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52
제752화. 어디에나 그림자는 진다
“읍쓰.”
마법사들이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신음을 흘렸다. 어지간해서는 마물 따위에게 동정심 같은 건 들지 않을 것인데,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광경은 ‘어지간한’ 상황을 아득히 뛰어넘은 상태다.
마물의 검은 피를 잔뜩 뒤집어쓴 이안이 거친 숨을 내쉬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콰직! 다시 한번 놈의 머리가 으깨지며 흘러내렸다.
“이, 이안 님.”
“…….”
“더러우니 그만하십시오”
헤일의 만류에 이안이 고개를 기울여 돌아봤다. 그의 손에 들린 마물 거죽. 반이 찢겨 나가 형태만 겨우 유지한 채 너덜거렸다. 찰나였다. 분노에 찬 이안에 마물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그대로 찢어 버린 것은.
투욱.
이안은 마물 사체를 가볍게 내던지더니, 손끝을 탁탁 털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진득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방금까지 사특하게 혀를 놀리던 마물은 미동조차 없다. 고작 이러기 위해 그리 방종하게 나섰단 말인가? 우습지도 않다.
“손수건.”
이안이 헤일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손이 더러우니 주머니의 손수건을 대신 꺼내 달라는 뜻이었다.
헤일이 안주머니에서 대신 꺼내어 건네자, 이안은 대충 손과 목덜미를 닦아 냈다.
‘이안 님 화나니까 진짜 무섭다.’
‘베릭, 네가 어떻게 좀 해 봐.’
‘내가 뭘? 이럴 때는 걍 닥치고 있어.’
마법사들과 베릭이 시선을 주고받으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뭐랄까. 방금 이안이 보여 준 분노는 지금껏 보았던 것들과는 결이 달랐다. 생생하고, 폭발적이며, 거칠어서 다잡을 수 없는 감정의 원색과 같았다.
대충 마물 피를 닦아 낸 이안이 고개를 쳐들며 일렀다.
“보고 있을 거라 생각된다.”
토올룬의 왕에게 이르는 말이었다.
“하찮은 마물 따위로 어찌할 생각은 그만하고, 모습을 보여라. 그렇지 않으면 네 왕궁은 통째로 지워진다. 그리고 맹세하건대, 널 왕이라 따르고 머리를 조아렸던 모든 것들 또한 죽일 것이다.”
너에게 그림자의 분신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자아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나라를 생각해서 모습을 보이라는 경고다.
허공에서는 답이 없다. 주위는 여전히 적막했고, 이안의 음성은 어디론가로 흩어져 버렸다.
“이안 님. 반응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북산 쪽으로 수색을 틀어 보시는 게…….”
끼이익!
끼익!
그때였다.
왕궁의 열려 있던 문들이 모두 동시에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안 일행이 서 있던 뒤쪽의 문도 마찬가지.
콰앙!
바람이 들이닥친 것도 아닌데, 문짝이 부서질 듯 닫혔다.
마법사들이 긴장하며 경계를 강화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달빛만이 희미하게 흘러들어 왔다.
반짝!
“옵니다!”
촤아악!
마법사들 위로 왕의 공격이 비처럼 쏟아졌다. 수십, 수백, 혹은 수천 개에 달하는 바늘이 그들을 압사시킬 것처럼 떨어진 것이다.
지이잉! 지잉!
마법사들이 보호막을 유지하는 한편, 헤일과 베릭 그리고 이안은 그것들을 부수기 위한 마력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이안 히엘로.”
한쪽에서 들려오는 청명한 목소리. 어느새 나타난 쿠마샤가 손끝에 실을 잔뜩 묶은 채로 서 있었다.
“아니면 이안 베로시온. 뭐라고 불러 줄까?”
촤아악!
백색의 머리칼과 흰 피부, 그리고 붉은 눈동자. 생각보다 더 작은 아이의 모습에 마법사들은 당황하여 잠시 멈추었다. 지금껏 인형들 뒤에 있었던 자가 저리도 어린아이였다니.
제일 먼저 반응하여 달려 나간 것은 이안이었다.
“그 무엇도-”
눈앞에 적이 있다. 100년 후의 바리엘을 구할, 검은 씨앗의 근원이.
이안이 공중에 붕 떠올라 허리를 돌렸다. 마력을 응축시킨 주먹이 궤를 그리며 왕에게 날아들었다.
“-입에 올리지 마라.”
콰아아앙! 쾅!
그리고 그런 이안의 앞을 막아서는 낯선 인간 셋. 마법사들이었다. 옷차림으로 봐서는 토올룬 사람인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하여 제국민도 아니다.
“습관을 고치기는 힘들지.”
토올룬의 정령술사 가문을 들들 볶아 내어 확보한 용병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이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릿하게 웃었고, 왕은 손끝에 달린 줄을 이용하여 세 마법사를 동시에 움직였다.
“이안 님! 맡겨 주십시오!”
“이놈들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마법사를 세워 놓긴 했으나, 이전처럼 금기의 마법을 사용하지는 못할 터다. 루스웨나에서 다르시 부인을 통해 지배할 적에도 부작용을 심히 겪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그러했다간 중간에 여과하는 자가 없어 부담이 배 이상으로 다가오리라.
지이잉! 지잉!
마법사들끼리 힘을 겨룰 때마다 주위가 번쩍번쩍 빛났다. 이안은 그들에게 뒤를 맡기곤 왕 쪽으로 돌아섰다.
아이가 손끝을 까딱거리자, 거대한 기둥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콰앙! 쾅! 콰아앙-!
타닷!
이안은 기둥을 피하고, 그 위를 내달리며, 불가피하다면 즉시 박살 내 버렸다.
…왕과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이안이 손을 뻗자, 아이의 주위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아.’
바누사를 산 채로 잘라 버렸던 그 줄이다.
이안이 이드갈 검으로 그걸 베어 내려고 하자, 베릭이 불쑥 나타나 대신 휘둘렀다.
“이안아아! 가라아아!”
그래, 간다.
드디어 마주했다. 둘 사이엔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 쿠마샤는 이안이 다가오는 것을 담담하게 지켜보더니, 손끝을 가볍게 들었다.
“베로시온.”
멈칫. 아이가 베로시온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마치 거미줄에 엉킨 것처럼 이안의 사지가 묶였다. 보이지 않는 줄이 또 있었나?
아이는 상체를 서서히 숙여 이안의 이마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너나 나나 같은 처지인 것을, 어찌 모르니.”
헛소리. 입 다물라 외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모든 근육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왕의 붉은 눈동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홍염의 눈빛이다. 아이는 분명 앞에서 말하고 있는데, 목소리는 뇌 아래 어딘가에서 울리는 것 같다.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장기 말과 같은 운명이다. 베로시온, 너는 그림자를 없앨 수 없음을 알고 있지. 빛이 있다면 언젠가는 그 아래 그림자가 드리울 수밖에 없으니까. 신이 있는 한 그림자는 죽지 않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하는 것이다. 그림자의 어둠이 커지지 않도록 죽이려는 게다. 죽이지 못한다면 가려서라도 제 사명을 다하려는 게다.
“베로시온. 네 존재 의미가 다하면 신은 너를 지워 낼 것이다. 그럼에도 이 검을 휘두를 것인가? 이전의 너와 지금의 넌 많이 다를 것인데?”
이 또한 안다.
하나… 소중한 것들이 많이 있지 않나.
이안의 머릿속으로 강렬한 이미지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법사들의 시선, 황궁의 볕, 회의장의 사락거리는 소음, 베릭과 로만드로의 장난, 진의 뒷모습…. 마치 잊지 말라고, 잊어서는 안 된다고 외치듯이 말이다.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쉬었다.
“그러니 베로시온. 여기서 그만두어. 그리하면 신과 그림자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공생할 것이고, 네 삶 역시 이어질 테니.”
아이의 속삭임이 더없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주위가 느려지고, 시간이 일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아, 그래. 이것은-
‘그것이로군.’
베릭의 머리를 동강 떨어트렸다는, 라주 대신관의 능력.
“이안아아아!”
늘어지는 베릭의 부름이 들려왔다. 이어서 목덜미에 느껴지는 억센 손아귀. 누군가 그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확 잡아챈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콰아앙!
이안이 있었던 자리에 거대한 기둥이 떨어졌다.
“…….”
“왜 멈췄어?”
“아.”
이안은 멍하니 선 채, 제 손을 내려다봤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간의 흐름도, 윙윙 울리던 소음도, 달콤함에 젖어 있던 마음 어딘가도.
이안은 베릭을 빤히 쳐다봤고, 베릭은 능글맞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내가 너 살렸다잉.”
“베릭! 그만 까불고 움직여!”
“이안 님! 문제 있으십니까?”
콰아앙! 쾅!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소매를 걷었다. 문제? 없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 자리에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도록.”
어리석긴. 저 사특한 것의 말에 순간이나마 혹했다는 게 참 어리석다.
환각의 힘인가? 알 수 없다. 하나 분명한 건 여기서 그만둔다면 자신의 바리엘은 사라진다.
이안은 마법사들에게 경고했다.
“-그리고 왕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마라. 환각에 빠진다.”
“예, 알겠습니다!”
마법사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어차피 용병 마법사들 상대한다고 정신없는 터라 다가갈 수도 없지만 말이다.
한편, 바누사는 마법사들이 전투를 이어가는 동안 계속해서 주위를 둘러봤다. 왕이 모습을 보였으니 이는 어느 정도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았다는 뜻 아니겠나. 환각술을 인근에 발동시킨 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할 것인데.
‘어쩌지? 어쩌면 저자를…….’
아. 맞아. 지하에 토올룬 수도를 축척해 만든 모형이 있다. 왕의 모든 공격은 그곳을 통할 터. 지금 떨어지는 기둥 따위도 분명 그를 이용한 공격일 것이다.
바누사는 기척을 숨기고서 몸을 액체로 바꾸었다. 이윽고 그녀는 바닥의 틈으로 스며들었고, 연달아 울리는 진동을 온몸으로 느꼈다.
‘보인다.’
지하에 널브러진 시체와 함께 덩그러니 놓인 모형이 보였다.
그녀는 틈으로 몸을 쏙 빼내 착지했고, 이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시체들을 살폈다. 하나같이 심장 부근이 꿰여 죽었다. 마물의 짓인가?
스윽.
그녀는 몸을 돌리려다가 다시 시체들을 쳐다봤다. 왕궁 내 신하들의 몸을 가르고 나온 게 마물인가?
그렇다면 혹, 이안이 왕을 가르게 된다면… 무엇이 나올까? 그저 미련 많은 죽음이 왕을 덮칠 뿐일까? 아니면…….
“젠장할.”
콰아앙!
지하가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바누사는 어깨를 굽혀 바로 검을 꺼냈고, 곧바로 수도 모형을 박살 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위층에서는 이안의 이드갈 검이 쿠마샤의 심장을 꿰었다.
촤아악!
아이의 몸에서 나온 피가 흰 의복을 빠르게 적셨다. 베릭과 마법사들 모두 피가 터지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되었나? 이안의 검이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으니 그래야 할 것인데.
하지만 이안의 표정이 묘했다.
덩달아, 피 흘리는 왕의 표정도.
“이안 베로시온. 내가 분명히 일렀잖아.”
꽈악.
아이는 이드갈 검을 두 손으로 단단히 쥔 채 중얼거렸다.
“이것은 네가 자초한 일이다-!”
쿠웅! 쿵!
공간이 응축되어 비틀렸다. 중력이 가중되며 그들을 짓눌렀고, 정신을 잃으면 금방이라도 찌그러져 죽을 것처럼 심장이 턱 하고 막혔다.
보호막으로 어쩔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들을 에워싼 시공간 자체의 위력인지라, 마법사들은 무릎 꿇은 채 계속 피를 게워 낼 수밖에 없었다.
“커헉!”
“커어어억!”
쿠구구궁-! 쿵!
이안도 마찬가지. 그의 입가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이를 가만 내려다보던 왕은 입매를 단단히 굳힌 채 이드갈 검을 박살 내 버렸다.
째앵!
순간 균형을 잃은 이안이 몸을 비틀며 뒤로 물러서자, 쿠마샤의 손에서 가늘고 긴 무언가가 솟구쳤다. 이드갈과 같이 호박색을 띠지만 조금 더 붉은, 탁한 무언가.
“이드갈에도 그림자는 진단다.”
그러기 위해 일정 조건이 필요했을 뿐.
쿠마샤는 이안과 같이 검을 쥐고서 처음으로 걸음을 떼었다. 마법사들과 베릭은 아이의 몸놀림을 시선으로 쫓을 수밖에 없었다.
“이안 님!”
콰지지직! 콰아앙!
그 순간 이안의 이드갈과 쿠마샤의 검이 부딪쳤고, 뜨거운 파열음과 함께 세상이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