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80
제780화. 베릭의 고민
황제의 처소 인근, 황궁친위대 본관 건물.
베릭은 턱을 괸 채 허공을 응시했다. 사무실은 전쟁으로 오래 비어 있었던 것에 비해 정갈하고 깔끔했다.
베릭의 시선이 가닿은 곳은 벽면의 금빛 배지들. 바리엘을 위해 죽은 자들을 기리는 명예 훈장이다. 날이 좋아서 그런가, 오늘따라 유독 빛나는 것 같기도 하고.
드르륵.
“베릭, 교대 끝났어?”
“방금.”
안으로 들어온 바르사베가 일정을 확인했다. 인원수가 확 줄다 보니 이전보다 근무 강도가 상당해졌다. 그래 봤자 전장에서 24시간 구르던 거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지만.
바르사베는 베릭을 힐끗거렸다가, 그의 어두운 안색에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미간 갈라지겠다.”
투욱. 베릭은 테이블에 엎어져서는 손끝으로 제 미간을 꾹꾹 눌러 댔다.
뭔가 심상치 않다. 바르사베는 일정표를 내려놓고 아예 베릭 쪽으로 몸을 돌렸다.
“왜 그래?”
“아니, 뭐.”
“대장 되니까 팔자에도 없는 고뇌를 다 하네.”
“아나, 씨. 진짜.”
“힘들어서 그래?”
벽면에 걸린 제이럿 대장의 금빛 배지를 보는 것이? 아니면 그를 대신해서 결재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대장이라 불리는 게? 바르사베의 물음에 베릭은 한참이나 침묵했다.
그녀는 참을성 있게 베릭을 기다려 줬다. 적막 속, 바깥에서 바삐 오가는 자들의 인기척만이 희미하게 들렸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내가-”
드디어 베릭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내가 대장에 걸맞은 사람인지.”
“뭐?”
바르사베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지금 이 똥개 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람? 다들 장난식으로 베릭을 놀려 대긴 했지만, 황궁친위대에서 그가 아니면 대체 누가 대장직을 맡는단 말인가. 모두가 마음 깊이 제이럿 대장의 결정을 따르고 있거늘.
그게 아니라도 그들의 존재 이유는 황제의 호위. 제일 강한 베릭이 대장직을 맡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애들 단속 좀 해야겠다. 이제 장난 좀 그만 치라고.
하지만 베릭은 뜻밖의 이름을 언급했다.
“행정부 노인네.”
“…수상?”
바르사베는 수상이 언급되자 왜 베릭이 저리도 고민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최근 황궁에 흐르기 시작한 묘한 기류를 읽었으니까.
수상과 마법부 장관의 기세 싸움이 시작된 지금, 베릭만큼 난처한 이도 없을 테다. 수상과 마법부 장관 가운데 끼어 있어서 그런 것이다.
“마법부 장관님은 지금 황궁의 그 누구보다도 충직한 분이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기도 하고. 그러니 네가 그분과 친밀하다고 하여 당장은 책잡힐 일 없어. 수상께서도 그저 노파심에 그리 이르신 것이고.”
“당장은?”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거니까. 혹여 황제 폐하와 이안 님이 대립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때는 네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게 맞지. 황궁친위대에 계속 남고 싶다면 넌 황제 폐하의 사람이란 걸 잊으면 안 돼.”
바르사베가 똑 부러지게 단언하자, 베릭이 이마를 책상에 비벼 댔다. 그럴 일 없다고 마냥 피하기만 할 수도 없었다. 그리 마음먹는 순간, 대장 자격을 잃는 것이니까.
바르사베가 한숨을 내쉬었다.
“베릭. 하나만 묻자.”
“어.”
“이안 님도 네가 이런 고민 하는 걸 알고 계시냐?”
“이안이?”
베릭이 고개를 번뜩 들었다. 그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만약 네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단 걸 아시면, 뭐라고 말씀하실까?”
“…바보 같다 하겠지.”
“어째서?”
“당연히 폐하를 위하는 것이 옳으니까.”
당장 베릭 자신의 안위와 황제의 안위를 두고 선택하라면, 일말의 고민 없이 황제를 택할 이안이다. 분명 그러리라고 베릭은 확신했다. 이안에게 바리엘은 정말 특별하고 소중한 의미이므로.
“하나 더 묻자. 이안 님 본인이랑 황제 폐하 중 고르라 한다면, 이안 님은 누굴 선택하실까?”
“그때도 이안이는 당연히-”
“그래, 맞아. 잘 모르는 내가 보아도 장관님은 스스로를 희생해 폐하를 위하실 분이다. 그러니 생각할 거리도 안 돼. 이안 님도 본인을 저버리시는데, 너는 어찌하여 네 개인적 욕심을 고민해?”
베릭이 뒤통수 한 대 맞은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는 말이었다.
바르사베는 괜한 고민으로 힘쓰지 말라 이르며 다시 일정표를 살폈다. 그러고는 심드렁하니 덧붙였다.
“그래도 못 해 먹겠다 싶으면 관두든가.”
“닥쳐. 그럴 일은 없으니까.”
제이럿이 죽으면서 남긴 마지막 말이다. 죽을 때까지 그의 말을 지키리라 다짐했다.
“그럼 그만 징징대고 이거나 어떻게 해 봐라. 아니, 2교대가 말이냐? 신입 좀 새로 받자.”
“그러고 싶은데 나랏일이 워낙 많아서 인재 모집은 불가하단다. 상황 좀 풀릴 때까지만 굴러 줘.”
“인재 모집? 옛날에 제국방위부랑 같이했던 그거? 트웰러 장관님 오시면 풀어 줄 생각인가?”
“거기까지는 몰라.”
“사실상 무기한이네. 마검사가 제 발로 굴러들어 오지 않는 이상.”
“…그래도 삼대장 체제는 계속 유지하는 게 좋다고 하니까. 조만간 두 명 더 올리려고.”
“하이고, 없는 살림에 대장이 세 명? 누가 그래?”
“행정부 노인네.”
“…….”
“열받기는 하는데 생각해 보니까 일리는 있어. 폐하를 안전하게 지키려면 서로 감시하고 보완하는 게 맞는 듯.”
“…충고하는데, 그런 식으로 수상님 부르다간 나중에 혼난다.”
응, 엿이나 먹어라. 베릭은 혀를 베- 내밀며 대충 한 귀로 흘렸다. 그러고는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한결 멀끔해진 낯으로 벌떡 일어나 웃옷을 챙겼다.
“근데, 어금니.”
“응?”
“너도 대장직 지원할 거지?”
베릭의 물음에 바르사베가 씨익 웃었다.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아마 그녀만이 아니라 황궁친위대 모두가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위해 지원할 것이다.
“왼팔이 그래서 어쩌냐.”
“이깟 팔 따위. 이기면 그만이잖아?”
대장 선출 방식은 딱 하나다. 일대일 대련. 베릭은 그녀의 팔을 힐끔거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죽기 살기로 해서 꼭 대장 돼라.”
재수 없긴 하지만, 수상의 말에 따르면 바르사베는 베릭의 부족한 점을 채울 수 있는 최적의 동료였으니.
바르사베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너도 하는데, 내가 못 할까.”
* * *
“이안, 그러지 말고 이번 회의는 불참하는 게 어떤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맞는 것 같아.”
본궁으로 가는 마차 안. 로만드로는 이안의 옆에 찰싹 붙어서는 돌아가자며 재차 부탁했다.
목이 쉴 정도로 조르고 있건만, 이안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눈치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서류를 넘겨 대고 있으니, 말 다했다.
“이안. 자네가 건강관리 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내 부덕이 되는 거라고.”
“그것이 어찌 로만드로 님의 잘못이겠습니까.”
“내가 자네 보좌관이잖아!”
“그럴 일은 없습니다. 잠시 어지러웠던 것뿐이니까요. 사실 로만드로 님이 계속 이러시는 게 더 힘듭니다만.”
로만드로는 결국 비장의 카드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말을 더듬으며 조심스레 속삭였다. 모기 기어가는 듯 작은 목소리로.
“아, 아코렐라 대장에게 이를 것이네에…….”
홱-
이안이 반응을 보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로만드로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로만드로 님.”
“으응?”
“여기, 철자 틀리셨네요.”
“뭐? 설마!”
“진짜입니다.”
끼이익!
그렇게 결국 마차는 본궁 앞에 도착하고 말았다. 로만드로가 제 보고서를 다시 가져와 읽는 동안, 경비병이 마차 창을 통해 전언했다.
“마법부의 이안 히엘로 장관님이시지요?”
“그렇네만.”
“폐하께서 도착하시면 잠시 집무실에 들르라 하셨습니다. 바로 올라가 주십시오.”
회의 시간이 곧인데, 집무실에서 따로 보자고 하신다니? 의아했지만, 이안은 알겠노라 이르고는 계단을 올랐다.
미리 회의장에 도착하여 서류를 살피던 자들이 이안을 알아보고서 깍듯이 인사했다.
“폐하, 마법부의 이안 히엘로 장관이 들었습니다.”
“들라 하여라.”
끼이익.
진 역시 곧 있을 회의 때문에 정신없어 보였다. 책상 위에는 보고서 뭉치와 두루마리 따위가 산더미다. 그는 이안을 반갑게 맞이하면서도 펜을 내려놓지 못했다.
“폐하, 송구합니다. 부르셨다 하여 바로 왔습니다만, 나중에 다시 올까요?”
“아닐세. 회의 들어가기 전에 논의할 사안이 있어서. 앉으시게. 하루에 두 번 보니 좋군.”
무슨 일이기에 이러실까. 이안은 탁자 밑으로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었다. 낮 회의가 끝난 뒤, 분명히 수상과 면담했을 것이다. 아마 그것과 관련된 거겠지.
“이안 경, 식사는?”
“예, 마쳤습니다. 폐하께서는요?”
“나도 뭐, 하하.”
“논의할 사안이라는 게…….”
“음. 다른 건 아니고-”
크흠. 진이 헛기침하며 이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신의하는 자에게 의견을 세우려고 하니 정말이지 불편했다. 진은 길게 침묵하며 단어를 조심히 골랐다.
“이안 경. 지금까지 마법부에서 올린 보고서를 보니, 마물에 대한 의문이 있어서 말일세.”
“마물에 대한 의문 말씀입니까.”
“클리포포드 지대에서 일어났던 균열에서 마물이 흘러나온 것도 그렇고, 북쪽 지대에서 겪었던 ‘대마물의 습격’ 사건도 그러하지. 지하신은 봉인되었네만, 혹 그것을 마물 봉인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도 있겠는가?”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그림자신과 마물은 하나로 엮이는 존재. 굳이 따지자면, 신에게 인간이 있는 것처럼 놈에게는 마물이라는 존재가 있는 셈이다.
고로 신께서 세상에 현현하지 않더라도 인간이 살아가는 것처럼, 그림자신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마물은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물의 위기는 또 다른 선상으로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그렇군.”
진이 그럴 줄 알았다며 수긍하자, 이안의 손끝이 멈칫거렸다. 가볍게 쥐었던 주먹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그가 무엇을 이르고 권하려는 지 알아챈 게다.
“폐하, 화총 수입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림자신을 봉인하였으니, 앞으로 세상를 어지럽히는 것은 오로지 마물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물을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는 건 마법사와 마검사밖에 없다.
“하면, 이안 경. 내 생각을 해 보았는데, 마물 대응 부대를 신설하여 이를 대비하는 게 어떤가?”
“이안 장관의 의사를 물어보십시오. 하완의 반란군이 제안한 것은 마법부만 제외하면 모두가 반길 사안입니다. 그자가 진정으로 바리엘을 위하고 있다면 감수하지 않겠습니까.”
진이 이안의 표정을 살피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회의장에서 이르지 못했던 하완 반란군의 제안일세.”
스윽.
“동방의 마법사들이 이드갈에 관심을 보이니, 이를 일부 내어주는 조건으로 그쪽과 공식 수교하는 게 어떨까 싶어. 하완이 도와줄 걸세. 우리는 그저 그들을 공인하고 물자를 보내주기만 하면 되지. 게다가 내란이 끝나면 화총과 그 권한을 모두 넘겨준다고 하니, 이는 놓쳐선 안 될 절호의 기회로 보이네.”
미안하다고, 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그대를 경계하고 음해하려는 신하들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진은 속으로 깊이 사과했다.
무엇보다 이안이라면, 자신이 아는 이안이라면 이 속마음과 사정을 잘 헤아릴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마물 대응 부대 신설은 적극 찬성하는 바입니다만, 그 외는 송구하게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들려온 이안의 대답은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 어째서?”
“마물 대응 부대야 데라족의 무기가 있으니 신설에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드갈을 낯선 동방으로 넘기는 일은 단단히 경계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화총이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한들, 바리엘의 힘은 마법에서 나옵니다. 이를 차치하면서까지 행할 거래가 아닙니다.”
이안은 서류를 다시 진 쪽으로 밀며 단호히 뜻을 밝혔다.
“되레 저는 가이아 전역에 퍼진 이드갈을 전량 매입하여 폐기할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미래에는 없는 것이니까. 그저 그림자신을 물리고 균열을 억제할 수단으로 신께서 내리신 선물에 불과하니까.
이안은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러니, 협조할 수 없습니다. 폐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