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33
제733화. 계시 혹은 위로
베릭이 천막을 걷으며 밖으로 나오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친위대원들과 얼굴이 딱 마주했다.
흠칫, 그들은 당황하여 뒷걸음질 쳤지만, 이내 베릭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슬금슬금 다가왔다. 호기심 반, 걱정 반의 낯이었다.
“…우냐?”
“꺼져.”
“그, 뭐라 할 말이 없다.”
“아, 그러니까. 할 말 없으면 꺼지라고.”
“새끼가, 걱정을 해도!”
거친 말과 달리 대원들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들이 아는 평상시의 베릭과 다를 바가 없었다. 속은 검게 타들어가 바스러졌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된 게 정말 다행이다.
대원들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베릭의 어깨를 토닥였다.
“제이럿 대장님이 좀 보자고 하신다. 황제 폐하 처소로 가 봐.”
베릭은 말없이 머리끝만 매만지며 침묵했다. 누이를 앞에 두고 망설였던 행위가 진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지는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방도가 없었던 터라 어쩔 수 없다. 된통 혼나거나, 혹은 실망했다 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친위대에서 쫓겨나겠지. 아아. 이안이한테는 뭐라고 한담.
“먼저 가 볼게. 미안한데, 누나한테 먹을 것 좀 주라.”
…맛있는 걸로. 이는 베릭이 누이에게 전할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친위대원들은 걱정하지 말라며 그의 등을 떠밀었고, 베릭은 꽤 가까운 거리를 한참이나 걸려 도착했다. 혼날 걸 알면서 불려 들어가는 발걸음은 너무도 무거웠다.
“폐하, 황궁친위대 베릭입니다.”
“들라.”
안쪽에서 짤막한 허락이 떨어졌다. 평소와 다름없이 단조로운 음이었으나, 베릭이 듣기에는 아니었다. 그는 기분 나쁘게 울렁거리는 가슴 한쪽을 문지른 다음,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진과 제이럿, 트웰러 그리고 에이린이 앉아 있었다. 방금까지 어떤 대화를 나누던 중으로 보였다.
“부르셨다고.”
“그래, 베릭.”
진은 찻잔을 옆으로 물리며 손깍지로 턱을 괴었다. 황제는 어떠한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침묵을 유지할 뿐.
그도 그럴 것이, 먼저 입을 떼는 것은 베릭의 몫이었다. 베릭은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황궁친위대에 속해 있으면서 황제의 명을 먼저 따르지 않은 것. 나아가 황제의 곁에 있으면서도 이안을 따른 것 등등.
반대로 생각해 보면 자신은 정말 미친놈이다. 미래의 이안이 황제가 되었을 때 그 옆에 있는 친위대원이 이딴 놈이면, 불안해서 어찌 맡겨 두겠는가? 자신은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그런 놈은 갖다 치워 버리라고.
“죄송하다라.”
진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고, 베릭의 뒤통수를 내려다봤다. 언제나 불길처럼 뜨겁게 타오르던 기백이 지금은 완전히 꺾여 있었다.
“누이와 대화는 하였는가.”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는 게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그러면 되었다. 서로 마주 본다고 하여 언제나 대화가 가능한 것은 아니니. 베릭, 일어나서 나를 보아라. 그리고 여기 앉아. 우리는 이제 대화라는 것을 할 것이다.”
톡톡. 진이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베릭은 조심히 일어나 제이럿과 트웰러의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은 정면만을 응시하며 시선을 주지 않았고, 오로지 에이린만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황명은 친위대원의 길잡이다. 오로지 그것만을 보고 가는 것이 맞건만, 베릭 너는 길을 잃은 듯 보여. 하여 말이다, 묻고 싶구나. 베릭, 너는 어디로 가고 싶니?”
이안을 따라 중앙으로 올라왔고, 이안의 제안으로 황궁친위대에 자원했다.
하지만 그다음은?
이안이 없을 때, 황궁에 남아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그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던가? 이는 분명 중대한 사유 중 하나였지만, 오직 그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너를 아낀다, 베릭. 황자였던 시절부터 너는 많은 위험으로부터 나를 구해 주었어. 거기엔 이안 경의 의지도 담겨 있었겠지만, 그건 차치하자꾸나. 여기에는 이안 경이 없으니까.”
진은 싱긋 웃었다. 너를 혼내기 위함이 아니라 진정으로 너의 길을 찾고자 묻는 것이니, 긴장하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 물으마. 너는 어디로 가고 싶니?”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계속 이대로 있고 싶습니다. 황궁은 밥도 잘 나오고, 강한 놈들도 많고, 돈도 꼬박꼬박 잘 주고…….”
베릭의 대답에 제이럿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상황에서 나올 만한 말이던가?
하지만 베릭은 더듬거리면서도 막힘없이 덧붙였다.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 마음에 듭니다.”
이안만큼이나.
진은 그의 대답을 한참이나 곱씹더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베릭. 황궁은 네가 필요하고 너 또한 황궁이 필요하니, 내 물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명심하라. 다음은 없어. 황궁의 규율은 명백하고 확실한 것. 모두가 철저히 마음에 품어야 한다.”
“네, 죄송합니다.”
베릭이 다시금 꾸벅, 머리를 숙였다.
“누이의 처벌에 대해서도 마음먹었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음먹지 않았더라면, 이리 황제의 앞에 무릎 꿇고 있지도 않았을 게다. 바로 누이의 족쇄를 풀어 도망쳤겠지.
진은 한껏 누그러진 투로 되물었다.
“다른 누이가 또 있다 들었는데.”
“누나 말고 동생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근데 누나도 어딨는지 모르는 것 같네요.”
“그래도, 이리 만난 것처럼 언젠가는 만날 수 있지 않겠나?”
“그럼요. 누나도 그렇게 말했거든요.”
베릭과 헬나가 만난 것처럼, 그렇게 우연인 듯 운명처럼 언젠가는 다시 만나지 않을까.
이를 위해서라도 죽었다 생각하고 살지 않을 테다. 살아 있다 생각하며 꼭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헬나에게 했던 것처럼, 동생에게도 사과하리라. 그때라면, 동생이라면, 자신에게 괜찮다고 말해 줄지도 모른다.
“그래. 마음을 추스르고, 원한다면 앞으로 전투에서 열외하여도 좋다.”
“원치 않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진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서 베릭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트웰러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고, 제이럿은 한숨 놓았다며 무의식중에 수염을 쓸어 만졌다.
“뭐요.”
베릭은 자신을 쳐다보는 트웰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상당히 짧지만, 이전처럼 건방진 투는 아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천막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저도 모르게 공손한 자세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트웰러는 되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됐다. 폐하께서 이미 다 말씀하셨는데 내가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베릭, 혹 나를 찾을 일이 있다면 언제든 오거라. 기꺼이 맞이해 주마.”
지랄. 내가 그쪽을 왜 찾아가? 베릭은 눈매를 가늘게 뜨며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마산타르의 공로 때문에 그런 것이니, 확대해석 하지는 말고.”
“확대해석은 무슨. 그게 뭔데요.”
“하하하. 아니라면 되었다. 그럼, 저는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폐하.”
“수고하시게, 트웰러 장관. 아직도 언덕 위쪽엔 토올룬 수도에서 온 작당들로 가득하오.”
“염려치 마십시오. 더는 폐하께 근심을 안겨 드리지 않겠나이다. 제이럿 대장. 인질로 잡힌 바리엘 백성들도 이제는 없는 것 같으니, 지금부터는 제국방위부에 맡겨 주시오.”
“알겠습니다. 장관.”
제이럿은 무릎에 손을 가볍게 올리고서 허리를 숙였다. 모자란 제자로 인하여 소란을 일으켜 미안하다는 눈치였다.
“에이린만 남고 물러가도 좋다.”
“예, 폐하.”
제이럿이 베릭에게 일어나라는 듯 고갯짓했다. 베릭은 슬쩍 에이린을 돌아봤고,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았지요? 괜찮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대는 신께서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리 이르는 미소에, 베릭은 조심히 중얼거렸다.
“에이린, 신세 졌다.”
“예, 저도 신세 진 게 있으니 되었습니다.”
“언제?”
그 반응에 에이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타오마와 함께 작은 마을에 당도했을 때, 신관들에게 쫓기는 자신을 구해 주지 않았나?
‘아.’
사사로운 것은 기억도 못 할 정도구나.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돕고 있기에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 거다. 에이린은 피식 웃었고, 제이럿은 그만 나오라며 베릭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사락.
천막이 걷혔다가 내려앉자, 안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폐하께서 남으라고 하셨으니, 할 말이 있으실 터인데…. 에이린은 조심스레 시선을 들어 황제를 쳐다봤다.
“폐하. 하명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에이린.”
“네, 폐하.”
황제는 잠시 말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내, 조심스레 일렀다.
“…베릭도 그러했지만, 나 또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대외적인 것에 시선이 사로잡혀 본질을 보지 못했거든. 지금의 베릭을 보니 그때 네가 없었더라면 큰일 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과찬이십니다, 폐하. 제가 아니었더라도 폐하께선 분명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리셨을 것입니다. 오히려 일개 병사의 미천한 의견을 들어 주셨으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이안 경에게 들었다. 성기사는 징조를 읽는다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에이린이 황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혹, 말이다.”
“예, 폐하.”
진은 잠시 고민했다. 에이린의 말대로 그녀는 성기사이나 어떠한 직급도 없는 말단 병사였다. 그런 자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것이 황제로서 적절한 행동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에이린 앞에서는 자연스레 마음이 풀어졌다. 어릴 적, 꿈에서 만났던 로버사이드에게 이르는 것처럼.
“베릭이 언젠가 나와 이안 사이에서 고민하는 시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너의 생각은 어떠하지?”
“그리될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보아도 그리 느껴집니다.”
한참이나 망설인 진과 달리, 에이린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역시 그렇구나. 한데 그때가 되면, 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폐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것만큼 소모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림자와 싸워 이기고자 하는 어리석음 같은 것이라 배웠습니다만-”
멈칫. 황제에게 이런 말을 고해도 되나? 에이린은 자신도 모르게 나간 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자신의 답을 원하시니, 이를 수밖에.
“그런 시기가 온다면, 베릭은 폐하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어찌하여?”
“폐하의 뜻이 곧 이안 경의 뜻이니까요. 그리고 반대로, 이안 경의 의미가 곧 폐하의 의미입니다. 두 분은 그런 관계라 들었습니다.”
이안이 진의 현재를 만들고, 진이 이안의 미래를 만든다. 두 사람은 둘이되 하나인 존재. 그러니 당연지사 뜻이 같을 수밖에.
진은 뭔가 알 것 같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미천한 저에게 답을 얻으시려는 폐하의 겸허함은 가히 황송하오나,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하나입니다. 폐하. 심려치 마십시오. 그릇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과정은 조금 아프겠지. 반평생 헤어졌던 누이 하나로도 이리 큰 파문이 일었는데, 황궁에서 물결이 새로이 친다면 분명 모두가 물에 잠긴 듯 괴로워할 터다.
이에 진은 아예 노골적으로 상체를 에이린 쪽으로 기울이며 되물었다.
“그것은 성기사로서의 계시인가, 아니면 신하로서의 위로인가?”
에이린은 잠시 시선을 내리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께서 믿고 싶으신 대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