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51
제751화. 안대를 벗고
바르사베는 조심스럽게 제복을 정돈했다. 눈앞을 가린 검은 천을 더욱 세게 조였고, 손끝으로 검날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차갑고, 서늘한 감각이 뇌리까지 스며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러니까 왕궁 앞을 바리엘군이 점거한 후 어둠이 내려앉았음에도 안에서는 어떠한 반응이 없다.
“바르사베 대원님. 준비되셨습니까?”
“그래. 가지.”
그녀는 천막을 걷었고, 이내 보이지 않는 시선들을 느꼈다. 바르사베와 함께 궁으로 들어갈 수색병들이었다.
그들은 한껏 긴장한 채로 몸을 뻣뻣이 굳히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구조 파악이 하나도 안 된 적군의 건물로 들어간다는 건 죽음을 각오한 임무였기 때문이다.
“왕궁 구조를 아는 자들은 아직 못 찾았나?”
“예, 마법부에서 처치한 병사 중 숨 붙어 있는 자들이 몇 있습니다만, 왕궁 밖 훈련소 소속이라 내부는 잘 모른다고 합니다.”
왕궁 안으로 들어서면 눈을 가린 바르사베나 멀쩡히 눈 뜬 병사들이나 다를 바 없단 의미였다.
그녀는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진동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벽에서 벌어진 친위대와 술사들 사이의 전투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다들 무사하다는가?”
“크고 작은 부상 외 다들 무사하신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바르사베는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긴장하고 싶진 않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본능적 반응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한 걸음 내딛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니. 하지만.
‘그걸 해내는 것이 나의 소명.’
“바르사베.”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바르사베가 고개를 돌렸다. 진이었다. 황제는 친히 가까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가볍게 격려했다. 어깨를 쥔 손아귀에서, 살아 돌아오라는 무언의 명령이 전달되었다.
“왕궁 내부 구조 파악과 이안 경 일행의 상황 파악, 그리고 나아가 토올룬 왕의 위치 확인이 우선적인 임무임을 잊지 말라.”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네가 들어간 후, 세 시간이 지나도 보고가 없다면 다음 수색대를 보낼 것이다.”
“예, 폐하.”
“…돌아오면, 그땐 시선을 맞추어 인사하자꾸나.”
눈을 되찾아 오렴. 하여, 다시금 세상과 어울려 살아가자.
진의 다정한 배웅에 바르사베는 울컥 눈물이 치솟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각 잡힌 손날로 경례하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처억!
“문은?”
“부서져 있습니다.”
이어서 ‘베릭 님이 박살 낸 것 같습니다’ 하는 희미한 덧붙임이 들려왔다.
그러자 보이지 않아도 보였다. 어떤 식으로 문이 나가떨어져 있는지. 바르사베는 희미하게 웃으며 검을 다잡았다.
“들어간다.”
앞장서서 걷는 바르사베. 그녀를 횃불 든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뒤따랐다.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는 검사다. 설령 함정이 있다 한들, 바르사베라면 분명 눈치챌 수 있으리라.
왕궁 안으로 들어서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진은 작게 한숨을 삼켰다.
* * *
타닥타닥!
“어둡습니다.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천천히 기록하며 이동한다!”
“본관과 이어진 복도가 네 갈래입니다.”
“제일 끝 복도부터 살펴볼 것이다.”
끼이익.
본관으로 들어서자, 바르사베는 천천히 안대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그것을 벗겨 내며 고개를 들었다.
지잉!
오래도록 어둠에 잠겨 있던 남색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토올룬의 왕이시여, 보고 계시는가? 나는 그대의 턱밑까지 다가왔다. 나를 통해 세상을 보는 짓도 곧 무의미해지리라.
“바르사베 님. 뭔가 느껴지십니까?”
“아니. 전혀.”
그에 수색병들이 길을 따라 흩어지며 횃불로 곳곳을 밝혔다. 의아하다 못해 기이했다. 사람의 흔적이 증발한 듯,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았다. 이안을 비롯한 마법사들은 물론, 토올룬 왕궁에서 살고 죽었을 시종들까지.
바르사베는 이 안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사악!
“……?!”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려왔다. 바르사베가 빠르게 검을 겨누며 주위를 살폈다. 복도 끝에서 그림자가 길게 지더니, 이내 익숙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바르사베!”
“베릭?”
바르사베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저기 좀 긁힌 상처 외에, 그는 무사해 보였다. 덩달아 긴장하던 병사들도 무기를 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바르사베는 검을 내리지 않았다.
“너, 여기서 뭐 해?”
“뭐 하긴. 이안이 따라왔다가 길 잃었지.”
“어쩌다 길을 잃어? 갈라졌나?”
“어어. 왕궁에 마물이 있더라고. 이안이랑 헤일 일행이 먼저 가고 나머지가 남아서 정리했어. 북산으로 간 것 같아.”
“북산…….”
바르사베가 의아한 낯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베릭은 어깨를 빙빙 돌리며 그녀를 지나쳤다.
“힘들어 죽겠네, 젠장. 밖은? 폐하하고 다 계셔?”
“그래. 왕궁 앞을 점거했는데도 왕궁 쪽 반응이 없어 내가 직접 들어왔다. 그런데 베릭.”
“응?”
잠시 뜸을 들인 바르사베가 고개를 기울였다.
“북산이 뭔데?”
왕궁 내부에 북산과 이어진 비밀 통로가 있다는 사실은 바르사베에게 전달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베릭은 당연히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는 듯 행동하지 않았나. 뭔가 이상했다.
또한 그것만이 아니라…….
“그리고 너, 왜 배고프다는 말을 안 해?”
“너무 힘들어서 그런다! 힘들어서! 별것 아닌 거로 트집이네.”
“아니-”
힘들어 죽겠다는 말이 나올 상태면, 그 전에 배고프다는 말이 먼저 나와야 하는 놈인데. 잠깐만, 게다가…….
‘어금니라고도 안 부르고.’
요즘 들어 덜하긴 했어도, 호칭에도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안 경이 북산으로 갔다면 당연지사 이놈도 임무를 수행하자마자 그쪽으로 가려 하지 않겠나?
편견이라기엔 하나같이 사실을 기반으로 한 추리였기에, 바르사베의 미간은 자연히 찌푸려졌다.
“베릭, 너 이리 와 봐.”
“아나, 진짜. 귀찮게.”
베릭이 인상을 찌푸리며 바르사베에게 다가왔다. 그러고서 보란 듯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 것 아닌가.
두 사람은 그 상태로 시선을 나누었다. 시간이 갈수록 바르사베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야.”
베릭? 지랄하고 자빠졌네.
“왜. 뭐.”
“…뒤질래?”
촤아아악!
아래에서 위로, 바르사베의 검이 기습적으로 베어 올려졌다.
검 끝이 아슬아슬하게 베릭의 턱을 스쳤다. 황급히 뒤로 물러서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얼굴이 갈라졌을 터.
“바, 바르사베 님!”
“허억!”
놀란 병사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소리쳤다. 아니, 갑자기 왜 저러시지? 평소에도 서로 살벌하게 싸우긴 했지만, 저 정돈 아니지 않았나?
“바르사베, 미쳤어?”
“가면 벗어. 찢어발기기 전에.”
“미치겠네. 이봐, 너! 당장 나가서 보고해. 바르사베가 미친 것 같다고. 왕궁 내부에 보이지 않는 술수가 있는 것 같으니까 다른 자들의 접근을 제한하는 게 좋겠다 일러라.”
“아, 그, 그것이…….”
병사가 바르사베를 힐끔거리며 망설였다. 그녀의 행동이 문제 되는 건 맞지만, 그들은 지금 바르사베의 아래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아닌 베릭의 명령을 듣는 것이 맞는 판단일지…….
“듣지 마라! 이놈은 베릭이 아니다!”
“봐 봐, 미쳤다니까? 나를 못 알아보잖아. 너희들도 알아보는 나를.”
“바, 바르사베 님. 어찌하여 그런 판단을 하셨는지 알려 주십시오.”
“예, 저희가 보기에는 베릭 님이 확실한지라.”
“겉모습은 그러하겠지. 하지만 내 눈은 못 속인다. 분명 마물이거나 술사의 수작이다.”
“그러니까, 대체 왜-”
“베릭이라면! 내 눈을 보고서 한마디 했을 것이다.”
그녀가 밖에서 얼마나 오래, 그리고 철저히 시각을 통제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니까.
아무리 캄캄한 왕궁 내부라 해도, 안대 벗은 걸 봤다면 필시 한마디 덧붙였을 거다. ‘이제야 눈깔 정상으로 돌아온 거냐’라거나, ‘안대는 냄새 나서 빨래 맡겼냐’는 식의 시답잖은 농담 따위를.
바르사베의 설명에 병사들이 멈칫거렸다. …저게 이유가 되나?
지이잉!
“참 나. 이래도?”
베릭이 마력을 개방하자, 그의 붉은 기운이 삽시간에 주위를 가득 채웠다. 병사들이 기함하며 그를 말려 댔다.
“베릭 님! 여기서 힘 쓰시면 저희 다 죽습니다!”
“그러니까 죽기 싫으면 당장 나가서 내 말 전달하라고.”
“바, 바르사베 님! 우선 진정하시고-”
베릭이 진짜임을 주장할수록 되레 바르사베는 확신했다. 저것은 가짜라고.
“네 정체가 뭔진 모르겠으나 바리엘군의 왕궁 진입을 막으려는 게 목적이겠지? 미안한데, 우리 베릭은 빡대가리라서 그런 것까지 생각 못 해. 지금도 마찬가지, 네가 진짜였으면 그냥 나를 패서 때려눕히는 걸 택할 놈이거든.”
바리엘군의 왕궁 진입 저지! 이에 병사들은 새로이 깨달았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뭐, 어쨌거나 바리엘군의 추가 진입은 불가하게 되었군.’
마물인지 술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완벽히 흉내 내는 놈이다. 괜히 안으로 들어섰다가 혼란을 가중할 수도 있고, 여차하여 황제 폐하의 모습까지 따라 하게 되면 상당히 곤란했다.
바르사베는 손끝을 까딱거리며 웃었다.
“마력 개방하는 걸 보니 겉으로만 흉내 내는 건 아닌 것 같고.”
“하. 참 나…….”
“어디까지 유지되는지 한번 보자고, 응?”
그러자 베릭이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순식간에 달라진 분위기. 병사들은 검을 다잡으며 그를 슬금슬금 포위했다.
“쉽지 않네, 진짜.”
베릭의 말이었다.
황제의 곁에 접근하기 쉽고, 그렇다고 중책은 아닌지라 이목이 끌리지 않으며, 평판이 낮아 실수한다 한들 대충 넘어갈 수 있는 작자.
그리고 무엇보다 미친 듯이 강한 놈이었다. 작정하고 싸우면 말릴 수 있는 이가 거의 없을 만큼. 그래서 베릭이라는 놈을 골랐건만, 이리 처음 마주치자마자 들키다니.
바르사베는 비릿하게 웃으며 자세를 낮췄다.
“나는 좀 고마워.”
진짜 별말 없이 지나갔으면 못 알아챌 정도로 똑같았다. 그래서 더 고마웠다.
“한 번쯤, 베릭 새끼 진짜 개 패듯 패고 싶었거든.”
“하! 이 새끼는 어딜 가나 적이네.”
“너, 어금니는 있냐?”
“어금니?”
베릭이 혀로 볼 안을 훑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왜?”
“왜긴-”
타앗!
바르사베가 있는 힘껏 마력을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어두웠던 왕궁 주위가 순식간에 환해졌고, 이를 막아서려는 베릭의 낯엔 그림자가 짙게 일었다.
“나도 베릭 어금니 좀 털어 보게!”
콰아앙! 쾅!
퍼어어엉!
그 시각, 왕궁 바깥.
왕궁 안에서 울려온 느닷없는 진동에 진이 멈칫거리며 일어났다. 트웰러 역시 걱정스레 그를 따랐다.
“…만났군.”
“예, 폐하. 그런 것 같습니다.”
왕궁 내부에 뭔가 있긴 있구나. 바르사베가 들어간 직후 나온 반응이니 이는 바르사베의 전투라 생각하는 게 옳다.
그렇다면 이안 경과 마법사들은 대체 무엇을 하기에 이리 조용한 것일까. 왕궁 내부에 ‘무언가’가 있음에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불능의 상태란 뜻일까? 진이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깨물자, 트웰러가 넌지시 물었다.
“폐하, 추가 병력을 투입하겠습니까? 보호막도 중요하지만, 일정 수준만 유지하는 쪽으로 하면 두어 명 정도는 더 들여보낼 수 있습니다.”
“아니. 바르사베에게 일렀던 대로 보고를 기다린다. 괜히 추가 투입했다가 혼란이 일 수 있으니.”
“예. 옳으신 판단이십니다, 폐하.”
트웰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판단을 지지하는 순간이었다.
‘음?’
왕궁 본관을 중심으로 건물 전체가 환해졌다. 어둠에 잠겨 있던 터라 그 변화가 한눈에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가만 지켜보던 진은 저 멀리 보이는 기이한 움직임에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저것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빛을 등에 업고서 일어나는 거대한 그림자. 그들은 본능적으로, 저것이 이 전쟁의 마지막 난관임을 알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