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37
제737화. 가족놀이
이안은 리본 장식 타이를 가볍게 잡아당기며 거울을 살폈다.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면 이런 장식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사람 일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마법사들 없이 혼자 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쯤, 문이 열렸다.
“잘 어울리네!”
심사장, 메르였다.
그는 심사 업무를 부하에게 맡겨놓고서 바로 이안을 데리고 수도 안쪽으로 들어왔다. 아마 지금쯤 마법사들 또한 바누사가 일러 준 건물을 무사히 찾아갔으리라.
이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메르의 눈동자가 기민하게 반짝였다.
“어디서 팔려 왔어?”
“워낙 여기저기 떠돌아서 한 군데로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자세가 바르네. 손끝도 곱고.”
짤막한 칭찬처럼 들렸으나, 자세히 살피면 의미심장한 발언이었다. 여기저기 팔려 다녔던 노예의 자세가 바르고 손끝이 고울 리 없지 않은가. 이안은 본능적으로 메르가 의아함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여기서 구태여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다. 노예라고 해서 모두가 궂은일만을 하며 사는 건 아니니까.
“가자. 시장님 뵈면 바로 고개를 조아려라.”
“…예.”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마법사들이 바누사와 합류하였다면 왕궁으로 들어가는 길 또한 확보했을 터인데, 여기서 시간을 버리고 있는 게 맞나 싶었던 게다. 당장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리본 따위 내팽개치고 사라질 수 있었다.
째깍째깍. 이안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초침 소리에 시계를 찾고자 고개를 돌렸다. 몇 시일까? 아직 해가 떠 있긴 한데. 아무래도 조심히 움직이려면 밤중이 나을 터.
“귀하신 분이거든. 일개 시장님이 아니란 말이다.”
시장이라는 직책이 어떻게 보면 자신의 관할 구역 내에서는 왕과 같은 존재였다. 출입국 심사관들이 짐마차를 터는 것도 상당 부분 시장에게 상납하기 위함이었다.
이안이 한 귀로 흘려들으며 주위를 살폈다. 자, 그럼 나가는 길은…….
“시장님은 바로 쿠마샤 님의 아버지시거든.”
“……?”
뜻밖의 말에 이안이 멈칫거렸다. 쿠마샤라 하면 토올룬의 왕이다. 한데 그런 왕의 아비라고?
이안이 놀란 눈치를 숨기지 않자, 메르는 웃음을 흘리며 계속 걸으라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 놀랄 건 없어.”
“…왕족이십니까?”
이안은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되물었다. 메르는 지나가는 시종들에게 가벼이 눈인사하며 중얼거렸다.
“왕족은 아니고.”
속된 말로, 딸 팔아서 팔자 고친 작자지. 빈민굴에 있던 쿠마샤가 신하들의 손에 이끌려 왕궁으로 갈 때, 옆에서 군말 없이 지켜보았으니까.
그 후 그는 쿠마샤와 피를 잇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수도 외곽의 시장직을 얻었고, 이토록 떵떵거리며 사는 중이었다. 정작 딸은 왕궁에 갇혀 사람들 얼굴도 못 보고 산다는데.
“뭐. 네가 깊이 알 것은 아니다.”
메르는 그리 말을 자르고서 입을 닫았다. 장난감으로 내던져질 놈에게 굳이 이런저런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지 않나.
이안은 리본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아비만 이르는 것으로 보아 부인을 새로 얻었나 보군.’
저택 본관으로 들어가기 전 판단을 내리는 게 좋았다. 쿠마샤의 혈육이라면, 그에게도 인형술이 걸려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혹여 그의 눈으로 쿠마샤가 이안을 보게 된다면? 이렇게 고생해서 잠입한 노력이 수포가 된다.
하지만.
‘정보를 얻을 수도 있겠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왕의 비밀이라든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이안은 물건 나르는 마차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저기.”
“왜?”
“그럼 제가 왕궁으로 갈 수도 있습니까?”
당돌한 물음에 메르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럴 줄 알았다. 노예치고는 아주 곱게 자랐다 싶었는데, 역시 다른 놈들과는 뭔가 달랐다. 속에 무언가를 품고 있지 않나. 희망, 어쩌면 야망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니 꿈 깨는 게 이로울 게다.”
“그렇습니까?”
서로에게 없는 존재와 마찬가지니까.
아비는 형식적으로나마 그녀의 이름을 간간이 입에 올렸으나, 왕은 단 한 번도 그를 찾지 않았다. 오히려 죽은 사람인 듯 취급하여 선을 확실히 그었다.
여기저기서 주워듣기로는, 왕은 아비에게 썩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는 듯 보였다. 팔아먹은 것도 아니고 신하들의 선택으로 왕위에 올랐건만,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자세한 건 윗분들께서만 아시겠지. 자신은 그저 외곽을 오가는 출입국 심사장일 뿐이니.
끼이익.
메르가 본관 문을 열며 이만 들어가라는 듯 몸을 틀었다.
선택의 순간이었다. 메르의 대답은 시장과 왕 사이의 관계가 그리 깊지 않다는 걸 시사했다. 오히려, 그래, 시장과 왕의 관계가 돈독했더라면 쿠마샤에게 자신을 바치지, 시장의 딸에게 장난감으로 던져 주지는 않을 터.
하면, 아비에게 인형술이 걸려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혈육임에도 거리를 둔다는 건, 일반적인 관계보다 더 깊은 골이 있다는 뜻.’
애증, 혹은 그것을 넘어선 증오. 그도 아니라면, 어쩌면 저 아비라는 작자는 쿠마샤의 약점 조각일지도 몰랐다.
이안은 우선 그를 만나 보는 것이 좋겠다 판단했다. 혹여 들킨다면…….
‘…고생 좀 헛으로 했다 치지.’
이미 수도 안으로 들어섰으니, 그만큼 더 빠르게 왕궁으로 밀고 들어가면 될 일이다.
이안은 그리 결심하고서 메르를 스쳐 지나갔다. 본관 문이 닫히자, 메르는 앞장서서 걸었다.
“절대로 시장님의 허락 전에는 고개를 들지 말 것. 공손하게 행동할 것. 네놈의 목숨줄은 그분의 작은 변덕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고 언제나 긴장할 것.”
메르는 계단을 올라가며 계속해서 주의 사항을 일러주었다. 그러면서 슬쩍 뒤돌아 이안의 낯을 살폈는데, 아무리 보아도 긴장한 구석이 없다.
예상컨대 저놈, 분명히 다른 어딘가에서 윗사람 시중 드는 노예였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도 자연스럽고 당당한 발걸음을 설명할 수있겠나? 뭐, 시장 따님께서 기뻐하실 테니 어찌 됐든 상관없지만.
“심사장님. 어서 오십시오.”
“시장님은?”
“안에 계십니다. 아아. 저것이 그 선물이로군요.”
“말이 참 빠릅니다.”
“별관에 옷을 내어 주러 갔던 아이들이 호들갑 떠는 것을 들었습니다. 괜히 소란 피우지 말라 하였는데, 제 실수였군요. 메르 님의 안목이 이렇게 뛰어난지 제가 미처 몰랐습니다.”
“하하. 기척을 내어 주시지요.”
“예. 주인님, 메르 심사장입니다.”
“…들라.”
허락은 쉽게 떨어졌다. 천천히 문이 열리는 와중, 이안은 책상 앞에 앉아 일하고 있을 시장의 모습을 예상했다. 하지만-
“어어. 메르 심사장?”
시장은 바닥에 앉아서는 카드로 성을 쌓고 있었다. 무릎까지 꿇고서 아주 경건하게. 얇다란 카드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서 쳐다도 보지 않는다.
이안은 깨끗한 책상 위를 힐끔거린 다음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왕의 이름을 팔아 시장직에 오른 자가 일이나 제대로 하겠는가?
촤아악!
“으앗!”
카드 성은 결국 무너졌고, 시장은 체면도 잊은 채 그대로 벌러덩 누워 버렸다.
메르는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시장님.”
“그럼. 당연하지. 저번에 보내 준 고기가 아직도 잔뜩 남았는데, 이번에는 무슨 일인가?”
“따님께서 요즘 적적하시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마침 괜찮은 물건이 있어 가지고 왔습니다.”
“하이고! 세상에! 메르, 당신처럼 아리스를 알뜰살뜰 살피는 자가 없다네. 흐음. 보자, 굉장히 곱상하군!”
“공용어도 곧잘 하고, 배운 흔적이 있어 보입니다. 데리고 노시기에 딱 알맞을 것입니다.”
시장은 벌떡 일어나더니 이안을 한 바퀴 돌며 찬찬히 살폈다. 지금껏 메르 심사장이 갖고 온 물건 중 가히 최상급이라 할 수 있을 게다.
시장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먼지가 잔뜩 쌓인 책상 위에 앉았다. 그 모습이 그렇게 안 어울릴 수 없다.
“이번에는 내가 또 뭘 내어 주면 되려나? 응?”
“오, 아닙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 오는 것에는 가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체면만 없는 줄 알았는데, 생각머리도 없군. 아랫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대가를 운운하다니. 이안은 눈을 슬쩍 내렸다. 이곳이 바리엘이 아닌 것을 저들은 깊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하하. 다름이 아니라 심사관들 월급 동결이 벌써 석 달째입니다.”
세 달째 월급이 오르지 않았다는 기상천외한 주장이다. 아마 바리엘 본대가 버고스에 있었을 때부터 점진적으로 나라에 균열이 갔던 듯싶다.
시장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건 진작 말하라니까, 이 사람, 참.”
“워낙 공무가 바쁘셔서 뵙기가 쉽지 않습니다.”
“으응. 그런 말 마시게.”
그때였다. 집무실 안쪽에 달려 있는 작은 방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문틈으로 모습을 보인 것은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아이는 까만 눈동자와 머리칼을 갖고 있었는데, 이안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연신 쳐다봤다.
“오, 아리스!”
저 아이가 시장의 딸인가 보군. 이안은 아이의 모습에서 쿠마샤의 외모를 가늠했다. 어느 정도 피가 섞였으니, 닮은 구석이 있지 않을까?
“아빠?”
“이리 와 보련. 메르 심사장이 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란다.”
아리스는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이안을 빤히 쳐다봤다. 아이의 눈동자가 반짝반짝거렸다. 마치 별이 박힌 밤하늘 같다. 필시 이안이 마음에 든 것이리라.
메르는 만족스러워하며 아이에게 제안했다.
“아리스 님. 괜찮으시면 이놈에게 이름을 지어 주시고, 함께 정원에 나가 놀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돼?”
“물론입니다. 아리스 님의 것인걸요. 말놀이를 하시든 소꿉놀이를 하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아이의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진짜 재밌고 예쁜 장난감을 얻었다는 흥분감에 볼이 붉어졌다.
“가자!”
아이는 이안의 손을 붙잡고 급히 달려갔다. 어른들의 대화를 좀 더 듣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안은 아이를 따라 정원으로 나갔고, 그러는 와중에도 계속 저택 구조를 파악했다.
“이것 봐라!”
아리스는 정원 옆에 쌓아 둔 자신의 장난감을 보여 주며 자랑했다. 이안의 반응을 바라는 듯이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한참 고민하던 이안이 두어 번 가볍게 박수 치며 칭찬했다.
“…컬렉션이 좋습니다.”
“그게 뭔데?”
“마음에 드는 것을 모아 둔 것이요.”
“아아! 되게 어려운 말을 쓰네. 잘난 척 대마왕이신가?”
아이는 그러면서도 팔짱을 끼며 잘난 척 고개를 쳐들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너도 그 컬렉션 중 하나다! 아이는 당당하게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말놀이부터 하자. 엎드려!”
하지만 이안은 그런 아이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엎드리지 않았다. 잠깐의 고민 끝에, 이안의 팔이 허리에 얹어졌다.
“뭐 해? 말놀이 몰라?”
“말놀이는 압니다만, 안 됩니다.”
“엥? 뭐라고?”
“안 된다고요.”
이안은 단호하게 손가락을 가로저으며 말했고, 아리스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눈을 끔뻑거렸다. 당장이라도 하인들에게 말해서 이놈을……!
“대신, 가족놀이를 해 봅시다.”
이놈을…….
“가족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 듣기로는 아주 귀하신 분이라 하던데.”
잘생긴 이놈을…….
“왕과 자매시라고?”
매우 쳐라! 하고 싶지만, 아리스는 잘생긴 이안의 미소에 넋을 놓았고,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맞아. 내 이복누이가 왕이라고 했어. 우리 아버지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