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86
제786화. 대화가 필요해
“하아.”
수상과 장관이 모두 물러간 후, 진은 거리낄 것 없이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소파 뒤로 고개까지 젖혀 보았지만 가슴의 답답함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상황이 안 풀려도 이렇게 안 풀릴 수 있나. 전쟁만 끝나면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잘 흘러가리라 여겼는데, 오만이었다.
진은 문득 토올룬의 마지막 날 밤을 떠올렸다.
“폐하의 결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라 보는 것이 맞겠지요.”
그게 이런 뜻이었을까?
이안은 아마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과거부터 줄곧 남들보다 몇 수 앞을 보고 행동하던 자였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결전은 전쟁터가 아니라 황궁에서 시작되리란 것도 이안은 짐작했던 게 분명하다.
진은 이마를 누르며 두통을 가라앉혔다.
‘기이해.’
꼭 애쓰는 것 같다. 거스를 수 없는 무언가의 흐름에 맞서, 온 힘을 다해. 착각일 수도 있으나 그리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괴로웠다. 자신은 이안과 마법부를 견제할 생각이 하나 없는데, 어찌하여 뜻대로 되지 않을까. 사람의 마음이고 갑작스러운 사건의 발생이고 뭐고, 참으로 거세게 자신을 흔들어 댔다.
진은 결국 유리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반란군 몰살 사태는 이안 경의 소행이 아니다.’
이안 경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수상과 장관들이 일러 대는 정황적 의심 따위 의미 없다. 오로지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아니라 말했던 이안의 행동만이 그가 믿고 갈 진실이다.
진은 유리잔을 꽉 쥐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보고받은 시체 상태에 따르면, 평범한 인간의 소행이 아님은 명백하지. 하완에 무엇인가 있다. 그것을 밝혀내는 데 초점을 맞추어 조사단을 파견하면 돼.’
외교부 장관은 마법사가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난리를 쳐 댔지만, 진은 묵살할 생각이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마법사들이 승리를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감수했는지 알지 못한다. 하늘을 수놓던 금빛의 궤를 보지 못했고, 잿빛으로 사라지는 동료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던 무력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을 다시 하완으로 보내라고? 이안이 아니라도, 그것은 진이 원치 않았다.
달그락.
진은 잔에 담긴 얼음을 빙글빙글 돌려 가며 잠시 사념에 빠졌다. 언제였더라. 어렸을 때, 이안 경과 함께 술집으로 놀러 갔던 그날이 떠올랐다. 베릭의 희한한 옷차림새가 정말 웃겼는데. 로만드로의 어색한 연기와 시아오시의 숫기 없는 즐거움이 정말 행복했는데.
‘뭔가 잘못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그것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전쟁은 이기고 왔는데 오히려 이전만도 못하다니.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자신이 인지하고 있든 없든 간에, 미세한 어긋남이 어딘가에 있으리라.
그 생각에 미치자, 진은 웃옷을 집어 들었다.
“밖에 누구 있는가?”
“예, 폐하.”
“마법부로 갈 것이다. 이안 경에게 기별 넣어라.”
“준비하겠습니다.”
이안 경에게 가자. 가서, 다 터놓고 대화를 나눠 보자. 그는 현명하고 따스한 자이니 필시 자신의 고민을 덜어 줄 것이다. 더불어 이전에 언성을 높였던 날 이후 어색해진 관계도 풀 필요가 있었다.
진은 들뜬 마음으로 다시금 지시했다.
“그리고 작년에 클리포포드가 헌상한 포도주도 한 병 챙기거라.”
“예, 폐하.”
갑작스러운 밤 산책이었지만, 황궁 신하들은 신속하게 움직여 마차와 포도주를 준비했다. 궁에 몸을 담고 있는 자들이라면 모두가 알았다. 최근 며칠간 황제와 마법부 장관 사이에 생겨난 냉기를. 하여, 언젠가는 이런 식으로 화해를 도모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차다.
히이잉!
마차는 그 어느 때보다 시원하게 내달렸다.
진은 손수 포도주를 품에 안고서 가까워지는 마법부를 지켜봤다. 늦은 시간이지만 분명히 장관실에서 일을 보고 있겠지. 조금은 피곤한 낯으로, 하지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를 맞이하리라.
“헉. 폐하?”
“어쩐 일이십니까?”
마법부 계단을 올라가니 로비에 마법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일하다 야식을 먹으러 나왔나 보다. 그들은 입에 음식물을 한껏 넣은 채로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들 하게. 이안 경은 안에 있지?”
“아, 그게-”
머뭇거리는 마법사의 대답에 진의 발걸음 역시 멈추었다. 마법사들은 입가를 닦아 내며 안타까워했다.
“장관님 외출하셨습니다. 로만드로 님이랑요.”
“…없다고?”
“예, 계속 마법부에 계셨는데 하필이면 딱 오늘 외출하셨습니다. 아마 로만드로 님 자택에 가셨을 건데요. 지금 바로 전언 마법 보내겠습니다.”
“아니-”
진이 다급하게 고개 저었다. 일방적인 방문이었다. 게다가 로만드로와 나갔다면 마법사의 말처럼 그의 저택으로 갔을 것이다.
“되었다.”
아마 그도 휴식이 필요한 것이겠지. 진은 아쉽다는 듯 웃으며 포도주를 들어 보였다.
“그럼 이건 그대들 몫이군.”
“헙! 세상에!”
“그, 그래도 됩니까?”
“이거 클리포포드산 포도주 아닙니까!”
“미쳤다. 오늘 야근하길 잘했다!”
마법사들은 눈을 빛내며 진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러고는 마치 아기를 안아 들 듯 진에게서 포도주를 받아 모셨다.
“다들 전쟁으로 고생한 것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지. 급한 업무가 정리되면 적절한 포상을 내릴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어.”
“아이고, 무슨 말씀입니까, 폐하.”
“당연히! 예, 응당! 바리엘을 위해 할 일이었는데요. 으허, 포도주 냄새 죽인다.”
“가서 자는 애들 다 깨워.”
“어머, 얘 봐라? 미쳤어? 자게 내버려둬.”
“저기, 폐하-”
혹시 같이 드실래요? 하고 말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래도 황제 폐하가 아니신가. 아무리 생각해도 방자한 언사였다. 그렇담 하는 수 없지.
“잘 마시겠습니다.”
“잘 마시겠습니다아아!”
그들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진은 쓰게 웃으며 마법사들이 복도를 내달려 가는 걸 지켜봤고, 이내 몸을 돌렸다.
“…….”
밤공기가 오늘따라 유독 차네. 진은 조용하고 어둑한 주위를 둘러보다가 충동적으로 중얼거렸다.
“출궁하겠다.”
“예?”
“조용히 나갔다 들어올 것이니 베릭에게 알려라.”
황궁친위대장에게 알리라 함은 다른 호위를 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시종들은 잠시 난감해하면서도 황제의 심기를 헤아리며 허리를 숙였다.
마법부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이 황제의 뒤로 내려앉았다. 역광으로 인하여 진의 낯빛은 더더욱 짙어 보였다.
타앗!
잠시 후, 베릭이 말을 끌고 나타났다. 자고 있다 호출받은 것인지 얼굴이 살짝 부어 있다.
“폐하, 나가신다고요.”
“그래. 갑자기 불러서 미안.”
“아닙니다. 저도 따분해서 바깥 생각 간절하던 차였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글쎄.”
진은 잠시 고민했다. 궁 밖이라고 해 봤자 자신도 로만드로의 집 외에는 아는 곳이 없다.
진은 베릭을 돌아보며 겸연쩍게 웃었다. 이안 경과는 마시지 못하게 되었으니, 혼자서라도 허한 마음을 달래 보는 수밖에.
“우리 예전에 갔던 그 술집, 아직 있을까?”
* * *
“여기! 닭구이 하나요!”
“알겠습니다아!”
“어허으, 맥주 시원하다. 희한하게 이 집 술은 달아.”
“꿀을 타니까 달지, 이 사람아.”
“으잉? 정말?”
“입에 들어가는 게 뭔지도 모르고 처먹었구먼.”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 골목의 작은 주점은 시간이 무색하게 바깥 자리까지 바글바글했다. 주인장은 안쪽에서 고기 튀기느라 정신없고, 종업원은 두 팔 걷어붙인 채 열심히 홀을 뛰어다녔다.
“어어, 에이린. 살아 돌아왔구나?”
“오랜만이네요, 아저씨. 여기, 맥주 나왔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다. 다친 곳은 없고?”
“그럼요. 잘 다녀왔죠.”
“에이린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대!”
“뭐? 정말?”
“아잇, 아니라니까요! 왜 자꾸 그러실까!”
주점의 유일한 종업원, 에이린은 손님들의 장난스러운 인사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 역시 개선식 때 갑옷을 벗고 일상으로 돌아온 군인 중 한 명이다. 주점 주인은 그녀가 살아 왔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하며 당분간 맥주를 반값에 팔 것이라 선언했다. 그걸 서빙하는 건 에이린의 몫인데.
“소문 쫙 났어, 에이린. 성기사였다며?”
“뭐어어?! 정말? 근데 왜 여기 있어? 신전 안 가?”
“지금 와서 신전 들어가긴 힘들 것 같아서요.”
“하긴. 여기 맥주 맛 그리워서 못 견디지.”
“황제 폐하 목숨을 구한 적도 있다면서?”
“에고, 누가 자꾸 그런 소문을 퍼트릴까나. 헛소리하는 사람은 맥주에다 소금 타서 줘야겠다.”
띠링!
“어서 오세요!”
에이린은 마침 잘 됐다 싶어 문 쪽을 휙 돌아봤다. 키가 꽤 크다. 그리고 덩치도.
“어라.”
“엥?”
사내는 모자 따위로 변장을 시도한 듯 보이지만, 붉은 머리칼과 반항적인 눈매는 숨기지 못했다. 에이린은 그가 베릭임을 단번에 알아봤다. 그리고, 뒤따라 들어오는 자 역시.
“폐, 폐……!”
폐하?!
세 사람이 입구에 굳어서 서 있자, 주인장이 에이린을 불러 댔다.
“에이린, 손님들을 그리 세워 놓으면 어째?”
“아, 그, 여기는 왜…….”
“술집에 술 마시러 오지, 뭐 하러 오겠어? 꿀맥 둘.”
베릭이 구석에 자리 잡고서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진 역시 당황한 눈치였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꾸, 꿀맥 둘.”
“안주는 닭고기.”
…하 씨. 주점의 인기 메뉴까지 꿰고 있다.
에이린은 주문을 받으면서도 이게 현실이 맞나 싶었다. 싸구려 골목 주점에 황궁친위대장과 황제 폐하가 들이닥치다니… 그것도 엄청 자연스럽게!
“…네. 감사합니다.”
에이린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러자 베릭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소곤거렸다.
“폐하, 혹시 알고서 오자 하셨습니까?”
“…아니, 몰랐지.”
“와 씨, 나 놀라서 기절하는 줄.”
“나도 놀랐다.”
“바리엘 은근히 좁다니까요.”
소곤소곤. 두 남자는 나름 조용히 기척을 죽이고 있었으나, 에이린은 신경 쓰여서 죽을 맛이었다.
“맞다, 에이린! 황제 폐하를 가까이서 봤다 했지?”
“네?”
헉, 젠장!
“얘기 좀 들려줘. 가까이서 보았다면서.”
“아주 잘생기셨다고 하던데.”
“예, 그, 잘, 잘생기셨죠.”
에이린은 맥주를 따르며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손님들이 취해서 폭탄급 발언을 할 때마다 참 재미있게 구경했는데, 이제는 그 대상자가 자신이라니.
에이린은 다들 제발 닥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아저씨들이 말하는 그 잘생긴 황제 폐하가, 방금 저기 구석에서 꿀맥 두 잔을 주문하셨다고!
“폐하 목숨도 구했다면서?”
“제, 제가요? 누가 그래요?”
“주인장이.”
찡긋! 주인장은 에이린을 자랑스러워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얼굴이 화끈거려 죽을 것 같다. 그녀는 볼 안쪽을 잘근잘근 깨물며 잔 두 개를 구석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꿀맥 두 잔입…요.”
“고맙네.”
진은 잔을 받으며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목숨 구해줘서.”
“……!”
흐이이익! 에이린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서자, 진은 웃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 사이에 낀 베릭이 코를 후볐다.
‘어절씨구, 난리 났구나.’
베릭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턱을 괴고 바깥을 살폈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었다. 그러던 중, 문득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로브를 두르고 서둘러 지나가는 인영.
‘어라.’
언뜻 스쳐 지나갔을 뿐이나 굉장히 낯익은 느낌에 베릭은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그를 맞이하여 골목 안쪽으로 안내하는 여자. 베릭의 눈이 커졌다.
‘멜라니아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는 자는…….
‘이안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