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58
제758화. 달라졌다
선두로 행진하던 진은 저 멀리서 이상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기이한 몸놀림,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불분명한 존재. 그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마물들.’
왕궁에서 새어 나온 마물이로다.
놈은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하게 달음박질치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진격해 오는 제국군을 발견하고서 잠시 멈칫거렸다.
그 악랄한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것 또한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키에에엑!
작은 미물조차 바리엘을 혼란스럽게 하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음이다.
기수(旗手)가 깃발을 크게 흔들었다. 무언가 장애물이 나타났다는 신호였다. 강렬하고 처절하게 부르짖던 국가(國歌) 노랫소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러자 진이 검을 다잡으며 명령했다.
“계속 노래하라! 노래함으로 정신을 다잡아라. 끊임없이 기도하여 믿음을 실체화할 것이다.”
“계속 이어서 불러라!”
둥! 두둥-! 둥!
지금껏 헤쳐 왔던 전쟁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전쟁의 승패가 믿음과 사기에 달려 있지 않나.
황제로서,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누구보다 강하게 적을 베어 내어 병사들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승리는 바리엘의 것이라고.
“폐하, 제가 가겠습니다.”
그때 나선 것은 시아오시였다. 수는 셋뿐이지만, 조잡해 보이는 마물이었다. 굳이 황제가 나설 것 없이 자신의 선에서 처리하는 게 낫지 않겠나.
하지만 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되었다.”
시아오시의 의지는 충분했으나 의미가 부족했다. 행동 하나하나가 중요한 시점, 제국군 장교의 활약만으론 병사들에게 큰 울림을 줄 수 없으리라. 이에 진이 직접 나서겠다고 이르려는 순간이었다.
“하면, 제가 나가겠습니다.”
에이린이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고서는 너절해진 옷소매를 대충 말아 올린 모습이었다. 말 아래에서 황제를 올려다보는 눈빛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폐하, 저는 저 뒤의 병사들과 다를 바 없는 자입니다. 같은 갑옷을 입고, 같은 무기를 들고 있지요. 그런 제가 저 마물을 처치하면 저들에게 큰 용기가 될 것입니다.”
에이린이 해낸다면 저들에게도 해낼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다. 게다가 그녀는 성기사. 신의 가호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도 증명할 수 있지.
적합했으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에이린. 할 수 있겠습니까?”
시아오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저 마물들을 해치울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혹여 객기에 나섰다가 호되게 당하면, 그만한 낭패가 없다.
하나 에이린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제가 나서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길 것입니다.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이기고 죽을 것입니다.”
결의가 대단했다.
진은 발검하려던 손을 거두고서 허락의 눈짓을 보냈다. 그에 에이린이 진의 말을 앞질러 지나가려는 때, 진이 그녀를 불렀다.
“에이린.”
진은 상체를 기울여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렸다. 에이린은 살포시 미소를 짓더니, 다정하게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악수, 출전하는 기사를 격려하는 군주의 악수였다.
하나 여기에는 너무도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조심하라는 뜻과 믿는다는 뜻. 반드시 해내고 돌아오라는 뜻과 나아가 너를 아낀다는 뜻까지.
군주의 격려를 심장에 각인한 에이린은, 검을 빼 들며 천천히 마물에게 다가갔다.
찌익!
그녀는 너절해진 소매를 뜯었다. 먼지와 피로 얼룩진 팔 위로 십자가 모양의 상처가 드러났다. 북쪽 지대, 대마물의 범람 당시 그녀가 검으로 그었던 흔적이다.
‘이번에도 나는 물러서지 않는다.’
마물의 범람에 비하면 저것은 너무도 하찮은 문턱이다.
에이린이 검을 단단히 쥐며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곧장 발돋움하여 망설임 없이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키이이익!
마물들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 주둥이를 쩍 벌려 그녀의 돌진을 기다렸다.
산 채로 찢어 먹어 주마. 잘게 부서진 네놈의 육신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아아악!
순간, 마물들은 느꼈다. 에이린의 검 끝에 휘몰아치는 신성한 기운을.
너무도 희고 깨끗하여 닿는 순간 생명이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아직 먼 거리, 그러나 그저 쬐는 것만으로도 온 피부가 따가웠으니.
“늦었다.”
촤악!
에이린은 물러서려는 놈들에게 그리 중얼거리며 단호하게 검을 그었다.
가볍게 스치기만 했음에도 놈들은 까무러치며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질러 댔다. 아쉽게도 바리엘을 부르짖는 노랫소리가 너무도 큰 나머지 바로 묻히고 말았지만.
촤아악!
그녀는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 갔고, 마물의 되받아침을 온몸으로 견뎠다. 세 마리의 마물과 얽히고 있음에도 전혀 물러서는 기색이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몇 번은 휘청거리며 뒤로 밀려났으나, 에이린의 자세가 너무도 곧고 단호한 나머지 그것마저 검술의 일환으로 보일 정도였다.
“에이린은 자신이 성기사인지 몰랐대.”
“말도 안 돼. 정말?”
“그래서 자원입대한 거잖아.”
“놀랍네. 본인도 몰랐다니.”
“그러니까 자네도 희망을 잃지 말라고. 혹시 알아? 자네도 성기사일지.”
“뭐어? 하하하! 그러면 좋겠군.”
“모를 일이라고! 에이린도 우리랑 그리 다를 게 없었으니까.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에이린은 성기사로서의 자아를 깨달은 이후에도 여전히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며 말단에서 전쟁을 치렀다.
그런 에이린의 존재는 병사들에게 소망이자 희망이었다. 자신도 신의 선택을 받고 싶다는 소망을 일깨우는, 그럼으로써 그녀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도 어느 순간 각성하여 특별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주는 존재 말이다.
‘나도…….’
그 덕분에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병사가 그녀의 존재를 눈으로 목격하고 인지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국가를 제창하던 병사들은 에이린에 힘입어 다시금 목 놓아 크게 내질렀다.
바-리엘!
에이린이 이기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녀가 이기면, 그들 역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바-리엘!
푸욱!
에이린의 검이 마물의 몸통 한가운데를 꿰뚫었다. 검은 피가 사방으로 터져 그녀를 흠뻑 적셨다.
하지만 그녀의 갈색 눈동자는 여전히 형형하게 빛났다. 그 어떠한 불순물도 그녀의 순백을 더럽힐 수 없으리라.
바-리엘!
“신의 이름을 걸고-!”
마지막 한 마리.
에이린이 분노를 터트리며 이를 바득거렸다.
“사멸시킬 것이다!”
-키에에엑!
마물의 날카로운 촉수가 그녀의 목 가까이 닿았다. 하지만 에이린의 검이 더 빠르고 정확했다. 검이 찌르고 나온 곳이 힘없이 녹아내리더니, 이내 형체를 잃고 흘러내렸다.
촤아악!
마물들의 사체가 길바닥에 널브러졌다.
에이린은 쿵쿵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고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진과 시아오시를 비롯한 제국군 모두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에이린은 손등으로 얼굴에 묻은 오물을 닦아 낸 다음, 힘차게 검을 치켜들었다.
처억!
이겼노라. 그저 뒷골목의 주점에서 허드렛일하던 잡부가 신의 힘으로 마물을 물리쳤노라. 내가 하였으니, 그대들도 할 수 있다.
이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믿음만 있다면 신께서는 응할 것이고, 우리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와아아아아!”
“에이린! 에이린!”
환호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것은 노래 같기도 했고, 감격에 겨운 울음 같기도 했다. 에이린은 이제껏 본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빛냈다.
스으윽.
그때였다. 기세등등한 에이린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거대하고 어두운 그림자였다.
크게 기뻐하던 병사들이 일순 침묵했고, 진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동공이 순식간에 커지며 흔들렸다.
“그-”
에이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위쪽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동공 역시 확장되었으나, 찰나였다. 에이린은 자세를 바로 하며 검을 쥐었고,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 그림자신이다!”
부우우우-!
부우!
그림자신이 고개를 내밀어 에이린 쪽을 들여다본 것이라. 왕궁까지 꽤 먼 거리건만, 허리를 숙인 것만으로도 이리 간단히 닿다니. 새삼 놈이 얼마나 거대한지 체감되었다.
병사들이 놀라서 우왕좌왕하자 지휘관들이 외쳤다.
“침착하라! 대열을 유지하라!”
“그림자신이 왔다!”
“으아아악!”
“차분하게 응시하라!”
그래, 차분하게 응시하라. 저것이 움직임을 보였다는 건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니.
진은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잿빛 연기와 화마가 놈에게 균열을 일으켰다는 걸 확신했다. 신도들이 죽어 가고 있고, 그 와중에 바리엘의 믿음은 점차 단단해졌다. 무슨 일인가 싶었겠지.
이내, 세상을 진동시키는 듯한 음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바리엘의 황제로군.
온 병사들이 두 귀를 감싸 쥐었다. 척추가 울리는 기분이었다. 오직 진만이 꼿꼿이 서서 그에 맞섰다.
“신의 그림자 주제에 감히 황제를 입에 담다니.”
-가소롭다, 인간아.
“너는 마물이다. 누가 누구를 가소로워하는가.”
-그래. 원래 인간들은 어리석고 우둔한 법이지.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나. 황제여, 네놈은 형제를 몰아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랬더라면 적어도 네 수명만큼은 권세를 누리고 죽었을 것인데.
“…요사한 그 입, 다물라.”
황실에 숨어들었던 마물, 아르센을 이르는 것이다. 마물의 음성에는 웃음기가 깃들어 있었다.
-이안 히엘로가 함께하니 모든 게 괜찮을 것이라 믿었는가? 자신감이 과하구나. 이안 히엘로와 달리 너는 고작 어린 마물에 휘둘리던 천치였거늘.
꽈악. 진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제국군을 흔들려는 목적이란 걸 알지만, 더는 용인하기 어려웠다.
“지금, 지금 저게 뭐라 하는 거람?”
“폐하가 마물에 휘둘렸다니?”
“미친놈아! 삿된 소리다!”
“잠깐만, 형제를 몰아냈다는 건 맞는데.”
“어린 마물……?”
이 대화는 두 귀를 틀어막은 병사들에게는 놀랄 만한 것이었다. 아르센 사태는 대외적으로 철저한 기밀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목도했던 중앙 귀족 중 절반은 참수당해 죽었고, 또 그 절반은 마법부의 봉인 마법으로 함구령에 처해졌으니.
내란 당시 황궁 자체가 폐쇄되어 바깥사람들은 절대 알지 못하는 이야기, 바로 마물이 황실에 깃들었다는 사실이다.
“네 이놈-!”
진이 참지 못하고 말 옆구리를 거세게 내려쳤다. 히히히힝- 황제의 백색 군마가 앞발을 치들며 크게 울었고, 이내 맹렬한 기세로 그림자신을 향해 내달렸다. 시아오시조차 미처 막지 못한 돌격이었다.
마법사도, 마검사도 감당하지 못한 버거운 상대이나, 진은 바리엘의 황제. 이리 가만두고 볼 수는 없으리라.
스윽.
그림자신이 두 팔을 모았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바리엘의 황제를 잡아채려는 듯이.
“폐하!”
촤아아악!
퍼어엉!
하지만 때맞춰 그의 앞을 막아서는 자들이 있었으니, 피투성이가 된 제이럿 대장과 황궁친위대원들이었다. 개중에는 창백하게 질린 베릭 역시 섞여 있다.
눈 깜짝할 사이 날아들어 진의 앞을 가로막은 마검사들이 반원 대형을 만들어 진을 호위했다.
-안 되지.
하지만 늦었다. 그리고 역부족이다.
그림자신의 공격이 한 마검사의 발목을 잡아챘다. 미증유의 힘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던 마검사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붙들렸던 발목은 먼지처럼 사라진 지 오래다.
“접촉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쿠우웅!
지이잉! 지잉!
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등을 보이고 선 친위대원들을 뒷모습을 넋 놓고 쳐다봤다. 소중했던 자들이 하나둘, 잿빛으로 바스러졌다.
촤아악!
이어 마검사들의 대열 틈으로 쏘아지는 그림자의 마수. 닿는 모든 걸 집어삼키려는 기세로 날아들었다.
“……!”
이를 막아 내기 위해 검을 들어 올리면서도 진은 직감했다. 결코 저것을 막아 내지 못하리라고.
타앗!
그때-
번뜩이는 흰빛 사이로, 금빛의 머리칼이 반짝였다. 햇살의 따스함, 싱그러운 녹안…. 이를 인지하자, 놀랍게도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이안.”
퍼어엉!
이안은 아무 말 없이, 순간적으로 마법을 터트려 마수를 쳐 냈다. 그러곤 전에 보지 못했던 기운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진은 느꼈다. 무언가 달라졌음을.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