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8
제78화. 기행
서류를 확인하던 메렐로프 백작은 누군가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듦과 동시에 집사가 허망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격식을 법처럼 여기는 자라, 언제고 노크를 하였는데…….
“무슨 일이지?”
“배, 백작님. 큰일 났습니다.”
집사의 떨리는 목소리에 메렐로프 백작은 저도 모르게 펜을 내려놓았다. 집사가 저리 동요하는 건 거의 보지 못했다.
“교역단이 연락을 보내, 보내왔는데… 수레가 죄다 불에 타버렸답니다.”
“뭐?!”
메렐로프가 벌떡 일어서서 황당하게 입을 뻐끔거렸다. 수레가 어찌하다가?
“콜린이라는 자가 수레에 불을 내고 사람들을 죽이려 했답니다. 아무래도 사병들이 지참한 금화를 노린 것 같은데, 일행들이 말리는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합니다.”
“금화 그거 얼마나 된다고?”
대부분은 하이만 뱅크를 통해 수표와 어음을 발행하곤 했다. 따라서 사병들이 챙긴 금화는 거래 대금이 아니라 여정에 필요한 소지금에 불과한 것이었다.
“평민들 보기에는 큰 금액이지 않습니까.”
“아니, 그래서, 어쩌잔 말인가?”
“수레가 다 타 버린 데다 동굴 안쪽에서 연기를 마신 부상자가 있다 합니다. 우선을 셰이론 쪽으로 가겠노라 전서구가 왔으나,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뿐만 아니었다.
수레가 홀라탕 타 버렸다고 하니, 식량을 옮기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구해야 할 것이다. 비용은 둘째치고 이 겨울에 바로 구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다. 나무란 나무는 죄다 땔감으로 쓰이는 시기니 말이다.
“…하. 하하하. 하!”
“역시 콜린 그자, 꺼림칙했습니다. 교역단이 셰이론으로 가면 거기서 또 돈이 들 터인데, 차라리 돌아오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땅바닥에서 잘 것도 아니고, 물만 마시며 버틸 것도 아니었다. 부상자가 있다 하니 의사도 만나야 하겠지.
집사의 말에 메렐로프는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최악이다.’
그래. 메렐로프는 이제껏 보냈던 수많은 겨울 중, 단연코 이번 해가 최악임을 확신했다.
“…불을 왜!”
촤아아악!
메렐로프 백작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수많은 사람 중 그걸 제대로 저지하지 못했다는 것도 어이가 없다. 메렐로프의 이름 아래 살아가는 자들이 이렇게 오합지졸들이었나?
그렇다.
평화로움 아래 감춰져 있었던 어설픈 것들이, 위기를 구멍 삼아 고개를 쳐들었다. 메렐로프 저택 꼴이 참으로 말이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콜린의 가족들. 다 죽여버려라.”
“…네. 백작님.”
“거지 같은 집구석, 긁어낼 수 있는 건 싹싹 긁어내. 남녀노소 빼놓지 말고 밧줄을 매달아라. 다 죽여, 다 죽여서…….”
계속해서 겹치는 악재가 숨 막힐 정도다. 타 버린 수레는 뒤로하고, 이제는 당장 백작의 식탁을 걱정할 수준까지 이른 것이다. 셰이론, 하완 왕국에서 음식을 구할 수 없다면 남은 것은 하나뿐인데.
쾅! 콰앙!
“젠장. 대체 이게 어떻게 돼가는 건지. 신탁이라도 받아야 하는 건가? 응?”
“꺄아아악!”
메렐로프 백작은 테이블을 거칠게 내려치고서, 습관처럼 옆에 서 있던 하인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자신의 분노를 몸으로 행했다.
바싹 마른 하인의 몸이 이리저리 휘청였지만, 집사는 눈을 내리깔고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백작님. 죄송합니다.”
“하아. 진짜, 집사. 그러니까. 내가 사람 좀 잘 고르라고 했잖아!”
“…살려주세요!”
짜악!
집사가 입술을 꽉 깨문 채 허리를 납작 숙였다. 어떻게 해서든 백작의 기분을 풀지 않으면, 오늘 애먼 아이 초상 치를 수도 있다.
“나가.”
“배, 백작님.”
“가서 콜린 그 새끼 피 섞인 것들 다 죽이라고!”
끼이익.
메렐로프 백작의 손틈으로 하인의 머리채가 엉켜있었다. 집사는 어쩔 수 없이 뒷걸음질 치며 집무실을 빠져나왔고,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울상을 지은 채 그를 올려다 봤다.
“지, 집사님.”
“다들 물러서거라. 불똥 튄다.”
“쟤, 쟤는 어떡해요?”
“쉿. 네가 경을 치고 싶은 게냐.”
집사의 말에 하인의 눈에 공포가 물들었다. 촉촉하게 서린 눈물로 더욱 짙고, 깊게. 하인들은 멈칫거리며 집무실 안쪽에서 들리는 비명을 모른 척했다.
또각.
청아하게 울리는 구두 소리. 얼음장 같은 분위기에 금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집사와 하인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메렐로프 백작 부인이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다들 뭐 해?”
“마, 마님…….”
콰앙! 쾅!
부인은 대답 대신 소란스러운 문쪽을 힐끔거렸다. 그리고 집사를 슬쩍 보더니, 희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문을 열어.”
“마님. 지, 지금은…….”
“괜찮으니까. 열어.”
부인은 만류하는 하인들을 가볍게 쳐냈다. 결연해 보이면서도 한없이 고요한 눈빛이라, 하인들은 그녀의 의중을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이토록 하인들이 죽어 나갈 때, 몇 번이고 있었던 일이지만 말이다.
“흐윽…….”
“내 손으로 열어야 하니?”
하인 중 한 명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리자, 메렐로프 부인이 날카롭게 힐끔거렸다.
결국, 문고리에 손을 올린 것은 집사였다.
끼이익.
천천히 문이 열렸다. 피떡이 된 하인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고, 나무 가구 곳곳에 피가 튀어있었다. 메렐로프 백작 부인은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보.”
그녀의 부름에 헐떡거리며 뒤를 돌아보는 백작.
얼마나 사람을 개 패듯 팬 것인지, 머리끝으로 땀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인은 연신 필사적으로 손바닥만 비벼댔다.
“그 아이는 그만 돌려보내고.”
“흐윽…. 살려, 살려주세요…….”
“저랑 놀아요.”
감정 없이 매말라 있던 백작 부인의 얼굴이 화사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꺾어 문 앞에 서 있는 집사와 눈을 맞췄다. 하인이 그 틈을 타서 서둘러 기어 나왔다.
‘문 닫아.’
끼이익.
천천히 닫히는 틈으로 빛이 스며들었다. 집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문을 닫았다.
메렐로프 부인은 남편의 손을 붙잡으며 상냥하게 제안했다.
“여보. 그러지 말고, 브라츠에 도움을 청해보는 건 어떻겠어요?”
하지만 광기로 번득이는 늙은 남편의 거친 숨은 쉬이 가라앉을 줄 몰랐다. 그녀는 다시금 조용히 속삭였다.
“체면상 정 힘드시면 제가 가서 얘기를 해보지요. 나이도 비슷하고, 당신이 직접 가시는 것보다 제가 가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않겠어요?”
“자네가?”
“네. 맡겨주세요.”
메렐로프 백작은 스르륵 흘러내리는 아내의 머리칼을 휘어잡으며 으르렁거렸다. 여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한 표정이었다.
“도망가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제가 어떻게.”
부인의 담담한 말에 백작은 그녀의 머리채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남편의 뒤, 하얗게 빛나는 보름달에 고정되어 있었다.
* * *
메렐로프 부인이 브라츠에 당도한 것은 그로부터 나흘 후였다. 미리 연락을 받은 이안이 저택 정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마차 문이 열리자 화려한 나들이 차림의 여인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메렐로프 백작 부인. 환영합니다.”
“이안, 아니지. 보자마자 실수할 뻔했습니다. 이제는 이안 자작이라 불러야겠군요.”
“오시느라 힘드시진 않았습니까?”
“뭘요. 우리가 그렇게 먼 사이인가요?”
메렐로프 부인은 은근슬쩍 서로가 이웃임을 언질했다. 이안은 대답 없이 웃으며 그녀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부인께서 온다는 말에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작위 임명 소식을 들었을 때 축전을 제대로 못 전한 것이 백작님도 그렇고, 저도 마음에 쓰이더라고요.”
백작 부인은 두꺼운 외투를 벗어 하인에게 넘겼다. 마차 안이 추웠는지, 코끝이 붉게 올라와 있었다.
“별말씀을요. 집무가 바쁘시니 이해합니다.”
“고마워요. 이안 경. 백작님도 함께 하시길 원했지만, 그대가 말했다시피 영 시간이 안 나더군요.”
“선물까지 보내주셨지 않습니까.”
이안은 넌지시 드리퍼를 언급했다.
“참으로 귀한 물건인지라, 저에게 주심이 마땅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드리퍼의 가치를 알고 준 것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엿 먹이려던 것이 제대로 낚여 들어온 것일까?
이안은 메렐로프 부인의 표정 변화를 세심하게 관찰했으나, 그녀는 묘한 웃음만 지을 뿐이다.
“역시 좀 난해했나요? 제가 다른 걸로 하자 말씀드렸는데, 백작께서는 그것이 이안 경에게 꼭 도움이 되는 것이라 고집을 피우시지 뭡니까. 제가 뭘 알겠어요. 백작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출신은 모르겠지만, 지금은 확실히 귀족이군.’
아주 진절머리 나는 화법이지 않나.
백작이 고집했다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건데, 이안이 마음에 안 들면 그것은 안목 없는 너의 탓이라 돌려 까는 것이다.
“아닙니다. 마음에 듭니다. 아주 굉장한 걸 주셨네요.”
체면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공정 상태로 보아 이제 막 개발된 상태인 것 같은데, 어디 가서 이런 걸 또 구한단 말인가.
부인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다행이군요. 백작님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다른 선물도 준비해 두었으니, 기대해도 좋아요.”
“영광입니다, 부인.”
“그런데 이안 경. 오늘 내가 이리 찾아온 것은…….”
메렐로프 백작 부인이 말끝을 흐렸다. 이안은 당연히 굴라 매매에 관한 내용을 주고받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니.
“메리 부인의 방을 좀 보고 싶은데. 왜, 저번에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메리 부인에게 빌려주고 못 돌려받은 물건이 있다고.”
“아.”
이안은 의외라는 뜻으로 멈칫거렸다. 백작 부인의 눈초리가 초롱초롱했다. 제발 허락 좀 해달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안이 메리의 방을 치우지 않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죄인이었던 계모의 방 따위야, 일반적이라면 싹 갈아엎었겠지만…….
“편하신대로 하십시오. 부인께서 찾을 물건이니 제가 어찌 막겠습니까? 일이 바빠서 그쪽은 거의 손을 못 댔습니다. 아마 메리 부인이 갖고 있었으면 그대로일겁니다.”
두 명의 부인이 보였던 이상행동 때문에 미심쩍어 보존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딱히 신경을 안 썼다고 보는 게 맞겠지.
이안의 허락이 떨어지자 메렐로프 부인이 벌떡 일어나 하인을 닦달했다.
“그럼 먼저 볼일을 보는 게 좋겠어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안 경도 같이요?”
“네. 물론입니다. 저도 같이 찾아보도록 하지요. 그게 무엇인지 알려만 주신다면.”
이안의 말에 메렐로프 부인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하지만 순간의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미세해서, 이안은 보다 더 세심하게 부인의 안색을 지켜봤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걷는 자세가 우아하기 그지없다.
“이쪽입니다. 백작 부인.”
하인은 공손하게 메렐로프 부인과 이안을 안내했다. 집무실 바로 아래층 끝방. 굳게 닫혀있던 문고리가 밀리고, 이내 특유의 고저택 냄새가 확 올라왔다.
“청소를 한다고 했는데, 사람이 쓰지 않는 방이라 나무 냄새가 많이 납니다. 환기를 바로 하겠습니다.”
드르륵.
창문으로 찬 기운이 들어왔지만, 메렐로프 부인은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그러곤 조심스레 이곳저곳을 둘러보더니 서랍과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안은 그저 한 발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지켜봤다.
“부인. 말씀을 해주시면 아랫것들을 시키겠습니다.”
“아니요. 손을 타면 안 되는지라.”
촤아아악.
메렐로프 백작 부인의 손이 옷가지를 헤집었다. 곱고 화려한 천들이 재빠르게 움직이며 옷걸이 한쪽으로 밀려났으나, 부인이 찾는 건 없는 듯싶었다.
“이안 경.”
“네. 부인.”
“실례지만, 잠시 나가주실 수 있을까요? 안쪽을 더 살펴볼 참이라. 물건을 되찾으면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부인이 가리킨 곳은 속옷을 넣어두는 장이었다. 이안은 하인에게 지켜보라는 눈짓을 주고서 군말 없이 방을 나섰다. 메렐로프 백작 부인은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서 다시 장을 뒤져댔다.
“저, 저기 백작 부인…. 도와드릴 것이 없을까요?”
“서랍이란 서랍은 다 열어두어라. 내가 직접 찾을 것이니.”
백작 부인이 서랍을 뒤적거리다 갑자기 멈추고는 중얼거렸다. 하인은 화장대에 비친 여인의 서늘하고 표독스러운 표정에 움찔거리고 말았다.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듯한 그녀는, 다시금 미친 듯이 서랍장을 파헤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