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56
제756화. 헤쳐 나갈 길
-절망 저편에서 피어난 작은 꽃, 그것은 희망이로다.
토올룬의 백성들은 몸을 웅크린 채 경전을 탐독했다.
꼼짝없이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 성벽은 무너졌고, 제국군들은 끝도 없이 밀고 들어왔으며, 왕궁에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왕이 나라를 버렸나? 그랬다면, 우린 무엇을 할 수 있나? 문을 단단히 막고, 가족들과 이마를 맞댄 채 숨죽여 우는 수밖에.
자신의 운명이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얼굴 모를 황제에게 달렸다는 사실이 진실로 비참했다. 영원처럼 계속될 것 같은 미래가 실은 환상이었음을 실감했다.
“기도하자.”
하여, 매달렸다. 자신들을 안타깝게 여겨 길을 내어 달라고 신께 기도하며 울부짖었다. 수만 가구에 달하는 집마다 경전 읽는 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쿠구구구-!
콰아앙!
세상을 무너트릴 것 같은 굉음이 들리자, 드디어 때가 왔나 싶었다. 분명히 바리엘 마법사들의 힘이겠구나, 그놈들이 기어이 토올룬을 절멸시키려는 것이로구나. 백성들은 몸을 떨었다.
“…엄마.”
“이리 와! 창문에서 떨어져!”
“저, 저것 봐요.”
“…아.”
세상에.
창문 틈으로 들이밀었던 동공이 커졌다. 왕궁에서 솟아난 검은 무언가가 사람의 형체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저것이 자신들의 부름을 듣고서 나타난 신인 줄도 모르고, 그저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마, 마법사들이 덤벼들고 있어!”
“신! 신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그림자가 토올룬의 편에 선 자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마음속에서 시들어 가던 희망의 꽃이 단숨에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나서자! 우리가 바리엘군을 몰아내자!”
“무기를 드십시오! 뭐든지 좋습니다!”
타앗!
숨어서 목숨을 보전하던 자들이 하나둘 거리로 뛰쳐나왔다. 무장한 바리엘 병사들에게 검을 휘두르고, 맨몸으로 달려들어 귀를 물어뜯었다. 토올룬 병사들의 피 위로, 적들의 피가 점차 덧씌워졌다.
아아! 역시!
‘신은 존재하는구나.’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어!’
촤아악!
죽어 가는 자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웃었다. 검은 그림자는 거대하여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닿았으니, 참으로 영광스럽고 만족스러운 죽음이었다.
“몰아냅시다! 우리가 지킵시다!”
“와아아아아!”
기세가 단단히 선 자들이 의기투합하여 몸을 내던졌다. 마법사들의 고전을 지켜보느라 정신 팔려 있던 병사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넘어졌고, 한번 넘어진 자들은 일어서기가 어려웠다.
온 거리가 토올룬 백성들로 가득 찼다. 아무리 검을 휘두르고 창으로 밀어내려 해도 죽음을 불사한 자들이 온몸을 부딪치며 밀고 들어오니 버티기 힘들었다.
“죽여라! 죽여! 바리엘을 죽여라!”
“히익!”
부우우-!
부우-!
그때, 어디선가 물소뿔이 울렸다.
흥분한 군중들에게는 들리지 않았으나, 바리엘 병사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하여 바로 인지했다. 이는 신호였다. 아군의 역습이 시작될 거라는.
촤아악!
넘어진 병사를 죽이려던 주민의 목이 댕강 떨어졌다. 피 분수가 터져 눈앞이 흐릿해졌지만, 위엄 있는 검 끝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이내, 자신에게 직접 손을 내미는 은발의 사내.
“폐, 폐하?”
“일어나라.”
바리엘 제국의 황제, 진 베로시온이었다. 얼굴을 가르는 상처와 금실 웃옷으로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황제는 친히 병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고는, 망설임 없이 아수라장 속으로 내달렸다.
“갓난아이 외 모두 죽여라! 기도할 줄 아는 자들은 남김없이 절멸할 것이다!”
황제의 검은 거침이 없었다. 가끔 눈물 젖은 여인과 아이가 그를 올려다볼 때마다 숨이 막혀 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저들을 죽이지 못하면 바리엘이 죽는다. 절멸시키지 못하면 바리엘이 절멸한다.
“…폐하!”
“폐하? 화, 황제다! 황제가 나타났다!”
“저기! 은빛 머리칼의 사내!”
“죽여! 저자만 죽여도-!”
황제가 친히 여기까지 걸음 하여 모습을 보였으니, 이는 기회다. 진의 존재를 인지한 자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그에게 덤벼들었다.
푸욱!
하지만 선두에 섰던 자의 목이 단번에 찢겼다. 트웰러의 도끼가 빠르고 정확하게 적들의 숨을 끊어 냈다.
“불을 질러라! 건물 안에 숨은 자들도 죽인다!”
장관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가까운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반항하며 대응하던 주민들이 병사들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며 저주했다.
“어찌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아이들을 보내 주오! 제발!”
“짐승만도 못한 것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라면 지킬 선이라는 게 있소! 황제는 듣고 있는가! 그대는 잔혹한 폭군이요! 바리엘의 역사에서는 빛날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역사에서는-!”
“그대는 인간이길 포기한 자란 말이오!”
여기저기서 날카로운 울음과 비명이 날아들어 진의 심장을 흔들었다. 트웰러가 그를 힐끗 보았으나, 겉으로는 심경을 짐작할 수 없었다.
진은 계속해서 핏물을 뒤집어썼으며, 상대라 이르기에도 민망한 자들을 학살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다들 보아라! 그대들의 곁에 누가 있는지!”
나, 진 베로시온은 분명히 기록될 황제다. 100년 후의 이안이 존재로써 일러주지 않았나. 바리엘은 여기서 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갈 것이라고. 버고스에서 모두가 함께 목도하였거늘, 어찌하여 두려워하는가?
“나 진 베로시온, 황제의 이름으로 명할 것이다! 주저하지 말고 베어 내라! 신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신다!”
혼란스러운 병사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직접 보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물러서지 않았고,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의 승리는 예정되어 있노라고.
이에 혼비백산으로 정신없던 병사들이 무기를 다잡고 황제의 뒤를 따랐다.
“와아아아!”
“몰아라! 한쪽으로 몰아!”
그들은 기합으로 정신을 바짝 조이며 검을 휘둘렀다. 대열을 다시 정비하고,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공격과 방어를 번갈아 하며 군중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뒤로! 뒤로 물러서시오!”
“젠장! 밀고 들어옵니다!”
“버티란 말입니다! 제발!”
“아아아악!”
쿵! 쿵! 쿵!
바리엘 병사들은 일정한 박자에 맞춰 발을 굴리며 전진했다. 그들이 지나온 자리에는 시체가 널브러졌고, 뒤로 몰리는 군중들은 다가오는 병사들의 속도에 맞춰 뒷걸음질 쳤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시아오시가 그를 부르자, 진의 걸음이 멈추었다. 황제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병사들의 진격을 지켜봤다. 어느덧 평정을 되찾은 병사들이 황제를 지나쳐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하아, 하아-”
진은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축축하고 얼룩졌다. 원래의 옷 색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진은 검을 따라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고서 잠시 눈 감았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인간적인 감정 따위를 고려할 때가 아니다.
“흐윽, 흑…….”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음. 진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골목으로 피신한 아이가 앞으로 고꾸라진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진의 시선을 따라 시아오시의 고개가 돌아갔다.
“살려 주세요, 살려, 살려 주세요…….”
“…….”
“엄마…….”
살고자 발버둥 치는 어린 인간의 목숨을 어찌 가엽게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진은 검을 다잡고서 아이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신이시여, 살려 주세요. 저희를 굽어살펴 주세요, 제발, 여기를 봐 주세요. 저희가 여기 있어요…….”
아이가 지하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기에.
진이 성큼성큼 다가가자, 시아오시가 한발 빠르게 그를 앞질러 가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아이의 숨을 거두어 낸 시아오시가 담담한 눈빛으로 진을 돌아봤다.
진은 그런 시아오시와 눈 마주쳤다. 살생을 싫어하는 자였다. 그런 주제에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검을 휘두르는 것이었으니, 황제의 짐을 덜어 주기 위해 기꺼이 나선 게다.
“담아 두지 마십시오, 폐하. 무겁습니다.”
시아오시의 충고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었다. 지금 저것들을 담아 둔다면 그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터.
황제는 시체들을 헤치며 진영 쪽으로 걸음 했다.
“트웰러 장관에게 그림자신의 신도들을 맡길 것이다.”
지칭이 바뀌었다. 토올룬의 백성들에서 그림자신을 따르는 신도들로.
진은 이름이 가진 힘을 알고 있다. 본질은 바뀌지 않지만, 이름이 바뀐 것만으로도 많은 게 변할 것이다.
“예, 폐하.”
“그리고 혹시 모르니 지하에 피난처가 있는지도 수색하라. 예상하건대, 분명히 있으리라.”
콰아앙! 쾅!
왕궁 쪽에서 폭발음이 계속 들려왔다. 마법사들과 마검사들이 포기하지 않고 무언가를 시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타닥타닥!
히이잉!
시간이 없다. 진은 말을 몰아 진영 가운데를 내달려 선두에 당도했다. 바리엘의 깃발이 곳곳에서 휘날리고 있었다. 물론 하나같이 피와 먼지에 절어 온전치 못했지만.
“제군들은 들으라!”
진은 확성 마법을 일으키는 마도구를 붙잡고서 외쳤다.
병사들은 난생처음 보는 황제의 모습에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언제나 단정하고 위엄있으며 흐트러짐 없는 황제 그 자체였는데, 지금의 그는 전장에서 저들과 함께 구르는 한 명의 전사처럼 보였다.
“검은 그림자가 보이는가?”
보인다. 너무도 선명하게.
병사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나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진은 병사들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단호하게 부정했다.
“보이는 것은 단 하나! 바로 바리엘의 미래다!”
미래의 황제, 이안 베로시온이 신의 뜻으로 내려와 그림자를 막아서고 있다. 잊지 말라, 이안의 존재가 곧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이니. 그림자에 가려진 금빛 날갯짓에 집중하라.
“나의 운명은 곧 그대들의 운명. 여기서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믿음으로 증명하라. 빛으로 걸어가면 그림자는 절대 우리를 앞지르지 못한다.”
절대, 그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가 검을 다잡으며 굳게 맹세했다. 보여 주겠노라고. 그대들의 믿음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고 있는지, 직접 보여 주겠노라고.
“나를 따르라. 그저 진실로 따르라.”
황제가 앞장서서 걷겠다고 이르자 병사들이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은 천천히 말을 몰아 왕궁을 향해 다가갔다. 그 뒤를 시아오시와 제국방위부 장교들이 따랐고, 지휘관들 역시 깃발을 흔들며 신호했다.
“진격-!”
부우우우!
부우우-!
망설이던 병사들이 하나둘 걸음을 떼었다. 황제가 저리 나서니 정말 마음 깊이 믿음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점차 행진이 이어질수록 발 굴리는 소리가 맞아떨어졌다.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발짓이었다.
쿵! 쿵! 쿵!
왕궁에서 들리는 폭발음과 더불어 대지를 뒤흔드는 진동이 시작됐다. 미약하지만 분명한 변화다. 그들은 전투에 나선다기보다는 의식을 행하듯 장엄하고 엄숙하게 나아갔다.
그리고 이내, 누군가가 선창했다.
* * *
쿵. 쿵쿵. 쿵.
감겨 있던 이안의 눈꺼풀이 살짝 떨려왔다. 그의 의식은 여전히 아득했으나, 희한하게 대지의 진동에 반응하고 있었다.
손끝이 낯선 울림을 따라 움찔거렸다. 온몸이 아리고 고통스러워 신음 흘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
벽. 이안은 벽을 만난 것이다. 넘어갈 수도, 무너트릴 수도 없는 차원의 벽을.
심장 부근이 기분 나쁘게 뛰었고, 입가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그는 연신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엘!
…누군가 깨워 준다면 좋겠다.
쿵! 쿵!
누군가 일으켜 준다면 좋겠다.
…엘!
멈춘 시간 틈으로 희미한 노래가 흘러들어 왔다. 웅웅 울려 무슨 노랫말인지 모르겠지만, 점차 그 선율의 형태가 잡혀 갔다.
바-리엘!
신께서 품고 있는 광영의 시작이라-
비 내리면 금빛으로 물드는 가이아의 심장이라-
높게 높게 고갤 들라, 그리하면 보이리니-
저기 높은 곳의 빛이, 바리엘의 등불이라-
번뜩!
감겨 있던 이안의 눈이 단숨에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