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89
제789화. 정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침묵을 깬 건 멜라니아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은랑과 호흔은 그들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었으니 결과에 대한 믿음이 있고, 이안 역시 놀라긴 했으나 굳이 반박할 거리가 아니었다. 진실이었으니까. 그는 히엘로이면서 베로시온. 나아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사람이지 않나.
‘신기하군. 영혼을 읽는 도구인가.’
상대의 본질을 꿰는 기이한 물건이 고작 털 한 가닥이라니. 동방의 수준은 이안이 짐작한 것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아르센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신탁의 빛을 가져오고, 온갖 사람들 다 불러 모아 난리 쳤던 걸 생각하면 더더욱이.
“이자는 이안 히엘로가 분명합니다. 시간선에 관한 것은 아마 심연 탓이겠지요.”
“심연? 그곳을 다녀왔다고?”
“예. 저도 함께-”
다녀왔다고, 그리 이르려던 멜라니아가 멈칫거렸다. 기억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드문드문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은랑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멜라니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을 지울 수 없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그들 주위를 밝히는 닥종이 조명은 여전히 따스하게 흔들리고 있는데 말이다.
호흔은 흰 털을 챙겨 넣으며 대답했다.
“멜라니아. 그대와 저것은 달라.”
호흔은 확인차 다시 한번 털을 눈에 대어 멜라니아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녀는 변함없이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심연에 다녀왔었다는 사실 여부를 떠나, 이안은 완전히 다른 존재다.
은랑이 흥미롭게 중얼거렸다.
“마물인가?”
“모르겠다.”
‘모르겠다’라는 대답은 의외였다. 호흔은 언제나 상대의 존재를 정확히 명명하는 걸 선호하였으므로.
“마물이라 하기에는 좀 다른데.”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모습. 호흔은 자신이 보았던 이안의 본질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은랑은 별로 개의치 않아 하는 눈치다.
“됐어. 중요해?”
동방에서는 마물이 인간인 척 스며들어 사는 것이 공공연했다. 마석을 만들어 내는 마법사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뭔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던바 은랑은 곰방대를 들고서 한껏 편하게 자세를 풀었다.
“함은?”
우선 그들의 목적인 함을 찾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이안은 무슨 생각인지 계속 침묵하며 그들을 살폈다. 그에 은랑은 곰방대 재를 툭툭 털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다는 웃음이 걸려 있다.
“그래. 어딜 가나 녹봉 먹는 것들은 그런 맛이 있지. 난 별로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 의도가 뚜렷할수록 서로의 이해관계가 확실히 겹치거든. 뭘 원해?”
소년의 나이로 돈, 명예, 권력 모든 걸 쥔 자였다. 어설픈 것으로는 절대 동하지 않으리라.
게다가 정체를 숨기고 황궁 깊이 숨어든 꼴로 보아, 이자가 원하는 바는 원대하다 못해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의 무언가일 터. 은랑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바리엘?”
계속 무덤덤한 시선만 보이던 이안이 처음으로 반응했다. 멜라니아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지금 은랑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서 숨을 죽였다.
“정체를 숨기고 황실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게 그것 말고 또 무엇 있겠어? 동방에도 네놈 같은 게 아주 많아. 왕을 홀린 여우가 나라를 말아먹은 적도 있지.”
게다가 마법부는 황실과 대립하고 견제하는 관계라며? 모든 게 명확했다. 은랑은 턱을 괴고서 싱긋거렸다.
“네놈은 함을 돌려주고, 우리는 네놈의 정체에 대해 함구하여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도록 도와주마. 이만한 거래가 또 어디 있겠니? 말만 해 보렴. 황제의 목이라도 가져와 주마.”
은랑은 자신 있었다. 바리엘은 아직 그들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으니까. 특히나 가이아와 동방은 서로를 잘 모르지 않나.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습은 천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이겨 낼 수 없는 법.
“으흠?”
은랑이 콧소리를 내며 이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서늘하고 위험한 눈빛. 멜라니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옆모습만 보아서는 이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황제의 목을 가져와?’
이안은 은랑의 말을 되새기며 피식 웃었다.
감히, 같잖지도 않게.
그는 은랑의 시선을 가만히 마주하더니, 나지막이 일렀다.
“내 정체는 그렇다 치고.”
뜻밖의 서두에 멜라니아가 당황했다. 호흔의 말을 부정하기는커녕 일부분 사실이라 인정한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지 않나?
“네놈들은 대체 무엇인가?”
“무엇이라니? 네놈처럼 마물일까 봐?”
은랑과 호흔은 이안의 정체를 거의 마물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현 세계의 사람이라면 백호의 털 아래에서 변화를 보일 리 없다. 균열 혹은 그 아래. 나아가 인지하지 못하는 다른 세상에서 온 것들만이 이상 현상을 보이니까.
“마물이라니요!”
“닥쳐라, 멜라니아. 그만 끼어들어.”
멜라니아의 만류에도 소용없었다. 은랑이 이안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자, 그녀의 어깨를 타고 머리칼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우리는 동방의 마법사다. 하늘의 선택을 받아 권능을 행하고, 기적을 창조하는 자들이지. 어설프게 흉내만 내고 있는 네놈과는 근본이 다르다는 뜻이다.”
그러자 이안이 비소를 머금고서 그녀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한껏 가까워진 거리. 은랑은 아이의 녹안 속 일렁이는 무언가를 감지했다. 차갑게 휘몰아치는 저것은-
‘분노?’
“말고.”
이어지는 놀랍도록 서늘한 음성.
“네놈들의 진짜 목적.”
“…무슨 말인지를 잘 모르겠네.”
“하나부터 열까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보이고 있으니 의문스럽기는 나보다 네놈들이 더하다.”
이안은 손을 뻗어 은랑이 꺼낸 이드갈을 제 앞으로 끌어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은랑과 호흔은 그저 멈칫거리는 것 외에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했다.
“이드갈은 존재 자체만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이물(異物)이다. 동방에서는 비슷한 존재 자체가 없다며? 한데 은밀히 임무를 수행하고자 가이아까지 넘어온 자들이, 이드갈을 모은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이것을 동방으로 가져가면, 필시 네놈들의 모든 이전 행적이 들통날 터.”
은밀하길 원하면서 그 누구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만한 걸 갖고 간다니. 이보다 모순적인 행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주머니의 크기로 보아 연구 목적으로 끝날 양이 아니다. 하완 반란군들조차 네놈들이 이드갈에 흥미를 느낀다는 걸 알고서 바리엘에 전언할 정도지. 과하지 않나?”
은랑은 대답 대신 연기를 뱉어 냈다. 연신 낯빛에 서려 있던 여유로운 미소는 지워진 지 오래다.
“지난 경험으로 이드갈을 원하는 자는 딱 두 부류였다. 균열을 억제하려는 자들. 그리고 마법사를 견제하려는 자들.”
점차 분위기가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다. 살랑거렸던 천장의 천이 조금씩 거칠게 휘몰아치고 있었으니.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함을 찾는 방식도 의아해.”
대마법사라 불리는 자가 제아무리 막무가내라 할지라도 훔친 자는 따로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리도 몸을 사리며 비밀에 부치려 하는가?
찾는 것이 중요하다면 바로 각국의 지도자에게 정체를 밝히고 협력을 요청하는 게 자연스러운 방법. 은밀하고 신속하게? 낯선 타국 땅에서 취할 만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역시 의미하는 건 한정되어 있다. 이들은 귀물을 지키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데 대한 역정을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되면 이드갈을 모아 가려는 게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면 혹시-”
이안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함을 훔친 자와 네놈들이 한패가 아닌지?”
그리되면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어찌하여 이들이 그런 식으로 움직였는지, 그리고 이드갈을 원하는지까지도.
“동방의 대마법사라는 자는 적이 꽤 많은 듯하군.”
함은 마법사의 힘을 한 단계 성장시켜 주는 귀물. 자신을 강화함과 동시에 이드갈로 상대를 견제한다면, 제아무리 대마법사라도 할 만하다 여겼나 보다. 그자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은랑은 결국 어이없단 듯 실소를 터트렸고, 멜라니아는 아예 이안의 뒤에 딱 붙었다. 동방의 손님이라 여겼는데, 인제 보니 동방의 도둑놈……?
“이래서 장관이로구나. 나는 얼마나 같잖은 나라이기에 이리도 어린것이 고위 관직에 올랐나 싶었다. 아무튼, 그래서-”
그녀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젖혔다가 바로 했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우리가 네놈의 정체를 궁금해하지 않듯, 네놈도 그리하면 될 일 아닌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내어주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그들은 함을 받고, 이안은 원하는 바를 이루면 그뿐이다.
사아아악!
순식간에 공기가 팽창하면서 파괴적인 흐름을 만들어 냈다. 붉고 노란 천 따위가 어지럽게 얽히며 해괴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안은 흐트러지는 머리칼을 한데로 넘기며 마력의 흐름을 느꼈다. 은랑이라 했던가. 상당한 실력자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헤일보다 조금 우위.
‘함에 적혀 있던 내용을 상세히 물어보려 했거늘.’
신뢰가 없는 자들에게 번역을 맡겼다가 무슨 혼란을 선사할지 가늠할 수 없다. 더하여, 자신들이 이미 함을 사용했다는 걸 알게 되면 어찌 나올지 짐작 불가다.
이안은 넌지시 말을 던졌다.
“그나저나, 동방의 대마법사는 정녕 함의 실종을 모르나?”
“뭐?”
느닷없는 질문에 은랑의 미간이 짙어졌다.
“아닐 것 같은데.”
절대자라는 이명까지 가진 자가 함의 실종과 사용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새로운 마법진을 창조하고 마법의 역사를 한 단계 나아가게 하는 귀물인데? 글쎄다. 그런 자가 절대자라면, 동방의 수준도 조금 실망스럽지 않겠나.
이안도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터라 적당히 던진 말이었지만, 은랑과 호흔에게는 적잖은 혼란을 안겨 주었다.
“뭘, 뭘 알고 있어?”
본질은 마물일지라도 어쨌거나 대제국의 마법부 장관. 혹여 동방에서 연락을 받거나 들은 게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이안은 쉽게 알려 줄 생각이 없다는 듯 손으로 오른쪽 귀를 지그시 눌렀다.
지이잉! 지잉!
-로만드로 님. 지금 연락하십시오.
전언 마법이다. 인근에서 대기 중인 로만드로에게 보내는. 지금의 그로서는 둘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아쉽군.’
함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세 명의 힘이 필요했다. 서로의 힘의 격차가 크면 클수록 위험하다 하였으니, 셋은 분명 비슷한 실력을 갖췄을 터.
한때 천려와 히엘로를 불태웠던 마법사 비토르. 그리고 여인 은랑. 눈앞의 호흔이란 자 또한 둘의 경지와 다르지 않을 게다.
‘마력이 온전했었더라면 이 자리에서 찢어발겼을 것인데.’
감히 황제의 목숨을 운운하다니. 당장 그리하여도 마땅하건만, 여의치가 않았다.
“……!”
일순 이안의 금안을 본 은랑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를 공격하기 위해 마법을 불러일으키려 할 때였다.
척.
호흔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은랑.”
이곳은 바리엘 한복판. 황궁까지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마법사들이 죄다 몰려오면 아무리 자신들이라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 그래도 알아낸 것이 있으니, 일단은 한발 물러서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다.
“내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해했지.”
이안은 계속해서 보란 듯이 마력을 터트리고 있었다. 얼마든지 덤벼 보라며.
“화총 갖고 꺼져라. 네놈들의 나라로.”
촤아아아악!
불길이 사방을 집어삼켰다. 그와 동시에 호흔이 소매를 휘둘렀다. 퍼어엉!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온 땅이 진동했다.
멜라니아는 얼굴을 가리며 주저앉았다. 휘몰아치는 화염 바람에 금방이라도 타들어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통스럽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아.”
동방의 마법사들이 사라졌다.
공간을 가득 채웠던 이안의 불길도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가만히 서 있는 이안의 뒷모습. 무언가 불안했다. 마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였지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저기, 괘, 괜찮으십니까? 이안 경.”
“…고개를 돌려 주십시오.”
덜썩.
이안이 그대로 쓰러졌다. 창백한 얼굴. 그의 입가로 검붉은 피가 끝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