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64
제764화. 이름
“말 그대로 초토화군.”
치익. 헤일 대장은 건물 잔해에 걸터앉아 궐련을 꺼내 물었다.
왕궁 인근에는 제대로 서 있는 건물이 하나도 없다. 죄다 부서지고, 박살 나고, 조각나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렇다고 거리가 좀 떨어진 곳은 괜찮은가? 그것도 아니다.
“아직 연기 나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게. 비까지 내렸는데 아직도 안 잡혔나.”
제국군이 신도를 정리하기 위해 놓았던 불이 모든 걸 잿더미로 만들었으니까.
마법사들은 일렬로 쪼르륵 걸터앉은 채 멍하니 정면을 쳐다봤다. 제국군 병사들이 부상자를 이리저리 옮기며 열심히 뒷수습하는 와중임에도, 그들은 누구도 움직일 생각 따위 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럴 힘이 없다.
“…뭔가, 실감이 안 나네요.”
전쟁이 끝났다는 것. 그리고 신의 그림자가 가이아에서 사라졌다는 것.
영원히 계속될 굴레일 줄 알았는데, 지금의 하늘은 너무도 푸르고 희망찼다. 눈앞의 박살 난 전경이 아니었다면, 솔직히 실감 나지 않아서 꿈인 줄 알았을 터다.
“어. 그렇네.”
그리고, 지금 곁에 없는 몇몇 동료들까지.
마법사들의 눈빛이 푸석해졌다. 동료들의 빈자리가 실감 나지 않았다. 저 어지러이 얽히며 돌아다니는 병사들 사이에서 ‘안 움직이고 뭐 해!’ 하는 잔소리가 아직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것 같은데.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버리다니.
헤일이 입매를 굳히며 궐련 재를 털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나는 뭐, 별거 없다.”
헤일 대장의 대답은 덤덤했으나, 마법사들은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다. 궐련을 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정말 그의 말대로 별거 없다면 이러고 앉아 있지도 않았겠지. 잔해 정리 중인 병사들을 진작 도와주러 갔을 것이다. 힘이 없다. 정말로.
“이안 님은?”
“아코렐라 님이 간호하고 계십니다. 이안 님 괜찮아지면 다음 차례는 헤일 대장이라 하던데요.”
“너희나 가라. 난 괜찮으니까.”
“저, 저도 괜찮습니다. 아코 대장 지금 제정신 아니라서 뭔가… 좀 그렇습니다.”
“좀 그러니까, 나보고 먼저 가라?”
헤일과 마법사들이 피식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꼭 멸망한 세상에서 맞이한 봄날 같다. 주위는 엉망인데, 그들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 웃음이 흘렀다. 들여다보면, 텅 빈 웃음이지만.
“근데 세상이 변하는 게 진짜 순식간입니다.”
“왜.”
“저기, 베릭 보십시오.”
저 멀리, 베릭이 대원들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살다 살다 보니 똥강아지 새끼가 대장 노릇 하는 것도 다 보네.
마법사들은 턱을 괸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너진 건 토올룬인데, 어째서 황궁친위대가 걱정되는 건지 모르겠다.
“뭘 봐.”
시선을 느낀 베릭이 고개를 틀었다. 마검사들은 마법사들에 비해 부상이나 마력 소모가 덜하여 움직임에 문제가 없어 보였다. 베릭이 돌아보자, 마법사들이 동시에 박수를 치며 놀려 댔다.
“오오. 돌아보는 것도 대장 같네. 저저, 목 뻣뻣한 것 보소?”
“그러게. 베릭 대에자앙-!”
“이제 계급으로 따지면 우리보다 위인가?”
“아. 그건 좀.”
“근데 쟤, 몸 튼튼한 건 진짜 알아줘야 한다니까. 진짜 멀쩡하다 멀쩡해.”
빠득. 베릭이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바쁘고 정신없어 죽겠는데, 명색이 마법사라는 것들이 앉아서 입만 털고 있어?
“저저, 빈껍데기들이 아직 살 만하지?”
“죽을 맛이다, 짜식아.”
“널브러져 있다가 힘 돌아오면 바르사베나 좀 찾아 줘라.”
“바르사베 대원? 없었나?”
그때 한 친위대원이 저 멀리서 베릭을 불러 댔다. 베릭은 금방 가겠다 손짓하며 마법사들에게 재차 부탁했다.
“어. 왕궁 진입한 이후로 연락 두절. 죽지는 않았을 건데, 여기저기 개판이라 찾을 수가 있어야지.”
“알겠다. 마력 조금만 더 차면 바로 찾아볼게.”
“그래, 고맙다.”
“워…….”
“뭐, 지금 뭐라고?”
고맙대. 미친.
마법사들은 소름 돋은 팔뚝을 벅벅 문지르며 호들갑을 떨어 댔지만, 그럼에도 베릭은 동요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온갖 지랄을 떨었을 터인데, 눈으로만 욕을 퍼붓고서 홱 등을 돌리는 게 아닌가? 마법사들의 온 살갗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그 이유를 깨달은 그들은 숙연해졌다.
‘제이럿 대장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거겠지.’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마법사들은 긴 한숨을 내쉬며, 베릭이 멀어지는 걸 지켜봤다.
“우리도 저랬으려나요. 이안 님 없었으면.”
마법사들은 발끝만 까딱거리며 침묵했다. 승리했으나, 그것으로 위로할 수 없는 서글픔이 분명 존재했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몇몇 마법사가 참지 못하고 훌쩍이며 소매로 눈가를 가렸다.
“…울지 마라. 다들 우리를 보고 있어.”
나지막이 위로하는 헤일 대장의 말과 함께, 궐련 연기가 흐트러졌다.
마법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잔해를 치우고, 부상병을 옮기는 병사들. 그러다 간혹 마법사와 눈이 마주치면, 하나같이 환하게 웃었다. 살아남았다는 기쁨과 제국민이라는 자부심이 그대로 묻어나는 미소였다.
“마법사님들, 좀 괜찮으십니까.”
“예, 괜찮습니다만 힘이 좀 들어서요. 조금만 쉬었다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다들 조금만 고생해 주십시오.”
“아이고, 무슨 말씀을요. 대단한 일 하셨는데요!”
“예예, 계속 그리 앉아 계십시오. 이제부터는 저희 몫입니다.”
“읏차! 힘줄 수 있겠어?”
“어어. 크흐흐. 안줏거리 거한 게 생겼군. 참전 용사라, 내가 살면서 얻은 이명 중에 제일이오.”
“그다음은?”
“아마 절름발이겠지?”
마법사들은 코를 훌쩍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정면을 응시했다. 매캐한 먼지가 가득했으나 병사들은 쉴 새 없이 입을 열며 종전(終戰)의 즐거움을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찾았습니다!”
잔해를 수색하던 병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혹시 바르사베 대원인가? 마법사들이 낯빛을 굳히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이내 멈추었다.
“토올룬 왕의 시체입니다!”
“비켜라.”
트웰러 장관이 병사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와 아이의 시체를 확인했다. 흰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 틀림없는 쿠마샤다.
이어서 진 역시 왕의 죽음을 확인하곤 고민했다. 가능하다면 거리 한가운데 걸어 두어 주민들에게 패전을 알리고 싶었지만-
“태워 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폐하.”
걸 만한 거리도 없고, 왕의 시체를 보며 두려워하거나 절망할 백성들도 없다. 다른 도시로 가면 또 모르겠다만, 적어도 수도는 궤멸 그 자체였으니.
“좋다. 머리칼은 따로 잘라 두고 신도들과 함께 소각하라.”
“예, 폐하.”
육신을 남기면 그것 또한 신격화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림자신에게 빌미를 남겨 줄 만한 건 한 톨도 남겨 놓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트웰러의 고갯짓에, 병사들이 아이의 시체를 들어 옮겼다. 그것은 이내 저 멀리, 산처럼 쌓인 시체 더미 어딘가에 투욱 던져졌다. 왕의 시체 위로 계속해서 다른 자들이 쌓였다. 아이는 순식간에 파묻혔다.
“폐하.”
“다들 앉아 있게.”
황제의 시선이 쪼르륵 앉아 있는 마법사들에게 돌아갔다. 참으로 안쓰러웠다. 일반 병사의 상처라면 군의관이 봐 줄 것인데, 마력의 고갈은 오로지 그들끼리만 도울 수 있지 않나. 당분간은 스스로 몸조리해야 할 터.
“몸들은?”
“크게 다친 곳은 없습니다.”
“다행이로다.”
“폐하께서도 괜찮으시지요?”
“그럼. 그대들 덕분에. 이안 경은?”
“안쪽에서 아코렐라 대장이 간호 중입니다. 시간이 좀 걸리네요. 이안 님도 겉으로 보기에는 외상이 크지 않아서요. 인기척을 내 드릴까요?”
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법사가 잔해 뒤 천막으로 그를 안내했다. 사실 천막이라 하기에도 어설픈, 대충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천을 널어 둔 것에 가까웠지만.
“이안 님. 아코렐라 대장. 황제 폐하 드셨습니다.”
“안으로 모시어라.”
이안의 음성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맑고 곧았다.
진은 깊은 안도와 함께 천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 * *
“아- 해 보십시오.”
“아-”
“귀를 막을 것입니다. 뇌가 울리거나 하면 말씀해 주십시오. 어떠십니까?”
“문제없다.”
아코렐라는 자못 심각한 시선으로 이안을 진찰했다. 이미 한 차례 군의관이 왔다 갔지만, 소견은 별 이상 없음. 기적적으로 경증의 내상에서 그쳤노라, 바리엘의 축복이라 진단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아코렐라는 이안의 몸 이곳저곳 살피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언제까지 하려고?”
이안이 내심 불안한 얼굴로 묻자, 그녀는 입술을 비죽이며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다.
‘추쇄 마법을 쓰셨다.’
미래의 힘을 끌어오는 마법. 게다가 분신은 무려 다섯 개나 불러냈고, 고등 마법인 신장 마법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하늘을 가득 채웠다.
이안의 마력에 한계가 없고 회복력 또한 비상하다고 한들, 이리 멀쩡한 것은 너무도 이상하지 않은가.
“아코렐라?”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불편한 부분 있으시죠?”
“아니. 없다.”
“거짓말! 이러시면 진짜 저 돌아 버립니다?”
“정말이다. 아코렐라, 혹시 내가 아프길 바라는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예에?”
“농담이다.”
이안이 피식 웃으며 아코렐라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진정하라는 듯이.
“신께서 도와주셨다고 여기면 될 일이다. 지하신은 사라졌고, 나는 이리 그대 앞에 있잖아.”
“…인지할 수 없는 부상이 위험한 법입니다. 아무리 신께서 도우셨대도 이 정도로 그칠 사안이 아닙니다. 제가 이안 님을 모릅니까?”
전쟁을 몇 번이나 치렀고, 그 과정에서 쓰러지는 걸 얼마나 많이 봤는데? 그건 그거대로 문제지만, 이것도 이거대로 문제다. 아코렐라가 조금 남은 마력을 이안에게 넣어 주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무너집니다. 실금이 잔뜩 간 도자기를 본 적 있으십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지만, 아주 작은 충격에도 돌이킬 수 없이 무너지는 거라고요. 그 전에 인지하여 치료하는 것이-”
그때였다. 천 너머로 인기척이 들렸다.
“이안 님. 아코렐라 대장. 황제 폐하 드셨습니다.”
“안으로 모시어라.”
이안은 마침 잘 되었다는 듯 그리 일렀고, 아코렐라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마지못해 일어났다. 둘의 대화에 자신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기에. 아코렐라는 진에게 고개를 숙이고서 천 밖으로 나갔다.
진은 조금 밝은 음성으로 이안 가까이 다가왔다.
“이안 경, 몸은?”
“놀랍도록 평안합니다. 마력은 희미해졌지만요.”
“그게 어디인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돌아오는 것을. 그대가 크게 다치지 않아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네.”
진이 이안의 손을 단단히 붙잡자,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러자 그림자와의 결전 때 내렸던 비가 환상처럼 느껴졌다. 진의 머리칼은 여전히 젖어 있었지만, 맞잡은 손의 온기가 너무도 생생하여.
“정리는 제국군에 맡기고 회복에만 집중하게. 물론, 그대의 도움은 언제나 필요하지만.”
“저기, 폐하.”
“응?”
이안은 문득 꿈에서 보았던 필리아를 떠올리며 조심스레 진을 불렀다. 하지만 쉬이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황제는 인자하고 다정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이안이 희게 웃으며 물었다.
“혹 제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이름?”
느닷없는 질문에 진이 의아한 웃음을 지었다.
“예, 혹시나 해서요.”
“헤아릴 수 없지만, 그대라면 생각이 있어 묻는 것이겠지.”
그리 어려운 일이겠나? 진은 이안의 눈을 바라보며 일렀다.
“이안 히엘로.”
“…….”
“제국의 자랑스러운 마법부 장관이시지.”
이안은 혹시나 해서 잠시 기다렸다. 혹시나, 베로시온이라는 이름을 덧붙이지 않을까 해서. 하지만 진은 그뿐이라는 듯, 말을 잇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진은 이안의 입술이 살짝 떨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안 경?”
“예, 맞습니다.”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희게 웃었다.
“맞습니다. 그것이 제 이름입니다.”
여느 때와 같은 이안이었지만, 진은 잠시 멈칫거렸다. 아주 미세한 무언가를 감지한 것이다.
하지만 이내 밖에서 들리는 시아오시의 부름에 고개를 틀었다.
“폐하, 트웰러 장관께서 보고할 게 있다 합니다.”
“아, 그래. 나가지.”
진은 이안의 어깨를 두드리며 절대안정을 당부했다.
“이안 경. 이따 보겠네.”
“예, 폐하. 금방 회복하여 복귀하겠습니다.”
“그러지 말래도.”
사락.
진이 천을 걷고 나가자, 이안은 홀로 남았다. 한참이나 가만히 앉아 있던 이안은 심장 부근의 아릿한 고통을 느끼며 잔기침을 내뱉었다.
“…….”
흘러내린 각혈이 두 손 가득 모였다. 이안은 피를 가만히 내려보다가, 천과 물 따위로 닦아 냈다.
아코렐라가 다시 돌아왔을 때,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잠들어 있었다. 아무 흔적도 없이, 고요한 얼굴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