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60
제760화. 모든 것을 지우는 비
이안의 눈이 커졌다.
그래, 그림자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제국군에게 믿음을 준다면, 당연히 그를 없애는 것이 순리다. 이안과 계속해서 힘을 부딪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놈에게 의미 있는 과정은 아니었다.
-빗물이 몸에 스며들면 네놈의 비밀을 완전히 지워 버릴 것이다. 오래 걸리지도 않지.
‘말살.’
이안이 전한 모든 믿음을 거두고, 나아가 신에 대한 기억까지 말살시키는 것.
그 상태에서 이안과 제국군이 처단당한다면 전쟁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번 전쟁에서 토올룬은 승리하게 되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눈덩이가 굴러가듯 그의 힘이 강해질 것이다. 그리되면 이안의 바리엘에선 다시금 검은 씨앗이 싹을 틔워 고개를 들리라.
-보여 주렴. 신의 아이들이라 이르는 네놈들이 내 발치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모습을, 저자들에게!
먹구름은 지평선 너머까지 가득했다. 토올룬 전체를 뒤덮은 것일까. 아니, 버고스와 바리엘의 하늘도 이와 같을 수 있겠다.
쿠구궁!
쿠구구구궁!
곳곳에서 천둥과 번개가 몰아치자, 사람들은 두려운 기색으로 목을 움츠렸다. 지하신이 무슨 일을 벌이는 것 같긴 한데, 당최 짐작할 수 없었다. 잔인하게도 이안 외에는 그 누구도 가까운 미래를 알지 못했으니.
툭.
비 한 방울이 떨어졌다.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볼에 묻은 빗물을 닦아냈다. 너무도 투명해 그저 훔치는 것만으로도 지워지는 존재. 이안의 심장 저편에서 아릿한 고통이 올라왔다.
“비?”
“비, 비가 내리잖아?”
“갑자기 이게 무슨…….”
투둑. 툭. 투둑.
빗줄기는 거세지 않았고, 그렇다고 흩날리지도 않았다. 그림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거셌다면 인간들은 피하려 할 것이요, 흩날린다면 깊숙이 젖어 들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 전투의 열감을 단번에 씻어 줄 만큼 시원하고 달콤한 비였다. 이안이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안 경?”
트웰러가 이안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채고서 조심스레 불렀다.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는데 어찌하여 저리 괴로워하는가?
트웰러가 조심히 다가가자, 이안이 그를 돌아봤다. 얼굴이 젖어 있었다.
“트웰러 장관님.”
“도울 것이 있다면-”
“…제가 누구입니까.”
트웰러의 입장에서 이안의 질문은 너무도 뜬금없는 것이었다. 그대가 누구냐니? 그런 것을 묻기에 그들은 너무도 많은 나날을 함께했다.
“이안 경, 괜찮은가?”
“…예, 괜찮습니다.”
이안은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대답했다.
이안 베로시온의 존재가 여기서 지워진다고 하더라도, 신의 뜻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히 승리할 것이다. 그러니 이안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는 의식적으로 계속 그리 생각했다. 그래서 이안은 마법을 온몸에 두르고서 천천히 그림자를 향해 달려갔다.
“장관님.”
순간, 트웰러의 머릿속이 정지되었다. 무슨 현상인지 알 수 없었으나, 기억 저편의 무언가가 도려지는 기분. 낯설고 기이한 감각에 트웰러는 이안의 부름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서둘러 남은 목숨을 베어 내십시오. 그림자의 힘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지하에 숨어든 신도들도 있을 것이다. 이안 ‘베로시온’이 지워지면, 믿음은 한 단계 옅어진다. 그러니 한시가 급하게 놈의 힘을 쳐 내서 균형을 다시 맞춰야 한다.
타앗!
이안이 그림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트웰러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그들은 안면에 그득한 피를 빗물로 대충 닦아냈다.
“여기는 마무리하고 수색에 나선다.”
“예, 장관님!”
스릉!
마지막 남은 신도들을 벤 부하들의 검이 깔끔하게 거두어졌다.
순간, 트웰러는 뭔가 찜찜한 기분에 인상을 찌푸리며 이안의 뒤를 바라봤다. 그림자가 분명 이곳을 노리려다 의지를 거두고 돌아갔다. 어째서?
‘신도의 믿음은 승패를 가르는 것인데.’
그런데 고작 이안 경이 한 번 받아친 것으로 싱겁게 끝났다. 저놈의 행동에 의문이 없어지려면……,
‘무언가 다른 방식으로 믿음을 세웠거나, 우리의 믿음을 해쳤거나.’
하지만 모르겠다. 어쩌면 이안은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스쳤다. 그래, 나는 나의 몫을 해내면 된다. 늘 그랬듯 바리엘 제국, 제국방위부 장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면 된다.
트웰러는 잡념을 떨쳐 냈다. 도끼 자루를 다잡으며 성벽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찾았다. 지하 대피 공간이 있다면 성벽이나 광장 혹은 왕궁 아래일 가능성이 크다.
‘왕궁 아래는 북산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접근할 수 없다.’
그 부분은 마법사나 마검사에게 맡기는 수밖에. 트웰러가 부하들을 이끌며 달려 나갔다. 수백 번 도끼를 휘두른 노장의 몸짓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날랬다.
* * *
콰아아앙!
퍼엉! 펑!
한편, 창공에서 울리는 폭음이 심상치 않았다.
그림자는 우두커니 존재했으나, 이안은 그 주위를 번개처럼 맴돌며 끝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마치 자신의 모든 걸 쏟아 내려는 듯, 끝도 없이.
이를 지켜보던 병사들이 환희에 차서 연신 주먹을 뻗어 냈다.
“이안 장관님! 힘내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예, 그림자라고 해 봤자 마물이지 않습니까! 마법사들은 신의 축복이라고요!”
“암, 그렇고말고! 다 같이 노래하자고!”
“선-! 차아아앙-!”
둥. 둥둥. 둥.
군악대가 북을 거세게 두드렸다. 병사들은 노래를 부르며 연신 이안의 이름을 외쳤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이보다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사기가 드높았지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진은 무언가 불안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폐하, 마물이 내리는 비입니다. 잠시 피하시겠습니까?”
“아니. 에이린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모두와 함께할 것이다. 이안 경도 조심하라 이르는 말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 이까짓 비.”
진은 시아오시의 종용을 단호히 물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심각하게 이안의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한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버거운 상대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진은 말을 삼갔다. 그가 아는 이안이 아닌 것 같았다. 언제나 여유 있고 침착하게 파고들던 공격이 아니라, 조급하고…….
‘필사적이다. 발버둥 치는 것처럼 느껴져.’
상대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벗어나기 위해서 온몸을 비트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자신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시아오시의 말대로 ‘상대가 상대인지라 고전하는구나’, 어림잡아 생각할 수밖에. 도와줄 수 없어 마음이 아팠지만, 모두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존재했다.
“에이린!”
“예, 폐하.”
에이린이 반사적으로 황제의 부름에 응했다. 그녀의 소매 아래 새겨진 십자가가 유독 짙었다. 마물의 피가 굳어서 그런 것이다. 진은 그녀에게 확성 마도구를 내어 주며 부탁했다.
“성기사의 기도가 필요하다.”
“…아, 기꺼이.”
“국가가 끝나면 기도하라.”
계속해서 부르짖고, 부르짖으리라.
설령 마지막에 단 한 명만이 살아남는다 한들, 그자는 계속해서 노래 부르고 기도해야 한다. 그것만이 목숨을 걸고 그림자신과 맞서는 전사들에 대한 예우이자, 제국군의 마지막 명예니까.
“헤일 대장. 얼마나 남았는가?”
진의 물음에도 헤일의 대장의 대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도 마법사들은 미친 듯이 마법진을 세우고 지워 내며, 딱 한 번 익혔던 술식을 구현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헤일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죄송합니다. 5분 안에 끝내겠습니다.”
전투용 마법진은 보통 수 초 내에 실행되는 게 정석이다. 전장에선 일분일초가 희비를 가리는지라, 그 이상을 넘어가면 사실상 실용성이 바닥을 치게 되니.
그런데 5분이라. 전투에 앞서 미리 작업을 시작했던 걸 감안하면, 헤일이 마법진을 그려 내는 데는 최대 10분 정도가 걸리는 셈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고난도의 일인지 진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콰아아앙! 쾅!
헤일은 다시 마법진에 집중했다. 시선은 마법진에 가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멀리서 느껴지는 이안의 기세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흔들리고 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안 님이 평정을 잃고서 불길 치솟듯 날뛰고 있었다. 불안했다. 필시 상황이 좋지 않음이라. 헤일은 긴장된 숨을 연신 내쉬며 마법진 완성에 전념했다.
“아하하하하!”
그때, 왕궁에서 간드러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맑고 깨끗한, 하지만 어딘가 위태로운 아이의 웃음.
토올룬의 왕이 배를 부여잡고 미친 듯이 웃어 젖히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마법사와 마검사들의 살기 어린 눈빛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제이럿 대장.”
왜, 왜 저러는 것일까요. 대원의 부름에, 제이럿은 침착하게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의 턱을 타고 빗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현혹되어선 안 된다.’
무엇 때문에 저리 정신이 팔렸는지 확인하는 것은 나중의 문제다.
제이럿은 전광석화와 같이 검을 빼 들며 토올룬 왕에게 덤벼들었다. 베릭을 비롯한 대원들 모두가 동시다발적으로 포위하며 간격을 좁혔다.
“아. 우스워.”
왕은 눈가의 눈물을 슬쩍 훔치더니, 가볍게 몸을 틀어 마검사들의 공격을 피했다. 자연스레 그들의 검 끝이 한데 모이며 둥근 원을 만들어 냈다.
지이잉! 지잉!
그 위로는 마법사들이 준비하고 있다. 순식간에 생겨난 마법진이 왕의 몸을 옭아매며 줄어들었고, 마검사들의 검이 다시금 아이의 심장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촤악! 촥!
채애앵-!
하지만 아이의 몸에서 돋아난 붉은 이드갈이 마법진을 가볍게 깨트리고, 나아가 마검사들의 공격도 튕겨 냈다. 이 모든 게 일시에 행해졌다.
…인간의 몸놀림이 아니다. 제이럿 대장은 그리 생각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는 제복을 벗어 던졌다.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말고 베어라.”
적과 아군이 맞물렸을 때 서로를 조심하다 보면 틈이 생기고, 왕은 그 틈으로 몸을 피하기에 알맞은 체구였다. 더 과감해야 한다. 아군의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이것이 제이럿의 판단이었다.
반면 아이는 여유롭게 웃으며 이안 쪽을 바라보았는데, 베릭은 그 행위 자체가 이상하게 불쾌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씨발, 자꾸 쪼개…….”
“우스운 걸 어찌해?”
“뭐가 그렇게 웃기는데, 이 망할 새끼야!”
“베릭! 지금은-”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제이럿이 다그치려는 순간이었다.
“이안이 누군지 알아?”
“뭐?”
“이안. 이안. 이안. 네놈들이 따르며 신의하는 저것 말이다. 이안이 누구인지를 물었어.”
그게 무슨 갑자기 개 헛소리인가? 베릭은 황당하여 자신도 모르게 대꾸했다.
“이, 이안이가 이안이지. 뒤질려고 수 쓰냐?”
“아아. 그래.”
이안____
이안____?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잘려나 가는 기분이 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상실감…. 다들 전투 중이라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돌연 치고 올라오는 의아한 기분에 적잖이 당황했다.
특히, 베릭이.
‘…이안이는 이안인데. 그게 왜?’
왜? 뭐지? 왜 뭐가 잘못된 것 같지?
베릭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아이는 다시금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그에 열이 뻗친 베릭이 마력을 증폭시키며 화염 대검을 생성해 냈다.
“처웃지… 말라고!”
쿠르르릉! 쿵!
번쩍!
이어서 제이럿의 번개도 하늘에서부터 그의 손안으로 떨어졌다. 모두가 전투 준비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
토올룬 왕은 알고 있었다. 이들 모두가 덤벼들면 분명히 버거울 것이라고.
“푸흣-!”
하지만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아아. 가엾고 우스운 존재들 같으니라고.
“아하하하하!”
타앗!
쿠마샤가 고개를 젖히며 웃자, 마검사들이 다시금 몰아치며 공격했다.
찰나 왕의 시선에 어두운 하늘, 검은 그림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는 저 금안의 소년. 지금 대지를 적시는 빗물이 사실은 저것의 눈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