”
베릭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중얼거렸다. 헬나가 말을 이을수록, 기억 속의 누이가 지워지는 기분이다.
“왜 이렇게 변했어. 누나.”
“인간은 원래 다 변해. 너도 그런걸? 어릴 때는 건달 몇 명도 못 당했는데 이제는 강해졌잖아. 그때의 너였다면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리도 없고.”
당연히 누나를 살리겠다고, 모든 걸 버리겠다고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헬나가 변한 것처럼, 베릭도 변했다. 지금의 그에게는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베릭. 나 도와줘. 구해 줘.”
그때는 못 구해 줬지만, 지금은 구해 줄 수 있잖아? 헬나의 속삭임이 악마의 그것처럼 베릭의 심장을 간질였다.
헬나는 베릭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아채곤 더욱 깊이 한숨을 섞어 가며 일렀다.
“베릭. 그때의 네가 지금처럼 강했더라면 우리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야.”
그녀의 말에 고개 숙여 울던 베릭이 눈물을 멈췄다. 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 아닌가. 그가 고개를 들자, 헬나가 기대하는 눈빛을 반짝이며 베릭을 주시했다.
“누나.”
“응. 그래, 베릭. 내 동생.”
“그때의 내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어.”
“…….”
“나는, 나는, 누이들과 엄마에게 너무 미안했어. 그래서 강해지고 싶었어. 다시는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베릭은 이안을 떠올렸다.
네가 강했더라면, 네가 조금 더 잘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크로니가 이안에게 속삭였던 검은 숨결과 무엇이 다른가?
베릭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자신이 그렇게 인정하면 결국에는 이안도 그렇게 정의될 것이다. 자신의 잘못으로 크로니에게 당한 무능력한 황제라고.
“그래서 이렇게 됐어. 나는 강해졌고, 지금 내 곁엔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나는! 베릭, 나는!”
“누나도 소중해. 그런데, 누나도 내가 소중해?”
내가 소중하다면 살려 달라고, 모든 걸 버리라고 그렇게 당당히 요구할 수 있어? 진실로? 베릭의 눈가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고여 있던 미련이다.
“…….”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정말로 미안하다고. 그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누나에게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것이 다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서로의 운명을 격려하며 그저 흘려보내고 싶었다.
베릭의 마음 한쪽에서 정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게 헬나에게도 느껴졌다. 다급해진 그녀는 온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안 돼! 베릭, 너, 너는 나를 이렇게 버리면 안 되지! 우리는 피로 이어져 있는데!”
철컥! 철컥!
베릭은 문득 제이럿의 말이 떠올랐다. 헬나임을 알았을 때, 자진하여 그녀를 황제의 앞으로 끌고 갔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 거란 말 말이다.
만약 헬나가 자신을 죽여서라도 네 소중한 걸 지키라 말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이렇게 마음이 식어 내렸을까? 그때도 조금씩 차가워지는 눈길로 헬나를 바라보았을까?
“미안, 누나. 나는-”
베릭이 잠깐 숨을 들이쉬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기척도 줄어들었다. 모두가 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 남고 싶어.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