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9
제79화. 리엔의 사정
“이안.”
한편, 중앙정원으로 나온 이안은 로만드로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메렐로프에서 백작 부인이 왔다지? 어디 계신가? 아마 백작께서 전면에 나서기 민망하여 내세운 듯싶은데, 하하하! 거참.”
“저도 그리 생각했습니다만, 백작 부인께선 지금 메리 부인의 방에 계십니다.”
“응? 메리 브라츠 부인 말인가? 거긴 왜? 친우라 들었네만, 뒤늦게 애도라도 하려나 보지?”
“글쎄요. 저도 그런 거라면 그나마 낫겠습니다만. 메리 부인에게 빌려준 것이 있다 하여 물건을 찾고 있습니다.”
“…어떤?”
“저도 모르겠습니다. 물어도 대답을 안 하셔서.”
이안의 말에 로만드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족 여인끼리 주고받는 게 대체 무엇이 있을까? 금방 끝날 것이라 예상했던 메렐로프 부인의 기행은 점심이 지날 때까지 이어졌다.
끼익.
“…….”
메리의 방을 나선 메렐로프 부인의 표정이 묘했다. 원하는 바를 이룬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안은 뒤이어 나온 하인이 희게 질린 것을 확인하고 그녀가 물건을 찾는 데 실패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부인?”
“아. 이안 경,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원하시는 건 찾으셨습니까?”
“아니요. 그게, 아무래도 소란 중에 소실된 것 같아요. 방에는 없는 것 같더군요.”
부인은 머리를 사라락 넘기며 웃음을 머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실로 화사하고 매력적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눈치로 보아,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메렐로프 부인은 찾는 물건이 무엇인지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굳이 부스럼 내가며 물어볼 필요가 없지.
“그럼, 응접실로 드시겠습니까?”
“마침 차가 마시고 싶었는데, 그게 좋겠습니다.”
“메렐로프 부인, 안녕하십니까.”
“어머!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나요? 성함이 로만드로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맞습니다. 부인.”
메렐로프는 로만드로에게 손 키스를 받으며 반갑게 인사했고, 이내 조잘대며 응접실로 돌아 내려갔다. 그걸 계단 아래로 보던 베릭이 중얼거렸다.
“범상치 않은 또라이의 냄새가 나는데.”
“…베릭.”
“맞잖아. 왜 저래?”
“방을 한번 둘러본 뒤 정리하거라.”
“눼눼. 알겠습니다.”
베릭은 건성건성 대답하며 메리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안이 응접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로만드로와 메렐로프 부인이 차를 나눠 담고 있었다.
“이안 경, 이거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부인. 개의치 마세요.”
“그리고 제가 아까 다른 선물이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네. 그러셨지요.”
이안은 메렐로프 부인의 맞은편에 앉으며 대답했다.
“듣자 하니, 중앙에 헌납금을 내셔야 한다고.”
“아. 어찌 아셨습니까?”
“다 들리는 법이지요. 그런데 금액이 좀 큰 듯하여, 저희 쪽에서 좀 도와드릴까 하는데요.”
“메렐로프 백작께서요?”
“네. 원하시는 만큼은 무리겠지만, 아마 금화 5,000닢 정도는 빌려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아. 빌려주신다?”
“무이자로 하는 대신, 굴라 씨앗을 좀 받고자 하는데요. 어떠세요?”
이안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별로인 것 같은데요.”
“크헙!”
저도 모르게 사레가 든 것은 로만드로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대놓고 면박을 주다니. 하지만 막상 부인은 아무렇지 않은지 어깨만 으쓱거렸다.
“그런가요?”
“우선, 백작님과 부인께서 이리 신경 써주심은 감사합니다. 다만, 헌납금은 저희가 스스로 내야 의미가 있는 것이고, 또 그럴 만한 여력도 있습니다.”
“여력이 있다? 진심이십니까?”
“진심이고 말고요. 따라서 제안은 받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금화 5,000닢의 이자와 굴라를 두고 본다면 당연히 후자의 가치가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굴라 씨앗은 죽는 법 없이 열댓 개의 씨앗을 다시 뿌리니, 이는 곧 겨울철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굴라는 이전에 한 닢의 가치도 없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그러했죠. 금화는 또 벌면 되지만, 사람 목숨은 죽으면 끝입니다.”
메렐로프 상황을 확실히 꿰뚫고 있는 말이었다. 주머니에 돈은 가득 차 있지만, 이걸 쓸 곳이 없는 상황. 백작 부인이 찻잔을 머금으며 살포시 웃었다.
“혹시 굴라를 사고 싶으시다면, 거기에는 적극적으로 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 서로에게 깔끔하고 보기에도 좋을 겁니다. 무릇,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라 하지 않습니까.”
“…판다면 얼마를 생각하시죠?”
“한 포대에 쉰 닢입니다.”
“쉰 닢이라 하면?”
“금화.”
맞은편에서 듣고 있던 로만드로가 콜록거리며 차를 흘렸다. 일전에는 분명 한 포대에 금화 열 닢이라 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안은 분명히 했다. ‘최소’ 열 닢이라고.
“세상에나. 그런 잡풀을 금화 쉰 닢에 파신다니.”
“크기를 보여드릴까요?”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인을 불렀다. 하인은 주섬주섬 빈 자루를 펄럭이며 크기를 확인시켜 줬다. 땅에서 종아리까지 오르는 작은 자루.
메렐로프 부인은 눈썹을 위로 올리며 여전히 감탄 아닌 감탄만 하는 중이다.
“와우.”
마치 제 일이 아니라는 듯.
“지금 저를 놀리시나요?”
“그럴리가요, 부인. 부인께서는 백작님을 대신해서 오신 분 아닙니까? 부인을 모욕하는 것은 백작님을 모욕하는 것.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안은 그녀의 태도를 보고서, 확신했다. 굴라의 매매니 뭐니 별로 관심이 없는 게 분명한 듯 보였다. 아무래도 메리 부인에게 빌려줬던 물건이 유일한 목적인 것 같은데…….
“자루에는 굴라 씨앗이 서른 개에서 마흔 개 정도 담깁니다. 그걸 모두 심는다고 하면 한 달 안에 수백 개로 불어날 것이고, 또 한 달이 지나면 수천, 수만 개로 늘어나겠지요.”
하나도 먹지 않고 온전히 땅에 심는다는 가정 아래의 일이었다. 이미 겨울의 허리로 접어드는 시기다 보니, 절대 그럴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두 달이면 메렐로프 영지의 모든 자를 살리고도 남는 양입니다. 영지의 근간은 인구수에서 나온다는 걸, 잘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흐음. 그래요.”
“가격 형성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저희 또한, 메렐로프 백작님처럼 제 영지 사람들을 우선으로 생각할 뿐이라…. 그때는 곡류를 얼마에 파셨더라?”
로만드로가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어 거들었다.
“필수품이었던 밀과 옥수수는 제외였고, 부재료들은 값이 두 배 이상이었죠. 특히 감자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통 하나당 금화 절반을 받으시던데요.”
다 너희가 했던 짓 아니냐는 뜻이다. 도와달라고 할 때는 힘들다며 가격을 그렇게 쳐 받으려 했으면서, 지금 똑같이 돌려받고 있노라고.
부인은 머리를 배배 꼬며 창밖만 멍하니 쳐다봤다. 그리고 문득, 뭐가 생각난 것처럼 조용히 읊조렸다.
“사실 주머니 여는 분은 백작님인지라, 제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긴 합니다. 먹고 사려면 금화 쉰 닢이 문제겠어요? 땅이라도 내어줘야 할 판인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군요.”
한편, 메리 부인의 방 안.
이안과 메렐로프 부인 그리고 로만드로가 미묘한 거래를 트고 있을 때. 슬렁슬렁 메리의 방을 둘러보던 베릭이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끼익.
“베릭 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해나였다. 그녀는 젖은 손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 아까 메렐로프 부인이 와서 방을 헤집었는데, 나보고 한번 둘러본 다음 문 잠그라 해서.”
“방을 헤집어요? 왜요?”
“몰라. 메리 부인이 물건을 빌려놓고 안 돌려준 게 있나 봐. 이안은 그게 방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도저히 안 보여.”
메리 부인이 도망가면서 보였던 행동. 그 긴박한 순간에도 방에 들렀다 가려 하지 않았나.
“뭔지도 모르고요?”
“미쳤지?”
“음. 확실히 쉬운 상황은 아니네요.”
해나는 허리춤에 팔을 올리고서 빠르게 방 안을 훑어봤다. 그리고 넙죽 엎드려서는 침대 밑에 빗자루를 집어넣어 쑤셔봤다.
“뭐 해?”
“물건 숨기는 곳 말입니다. 방 안에는 생각보다 공간이 거기서 거기서든요. 침대 밑이라든가, 아니면 옷장, 수납장 아래나 뒤쪽…….”
“다 찾아봤어.”
“그것도 아니면 바닥이나 천장.”
“바닥이랑 천장?”
해나는 빗자루로 바닥을 쿵쿵 두드리며 걸었다. 소리로 빈 곳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쿵! 쿵쿵!
“네. 나무 바닥이 뜯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층고는 워낙 높아 손에 닿질 않으니… 아!”
해나는 뭔가 생각난 듯 천장을 휙 쳐다봤다. 시선에 고정된 것은 샹들리에 장식. 흐트러지는 나무처럼 중앙으로 시작해 사방으로 뻗는 천이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잠시만요. 의자로는 안 될 것 같은데요.”
“사다리?”
“네네.”
“내가 갖고 올게. 넌 바닥이나 계속 두드려.”
후다닥 밖으로 뛰어가려던 베릭이 멈칫거렸다. 그러고 보니, 해나가 어떻게 저리 능숙한지 모르겠다는 듯.
“근데 너, 대체 뭐냐? 문도 잘 따, 손기술도 좋아, 물건 숨기고 찾는 솜씨도 예사가 아니네.”
“우리 동네 사는 애들은 다 이 정도쯤은 해요.”
“아닌 것 같은데…….”
환경이 만들어낸 능력이랄까. 해나네 집은 그나마 좀 덜한 편이지만, 듣기로는 미약을 잔뜩 숨겨 놔서 천장이 무너진 집도 있다 들었다.
해나가 서두르라고 손짓하자, 베릭은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충실히 말을 들었다.
“꽉 잡아 주세요.”
“내가 올라가는 게 낫지 않아?”
“베릭 님은 당장 서랍 안에 있는 옷도 못 찾지 않으십니까. 흔들리지 않게 잡아 주세요.”
끼익.
해나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샹들리에 안쪽으로 손을 뻗어 올렸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전등의 온기, 그 때문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먼지 따위가 손에 묻어났다.
“조금만 왼쪽으로… 아!”
“왜? 왜왜? 찾았어?”
“어…….”
해나는 손에 잡힌 둥근 물건을 꺼냈다. 검은색 광택이 나는 분첩이었다. 아무래도 이것이 메리 부인과 메렐로프 부인이 나누던 물건인 듯싶은데…….
“화장품을 왜 여기다 숨기셨지?”
“그러게. 별것도 아니구먼!”
“열어볼까요?”
해나가 분첩을 건네주고 사다리를 내려오는 동안, 베릭이 참지 못하고 먼저 뚜껑을 열었다. 고운 분가루가 가득 담겨있었다.
“진짜 별거 없는… 엥?”
“왜 그러세요?”
“이거… 냄새…….”
해나가 의아하게 물었으나, 베릭은 분에 코를 처박고 킁킁거리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두어 번 숨을 들이쉬었을까? 갑자기 베릭의 눈이 회까닥 뒤집히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쿠웅!
“헉! 베릭 님!”
그와 동시에 분가루도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해나는 베릭의 몸을 흔들어 보았으나, 몸이 빳빳하게 굳어가며 영 깨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어억…….”
“아, 이, 이안 님! 이안 님!”
해나는 뒷걸음질 치며 서둘러 응접실로 뛰어갔고, 노크할 새도 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말았다. 로만드로와 이안 그리고 메렐로프 부인이 꽤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이안 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소란이냐, 해나.”
“베릭 님이 그, 물건을 찾았는데요. 그, 검은색 둥근 분첩인데, 가루 냄새를 맡자마자 쓰러지셨습니다.”
“대체 그게…….”
영문을 모르겠다는 이안과 달리, 메렐로프 부인은 반사적으로 뛰쳐나갔다. 해나가 뒤로 밀쳐 쓰러지자, 이안 역시 놀라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부인? 부인!”
타닥타닥!
드레스 치맛단을 잡고 뛰는 모습이 여간 필사적인 게 아니었다. 이안은 재빨리 메렐로프 부인을 따라잡아 팔을 잡아끌었다.
파앗!
“부인. 잠시 진정을 좀 하시고…….”
“이거 놓으세요!”
“아니, 잠깐만…….”
가벼운 실랑이. 부인은 계단을 밟고 쭉 미끄러졌고, 이안 역시 함께 아래로 굴렀다. 뒤쫓아온 로만드로와 해나가 이안을 불렀다.
“이안 경! 괜찮나?”
“이, 이안 님! 괜찮으세요?”
“아아. 괜찮습니다. 부인, 다치신 곳은…….”
“아…….”
얼마나 급한지 계단을 짚고 오르는 메렐로프 부인. 슬쩍 들려 올라간 치마 아래로 부인의 발목이 보였다.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는, 보랏빛의 피부.
이안은 순간 흠칫거렸으나, 이내 그것이 피멍 자국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