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88
제788화. 백호의 털
“여기, 기억나는가?”
로만드로가 골목 안쪽으로 이안을 안내하며 물었다. 그에 이안은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았고, 살포시 웃음 지었다. 당연히 기억나고말고.
“함께 잠행 나왔던 그쪽이군요.”
“역시 기억력이 좋아.”
“저에게는 고작 얼마 전의 일입니다.”
“아.”
오히려 기억력이 좋은 건 로만드로지 않을까? 10년도 더 된 일을 바로 떠올렸으니까 말이다.
로만드로는 멋쩍게 웃으며 골목으로 먼저 들어갔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인지라 시끌벅적한 몇몇 주점을 제외하면 인적이 드물었다. 이안은 로브를 더욱 여미며 잠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들어가겠습니다.”
“음?”
“동방의 마법사와 마주칠 수도 있으니, 여기서 제 전언을 기다려 주십시오. 혹 해가 뜰 때까지 소식이 없다면 마법부로 가서 헤일과 아코렐라에게 알리시면 됩니다.”
로만드로는 알겠노라 답했지만, 참으로 희한한 지시라고 생각했다. 마치 동방의 마법사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뉘앙스 아닌가. 마법부는 물론, 가이아 전체에서도 적수가 없는 이안이거늘…. 로만드로는 괜히 겁주지 말라며 속삭였다.
“긴장 푸시게. 어두워서 그래? 누가 자네를 해친다고 그런 말을 해?”
“혹시 모를 일이니까요. 상대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잖습니까.”
포탈을 연 이후로는 마력이 희미해졌다. 그저 온몸을 구성하고 버티는 데 모든 에너지가 들어가고 있다는 듯이. 게다가 이드갈도 생성 불가. 동방의 마법사에게 어떤 의도가 있는지,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아무도 모르는 터라 조심할 수밖에 없다.
이안은 로만드로에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서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스윽.
로만드로는 초조하게 그를 지켜봤다. 저 멀리 간 이안이 잠시 멈추고, 이내 누군가와 가까워졌다. 상대 역시 로브를 쓰고 있었지만 로만드로는 그자가 멜라니아라는 걸 알아챘다. 두 사람은 무언가를 속닥이더니 이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흐음.”
짤깍.
“으으으.”
딸깍.
로만드로는 1분에 한 번씩 회중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그렇게 10여 분이 지났을 때쯤, 그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쿡 찌르는 것 아닌가!
“으아아아악!”
“아으아아악!”
놀라서 소리를 있는 대로 질렀더니 상대도 덩달아 질겁했다. 로만드로와 베릭은 그대로 굳은 채 눈만 깜빡였다.
“왜 이래? 죄지었어요?”
“아이고,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이놈아! 갑자기 뒤에서 그러면 어떡해? 내가 아주 좀만 젊었어도 어퍼컷 날아갔다.”
“누가 보면 내가 칼로 찌른 줄? 뒤에서 왔으니까 뒤에서 나타나지. 여기서 뭐 해요?”
“어? 그러는 넌?”
“일하는 중인데요.”
“나, 나도 일하고 있지.”
흐음. 베릭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로만드로는 은근슬쩍 시선을 돌렸고, 이어서 저리 가라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여 일 보러 가.”
“들어가고 싶은데 좀 폐하가 남사스러워서. 금방 갈 거예요. 같이 나온 친위대 애들이 덜떨어졌거든.”
“폐하? 폐하를 모시고 왔어?”
“일하는 중이라고 했잖아요.”
“남사스러운 건 또 뭐고?”
“있어요, 그런 게. 근데 왜 자꾸 대답은 안 해 주실까. 로만드로 님은 여기서 대체 뭐 하냐고요. 아까 보니까 이안이 멜라니아랑 저쪽 지나가더만.”
“…그걸 또 봤네.”
“봤지. 봤으니까 여기 왔지.”
베릭이 팔짱을 꼈다. 뭐든지 숨길 생각 하지 말라며.
로만드로는 난감하여 연신 콧수염만 문질러 댔다. 베릭은 황궁친위대 대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황제 폐하를 수행 중이라 하였다. 멜라니아와의 접선이 어찌 흘러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를 알리는 게 맞나? 무엇보다 이안의 판단 없이?
로만드로는 입을 꾹 다물기로 결심했고, 베릭은 황당하다는 듯 두 손으로 그의 볼을 쭉쭉 잡아당겨 댔다.
“입 다물면, 내가 포기할 놈 같아요?”
“읍! 으읍!”
푸핫! 로만드로가 베릭의 손을 타다닥 쳐 내며 결국 백기를 들었다.
“너, 그럼 황제 폐하께 보고 안 할 거냐?”
“…엥?”
“보고 안 할 거면 내 말해 주고.”
“아니, 말이 왜 그렇게 돼요?”
“보고할 거면! 가던 길 가시고, 묻지 말란 말이다.”
별안간 베릭의 머릿속에 수상의 음성이 떠올랐다. 마법부 장관과 각별한 사이인 자가 친위대 대장이 되는 게 맞는 것인지, 황제와 마법부 장관 사이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의심하던 그 목소리.
베릭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 쉬었다.
“하아. 진짜.”
“베릭,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개 같은 상황.
근데 이것보다 더 짜증 나는 건, 앞으로 더한 일이 일어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직감했단 사실이다. 서로의 행적을 숨기고, 정보를 감추고, 이전처럼 문장의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누구보다 가깝지만 멀어지는, 그런 사이.
“씨바알.”
베릭은 힘들다는 듯 쪼그려 앉더니 얼굴을 벅벅 문질러 댔다. 로만드로도 상황이 불편했으나, 물러서지 않고 단호히 주먹을 쥐었다.
곧이어 땅이 꺼져라 들리는 한숨. 베릭은 웃옷을 툭툭 털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게 들어가지 마요. 시간이 몇 시인데.”
“너도 베릭. 조심해라.”
“누가 누굴 걱정해.”
묻지 않는다. 이안이 왜 멜라니아와 만났는지, 그리고 로만드로는 왜 여기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베릭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말인즉, 황제에게 본 것을 보고하겠다는 뜻이다.
베릭이 투덜거리며 몸을 돌리려 하자, 로만드로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아까 베릭이 그러했듯이.
“베릭.”
“…….”
“괜찮을 게다.”
황궁의 생리가 이러하여 겉으로는 각자의 길을 가지만, 우리는 서로를 잘 알고 있지 않니. 헤어지며 서로를 걱정하는 사이이니, 괜찮을 것이다. 로만드로는 그리 이르는 듯했다.
베릭도 아직은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차차 무게를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다.
“갈게요.”
베릭이 모퉁이를 지나 다시 사라지자, 로만드로는 안타깝다는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딸깍,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 * *
“축하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신 것을.”
“저도 축하합니다. 살아 돌아오신 것을.”
이안과 멜라니아는 나란히 걸으며 나지막이 인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멜라니아가 반 발짝 정도 앞서 걷고 있었는데, 이안은 달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인지했다.
아니나 다를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며 그녀가 무언으로 먼저 일렀다.
“이안 경. 하완의 반란군 수장이 죽은 것을 황궁은 알고 있습니까?”
“예. 마침 오늘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시일이 딱 맞았군요.”
“일정을 계산해서 연락했다는 것입니까?”
“네. 맞습니다.”
동방의 마법사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 멜라니아는 최대한 간결하게 자신이 얻은 정보를 모두 이안에게 전달했다.
“이안 경께서는 마법사지만 동시에 바리엘의 장관. 반란군 수장의 죽음이 황궁에 알려진 후 만나는 게 유리하다 판단한 것 같습니다.”
누가? 그들이.
화총 혹은 하완의 정세- 그 무엇이 걸려 있든 간에, 반란군 수뇌부가 모두 죽었으니 바리엘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오로지 동방의 마법사, 그들을 만나는 수밖에.
“그들은 여전히 동방에서 건너온 함을 찾고 있으며, 이안 경과 마법부가 루스웨나에서 이를 얻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습니다. 귀물의 주인 눈치를 꽤 보는지, 은밀하고 신속히 진행하는 걸 선호하더군요.”
멜라니아는 어느 건물 지하로 들어가 가림막을 젖혔다. 방치된 물건들과 상자가 그득했다. 자욱한 먼지 탓에 이안은 소매로 코와 입을 가렸고, 그녀를 따라 더 깊은 지하로 들어갔다.
“이곳은 동방으로 오가던 상단의 건물입니다. 중앙에서 그들과 유일하게 접점이 있었던 곳인 것 같습니다.”
문득 이안은 멜라니아의 기억이 궁금했다. 이안 베로시온이라는 이름이 모두 지워진 세계에서, 그녀는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어렸을 때 만났던 신의 정체까지 모두 잊어버렸을까?
그때, 멜라니아가 복도 끝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에 그들이 있다.
‘조심하십시오.’
멜라니아가 눈짓으로 경고했다. 오만하고, 잔인하며, 성정을 파악할 수 없는 자들. 짧게나마 동방의 마법사들을 마주하며 파악한 내용이었다.
똑똑.
“멜라니아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문이 열리자, 이안은 멈칫하고 말았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있는 붉고 노란 천들. 분명 폐쇄된 공간이었음에도 바람이 부는 것처럼 살랑거리고 있었다. 닥종이 뒤로 아른거리는 불빛은 낯설었고, 어디선가 이국적인 향내가 났다.
“아하.”
기다란 곰방대를 물고 있던 여인, 은랑이 여유롭게 웃으며 이안을 맞이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천 자락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놀랍군. 생각보다 어리시어.”
“…이안 히엘로입니다.”
“은랑이라고 합니다. 동방의 경(暻) 출신이지요. 저쪽은 호흔. 현(峴) 출신입니다. 앉으십시오. 갑작스레 연락했는데도 이리 와 주시니 고맙습니다.”
은랑은 어서 앉으라는 듯 그를 안내했다.
하완에서와는 달리 격식과 예의를 차리는 모습에 멜라니아는 다시 긴장했다. 그저 우악스러운 자들이라면 차라리 다루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상대에 따라 태도가 철저하게 달라지는 자들은 언제나 까다롭고 음험한 법.
은랑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곰방대를 물었다.
“궁금한 것이 참으로 많아요.”
이안은 힐끗 호흔을 쳐다봤다. 그는 길고 빳빳한 흰색 털 하나를 눈썹 위에 대고서 이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기이한 행동에 눈길이 가자, 은랑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호흔의 나라에서는 처음 만난 자들에게 곧잘 저럽니다.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이해해 주십시오.”
은랑은 이안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린 다음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반란군 수장이 화총의 대가로 주었던 이드갈이다. 그녀는 귀한 보석을 어루만지듯 그것들을 잘그락거렸다.
“하완에서 화총을 내어준 대가로 이것을 받았습니다. 놀랍게도 마력을 흡수하여 무력화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더군요. 이는 동방에서 본 적이 없는 마석인지라, 상당히 흥미가 일었습니다.”
후우우.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짙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미색이 짙은 만큼 내면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아이. 이안에 대한 은랑의 첫인상이었다.
“근데 듣자 하니, 이걸 만든 게 장관님이시라고요.”
“맞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동방에서는 마석을 만드는 마법사가 존재하지 않아서요. 실로 놀랍더군요. 하여 한번 뵈었으면 하던 차에, 저 영애가 저희를 이리로 인도했답니다.”
이안은 은랑과의 대화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인사치레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어쩐지 뭐랄까.
‘…의아하군.’
이안이 무어라 이르려는 순간이었다. 은랑이 호흔의 한쪽 팔에 기대며 부탁했다.
“그런데 그 전에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무엇을요?”
“그대가 이드갈을 만들어 내는 마법사라는 것을요.”
‘마석을 만들어 내는 마법사’란 가이아에서도 상식 밖의 존재. 그런데 그렇게 생성한 것이 마력을 파훼하는 마석? 솔직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기는 게 당연했다. 저들은 지금 이안이 진짜 ‘마법사’인지부터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은랑.”
그때, 호흔이 그녀를 불렀다.
“그럴 필요 없어.”
“음?”
호흔이 눈썹에 대고 있던 흰 털을 내렸다. 그것은 1,000년 이상 산 백호의 털. 영물의 힘을 빌려 상대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도록 돕는 물건이었다.
“거짓이다.”
이어지는 호흔의 말에, 멜라니아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저자의 이름은 이안 히엘로가 아니야. 나아가 이 세계의 존재도 아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