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74
제774화. 운명의 끝
텅 빈 마법부. 마법사는커녕 직원들조차 출근하지 않아 적막 그 자체였다. 오로지 마법부 장관실에서만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가 들려왔으니.
이안은 맞은편에 앉은 로만드로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오늘 같은 날까지 일하셔도.”
로만드로의 눈이 띠용,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지금 누가 누구보고 이르는 말인가? 전쟁 내내 선두에 서서 전투를 이끈 마법부 장관께서, 사무실 책상이나 돌보았던 보좌관에게 이르는 말씀이신가? 세상에! 로만드로는 이때다 싶어서 의자를 바짝 끌어 앉았다.
“이안, 그건 내가 할 말일세. 여기서 이러지 말고 우리 집으로 가자고. 응? 비비안나가 아주 맛있는 닭 요리를 준비해 놓겠다 하였어.”
“부인께서는 잘 지내시고요?”
“그…….”
“진심으로 안부를 묻는 것입니다.”
로만드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비안나는 여전히 마음 깊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로엘의 부탁으로 아이를 히엘로령으로 내려보낸 것, 그걸 알아챈 필리아의 분노, 그리고 결국 들려온 비보(悲報)까지.
비비안나는 하루가 멀다고 울음을 터트리며 필리아의 명복을 빌었다. 이제는 좀 추슬러졌지만, 이전과 같지 않음은 분명했다.
로만드로의 대답이 늦어지자, 이안이 그럴 줄 알았다며 덧붙였다.
“너무 힘들어하지 마시라 전해 주십시오. 비비안나 부인께서는 그 누가 뭐라 하여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로엘의 선택이었고, 어머니의 선택이었으며, 운명이었으니까요.”
“저기, 이안.”
“정말입니다. 부인께서 계속 그리 힘들어하신다면, 어머니가 더욱 슬퍼하실 겁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로만드로가 다시금 코를 훌쩍이더니, 그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이안은 진심이라는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 사안과는 별개로, 저는 당분간 혼자 있고 싶습니다.”
“우리 집에 가지 않으려고?”
“네. 전쟁 기간 언제나 남들과 함께였습니다. 솔직히, 조금 피곤하더군요. 익숙한 곳에서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로만드로는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굳이 전쟁까지 갈 필요 없이, 지진 복구 사업만 나가도 온종일 부대껴서 떠들썩, 난장판, 신경 곤두서는 일 천지다. 하물며 전쟁터? 적까지 고려해야 하니 에너지 소모는 차원이 남다를 터다.
“끄응. 그래. 나도 그 마음 잘 알지.”
“고맙습니다. 부인께는 죄송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저 피곤한 것이 다라는 말과 함께요. 다음에는 꼭 가겠습니다.”
“알겠네. 무리할 것 없으니 부담 갖지 말고.”
“네. 그리 일러 주시니 마음이 편합니다.”
끼이익.
이안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서 시계를 쳐다봤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었다. 로만드로는 하던 일을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혹시나 싶은 마음에 마지막으로 물었다.
“식사는?”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모레 다시 보자고. 그때까지 이거 그대로 두어. 내가 도와주려니까. 응?”
바리엘은 모레까지를 승전 기념일로 선포했다. 황궁 내 시종들도 절반 이상 출궁하여 들어오지 않을 터. 이안은 나가는 로만드로를 배웅하며 알겠노라 대답했다.
“이그. 밥 잘 챙겨 먹고.”
“즐거운 휴일 되세요, 로만드로 님. 저도 푹 쉬겠습니다.”
로만드로는 눈을 흘기며 마차에 올라탔다. 말은 저래도 자신이 가면 바로 다시 책상에 앉을 위인이다. 부디 무리만 하지 않기를.
이안은 멀어지는 마차를 끝까지 지켜본 다음, 미소를 지우며 돌아섰다. 그는 뭔가 불편하다는 듯 심장 부근을 꾹꾹 눌러 댔다.
‘음.’
…좀 힘드네.
이안은 숨을 가쁘게 토해 내며 다시 장관실로 돌아왔다. 사실 그도 로만드로의 집으로 가고 싶었다. 이안에게 그곳은 제2의 집이었으니까. 아무리 복작복작해도 온전히 쉴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었다.
이안은 의자에 앉아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다시 펜을 잡았다. 일이라도 붙들고 있지 않으면 뭔가 쓸려 갈 것 같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뭔지 몰라서 더 두렵다.
사아악.
그때, 어디선가 느껴지는 마력.
이안의 펜대가 멈칫거렸고, 이내 벽난로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불이 꺼져 있던 벽난로 틈으로 녹색 불길이 조금씩 치솟고 있었다.
“…이런.”
이안은 담담한 낯으로 옆에 놓인 파팔레리 나무조각을 안으로 던졌다. 그러자 물과 기름이 만난 것처럼 녹색 불길이 확 치솟았다.
그 환상처럼 흔들리는 불길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보이는 자가 있었으니.
“토미.”
[이안 님! 역시 계셨군요. 아이고, 다행이다.]아스타나로 심부름을 갔던 토미였다. 이목구비가 희미하고 목소리가 윙윙 울렸지만, 상대를 식별하는 덴 문제없었다. 이안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내가 여기 없었으면 어쩔 뻔하였어.”
[그럼 로만드로 님이 계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힘으로는 어떠한 마법도 불가해서요. 아스타나 술사의 힘을 좀 빌렸습니다.]녹색 불길은 마법이 아니라 주술이었다. 상대가 허락하면 일정 시간동안 소통이 가능한 불길. 다만, 불길을 키우기 위해서는 일반 나무조각이 아닌 요정들의 나무조각이 필요했다.
이안은 따스함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일렁임을 보며 덧붙였다.
“로만드로 님이 보셨다면 마법부에 불이 났다 하셨을 게다.”
[하하하! 맞네요. 그랬을 수도 있겠어요. 이안 님, 우선 아스타나에 와서 왕에게 직접 서신을 전달했습니다. 지금 술사를 보셔도 좋고, 나중에 일정을 다시 잡아도 좋다 하십니다. 다만 길게 대화는 불가하다고 하네요. 워낙에 연로하여서.]“지금 보지. 나 또한 궁금한 것이 많지는 않다. 토미, 술사와 둘이서만 대화할 수 있도록 부탁한다.”
[아, 잠시만요!]토미가 옆을 돌아보며 무어라 일렀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아주 조금만 거리가 멀어져도 음성 전달이 안 되나 보다.
잠시 후, 늘어진 피부의 노인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흐릿했지만, 그녀의 왼쪽 눈에 동공이 세 개임은 확실히 보였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는 동공이다.
[이안 히엘로 마법부 장관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스타나의 예언가, 반나글렝이라고 합니다.]“만나서 반갑군. 지금부터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비밀에 부쳐 줄 수 있겠는가? 아스타나의 문제가 아니라, 온전히 나의 문제인지라.”
노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던 터였다. 바리엘의 장관이 굳이 먼 아스타나에서 술사를 찾는다는 게 무슨 의미겠는가? 본국에 알려지면 안 될 내용이라는 뜻이다.
그녀의 왼쪽 동공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안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담담하게 물었다.
“…내 운명의 끝이 보이는가?”
이안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지하신을 처치한 그 이후부터, 꾸준히. 아코렐라가 알았더라면 이것 보라며 울분을 쏟아냈으리라. 아아, 눈물도 함께 쏟아냈으려나? 이안은 그녀의 분노 아닌 분노를 상상하며 피식 웃었다.
[운명의 끝이라…….]잔인하지만, 지하신의 말이 어느 정도 맞았다. 히엘로로서 자신이 할 일은 끝났다. 그러니 이제는 흔적을 지우고 다시 돌아가는 게 순리. 이안도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했다. 매 순간, 신께서 준비하라며 서서히 심장을 움켜쥐었으니까.
이안은 손끝으로 가슴 부근을 문질렀다. 술사의 답이 늦어질수록, 이안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입술을 짓이겼다.
[보입니다. 그것도 아주 선명히.]선명히 볼 수 있음은 멀지 않았다는 것.
술사의 동공이 계속해서 원을 그리며 돌았다.
“어떠한가?”
조심스러운 문제였다. 이안 개인에게도, 바리엘 전체에게도. 그렇기에 이안은 아주 먼 곳에서 단서를 얻고자 아스타나까지 연락했던 것이다.
연신 돌아가던 술사의 동공이 뚝 멈추었다. 그녀의 음성이 흐릿하게 흘러내렸다.
[웃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을 함께하는 자들이 많군요.]뜻밖의 말에 이안이 놀라서 멈칫거렸다. 그리고 이내 복잡하다는 듯 이마를 꾹꾹 눌렀다. …자신의 계획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전언이지 않나.
이어서 술사는 작게 한숨 지었다.
[…비가 떨어지고 있군요. 너무도 선명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습니다.]이안은 찻물을 머금으며 침묵했다.
비…….
[드릴 말씀은 이것이 다입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무릇 운명을 점친다는 것은 바다 한가운데서 파도를 헤아리려는 것과 같음을. 작은 바람과 물고기의 찰박거림으로도 쉬이 바뀐답니다.]“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말이군. 고맙네.”
이안이 싱긋 웃었다. 아쉽지만, 괜찮다. 어쨌거나 시간이 남았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이곳에서 아직 할 일이 많았으니까
술사는 고개를 숙이더니 천천히 사라졌다. 이어서 토미가 눈을 크게 뜨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안 님, 볼일은 다 보셨습니까?]“그래. 그러니 토미 너도 어서 돌아오거라.”
시간이 얼마 없다 하니, 서둘러 보고 싶구나. 이안의 마음도 모르고, 토미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녹색 불길이 사라졌다. 이안은 소파에 몸을 기대며 자신의 마지막을 그려 봤다. 웃고 있다고? 자신이? 그것도 많은 사람과 함께?
“…그러면 안 되는데.”
자신의 계획대로라면, 그리되어서는 안 되는데. 이안이 홀로 중얼거릴 차, 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와인 병과 먹거리를 잔뜩 든 베릭이었다. 이안이 화들짝 놀라 뒤돌자, 베릭은 책상을 둘러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저저, 이럴 줄 알았지. 이런 날 네가 일하면 어떡해? 밑에 애들 눈치 보느라 제대로 놀겠어?”
“그러는 넌.”
“난 대장이잖아.”
세상에, 그 말이 왜 이리 우스운지. 이안이 활짝 웃음을 터트렸다. 베릭도 머쓱하게 턱을 긁적이며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나도 장관인데.”
“뭐래. 나랑은 다르지.”
“호오. 그렇군.”
“여하간에 인생 진짜 재밌어. 내가 대장이래, 이안아.”
“그래. 마냥 축하할 수 없어 아쉽지만.”
베릭은 잔에 와인을 콸콸 부었다. 그러고서 이안을 빤히 쳐다봤다. 두 시선이 맞물렸다. 이안은 혹여나 베릭이 대화를 들었을까 봐, 그리고 베릭은-
“너 근데 요즘 이상해.”
“뭐가.”
“자꾸 피 냄새가 나.”
어디선가 은근히 풍기는 피 냄새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낮에만 해도 전쟁터에 있었으니까.”
“그거랑은 좀 다른데.”
“베릭, 너는 사람이다. 너무 개처럼 굴지 마.”
“아무튼 이상해. 솔직히 말해 봐. 너-”
베릭이 심각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코피 계속 흘리지?”
코피? 이안의 시선이 또르르 굴러갔다. 뭐, 그 정도면 적당히 괜찮은 변명이네. 그가 일부러 침묵을 택하자 베릭은 탄식했다.
“아오, 진짜. 몸 좀 챙기라고.”
“알겠다. 이제 좀 쉬면 괜찮아질 거다.”
“일도 적당히 밑에 애들한테 던지고. 앙? 나처럼.”
“그러다 곧 쫓겨나겠구나, 베릭.”
“흥. 그럴 만한 놈이 어디 있다고. 다들 비실대서는.”
이안은 와인 담긴 잔을 들여다보았다. 짙은 보랏빛이 가득했다. 이윽고 그는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베릭. 그럴 만한 놈은 언제나 가까이 있다. 그래서 위험한 거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