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790
제790화. 달라진 건 없다
“…베릭 님은요?”
에이린은 탁자 위 새 맥주를 내려놓다가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그저 모른 척해야겠다 다짐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았거늘, 말이 먼저 나간 게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방금까지 맞은편에 앉아 있었던 베릭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진 역시 모르겠다며 고갯짓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뭔가를 봤나 봐.”
“네? 무엇을요?”
“모르지. 중요한 거였나.”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폐하, 아니, 일행을 이리 혼자 두고 간답니까? 그러면 안 되지요.”
또 폐하라 부를 뻔했다…. 에이린은 슬쩍 뒤를 돌아 주점 내부를 살폈다. 손님들은 어느새 얼큰하게 취해서는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고, 고기 굽던 주인장도 빈 잔 하나를 들고서 손님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다.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멀쩡한 이 하나 없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 진이 베릭이 앉았던 곳을 툭툭 두드리며 에이린에게 부탁했다.
“혼자 있기 좀 그런데.”
사실 혼자는 아니다. 황궁친위대원 두 명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지키고 있을 것이니까. 하지만 그게 무엇 중요한가.
“앉을래?”
결국 에이린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진의 시선을 이겨 내지 못했다. 고개를 슬쩍 돌리면서도 그의 맞은편에 앉고 만 게다.
…이게 따지고 보면 다 이안 장관 때문이다. 괜히 이상한 소리를 해서 사람 신경 쓰이게 하였으니!
“잘 지냈고?”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묻는 인사다. 에이린은 손으로 허벅지를 꽉 꼬집으며 정신을 바로 차리기 위해 애썼다. 오해하지 말자. 황제 페하께서 어찌 자신 같은 자에게 마음을 두신단 말인가? 이안 경의 짓궂은 농담이라 치부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예, 잘 지냈습니다. 폐하는-”
“진.”
진이 부드럽게 에이린의 말을 잘랐다.
“진이라고 불러라.”
“……!”
저 시끄러운 취객들의 시선을 끌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진은 웃으며 눈짓으로 그리 일렀으나, 에이린은 쉽게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사실 그녀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바리엘에서, 아니 가이아에서 함부로 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으니. 결국 에이린은 주어를 생략하는 걸 택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황궁의 업무가 과중할 것인데, 이 밤에 다른 곳도 아니고 작은 주점을 찾은 데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진은 별다른 대답 없이 맥주만 한 모금 머금었다. 그러곤 잠시 추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반대쪽 문을 가리켰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짐으로 막아 둔 곳이다.
“10년 전, 여기 처음 왔을 때는 저쪽이 입구였다.”
“네? 10년 전이요?”
“그때 베릭의 옷차림이 정말 이상했어. 로만드로가 나와 이안 경의 이숙 역을 맡았는데, 너처럼 자꾸만 호칭을 실수하여 베릭에게 한 소리 들었지.”
에이린은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러자 그걸 본 진 역시 따라서 웃음을 흘렸다.
“베릭이 자꾸만 길을 잘못 들자 시아오시가 옷깃을 잡아끌었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게 재밌더라고. 그때 나는 맥주 대신 우유를 마셨다.”
“우유요?”
“그래. 그것도 꿀이 들어간. 아주 맛있었어.”
“아아. 사장님이 단것에는 일가견 있긴 합니다. 그래서 찾아오셨습니까? 그 맛이 그리우셔서요?”
“…응. 그리워.”
진이 그리워하는 건 그날의 우유 맛과 함께 나누던 웃음, 그리고 조심히 잡았던 이안 경의 손, 나아가 내일을 기대하는 마음 따위였다.
에이린은 진의 마음을 헤아리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구나. 자신이 여기서 일한 지 3년째인데, 그간 진과 베릭처럼 눈에 띄는 손님을 본 적 없었다. 그러니까, 말마따나 근 10년 만에 찾았다는 뜻.
“곧 있으면 바리엘로 돌아갈 것인데, 그때 에이린이 폐하의 곁을 꼭 지켜 주었으면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대는 누구보다 믿음직하고 분명히 폐하께 힘이 될 인물이라서요.”
에이린은 문득 이안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도 이상하였지만, 지금 보니 더더욱 그러했다. 마치 진이 이리도 힘들어할 줄 알고서 한 말 같지 않나.
에이린은 나무 탁자를 가볍게 문지르며 운을 뗐다.
“혹시 이안 장관님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러자 진이 놀라서 그녀를 돌아봤다. 대체 어떻게 알았냐는 듯. 에이린이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실은 종전 후 토올룬에서 이안 장관님과 잠시 대화한 적이 있습니다.”
“이안 경과?”
“예. 특별히 거창한 대화는 아니었고요, 그러니까-”
에이린은 무어라 요약하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폐하를 걱정했습니다. 앞으로 많이 힘드실 거라 생각하시는 듯 보였어요. 근데 이리 보니까, 무슨 일인지 자세히는 몰라도 그분의 예상이 맞았나 봅니다.”
“내가 많이 힘들 거라고…….”
역시. 진은 이마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이안 경은 전쟁 후 황궁의 변화를 예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어. 이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여겼던 거겠지.’
그리고 마법부와 자신에게 몰려간 권력의 무게를 스스로 줄이기보다 진이 직접 쳐 내는 게 옳다고 여긴 것이다. 쥐여 주는 것은 놓치기 쉽지만, 쟁취한 것은 영원히 제 품에 묻는 법이니까.
“하아.”
“폐하?”
“참 어렵다.”
어렵지만, 해내야 하는 일이기에 해내는 수밖에 없다. 이안의 기대대로, 이안의 뜻대로 그리 해내는 것만이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타개책이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에이린. 너와 대화하다 보면 언제나 신기하게 길이 보인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너를 만나서 좋다고, 그리 말해도 될까? 진이 잠시 고민하던 사이였다. 둘 사이에 맥주잔 하나가 더 놓였다.
쿠웅.
“폐하. 잠시 말씀 좀.”
베릭이었다.
말도 없이 사라졌으면 조용히나 들어와 눈치 살필 것이지, 하필이면 지금? 진이 영 탐탁지 않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 크게 이르면 어찌해.”
“폐하. 이미 다 들통났습니다. 저쪽 분위기 안 보이십니까?”
진과 에이린은 그제야 취객들의 술잔이 텅 비어 있다는 걸 알아챘다. 구석에 앉아 있던 자가 황제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에이린과의 간질간질한 대화가 그들을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 둔 것이다.
그 작태들을 베릭이 대놓고 꼬집었거늘, 뻔뻔하게도 그들은 계속해서 못 들은 척 저들끼리 잔을 부딪쳐 댔다.
“어으, 어으. 맛있다.”
“역시 여기 닭고기가 최고라니까!”
“음. 근데 그때 그게 어떻게 됐다고?”
“그때 그게 저렇게 하다가 이렇게 됐지.”
잔만 비었나? 그릇도 비었다. 그들은 허공에다 포크질을 해 대고, 전혀 이어지지 않는 대화로 배경음을 채우고 있었다.
에이린은 못살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서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하.”
진은 그저 아쉽다며, 고개를 꺾으며 베릭을 쳐다봤다.
“어딜 갔었어?”
“…저 골목 뒤쪽으로 이안이랑 멜라니아가 지나가더라고요.”
“누구? 이안 경이랑 멜라니아?”
이안 경은 분명 로만드로의 저택에 갔다 하였는데? 아니, 그건 그럴 수 있다 치자. 멜라니아는 갑자기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베릭은 알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로만드로 님도 동행한 것으로 봐서는 마법부와 관련된 사안 같은데, 자세히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아…….”
뭔가 또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진이 그리 여기며 말끝을 흐리는 순간이었다.
쿠웅.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리는 폭발음. 진이 느낄 정도였으니 베릭과 다른 황궁친위대원이 알아채는 것은 일도 아니다. 베릭이 반사적으로 일어나 창문 쪽을 살피자, 취객들이 움찔거리며 돌아봤다.
“폐하.”
“그래.”
아마 이안과 관련된 일이겠지. 진 역시 남은 맥주를 한입에 털어 버리고는 웃옷을 챙겨 들었다.
“황궁으로 돌아간다.”
“예, 알겠습니다.”
“베릭만 나와 돌아가고, 나머지 둘은 인근을 살펴 보고하라.”
이안 경의 일이니까 믿을 것이다. 모두 자신과 바리엘을 위한 일일 것이라고.
동시에 이안 경의 일이니까 최선을 다하여 맞설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이안 경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손으로 황궁의 균형을 이루리라.
‘아.’
예전에도 이랬지. 자신의 아비였던 선황이 동결된 것을 안 뒤 깨달았던 진실 말이다. 진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이안 경도 자신도 달라진 게 없다.
진은 품에서 술값을 꺼내 놓으며 인사했다.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특히나 주방 안의 저 여인이 들을 수 있게.
“아주 즐거웠어. 또 오리다.”
* * *
타닥타닥!
새벽의 마법부가 소란스러워졌다. 분명히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대였는데, 갑작스레 들이닥친 급서 한 통 때문이었다.
마법사들은 부스스한 상태 그대로 복도를 내달려 장관실을 박차고 들어갔다.
벌컥!
“이안 님! 세상에!”
“아니, 왜, 왜 이리되신 것입니까?”
“젠장, 헤일 대장 불러와! 어서!”
“로만드로 님, 로만드로 님은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아. 이안 님. 잠시만요. 숨 천천히 쉬어 보십시오. 고개 드시고요. 피 삼키시면 안 됩니다. 제 말 들리십니까?”
“역시 추쇄 마법 탓이겠지?”
“비켜! 아코렐라 대장 왔어!”
콰아앙!
아코렐라는 맨발로 달려와서는 바로 이안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너무 놀라서일까, 그녀답지 않게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 그녀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가서 증폭제 가져와.”
그러고서 제 주위를 둘러싼 마법사들을 살폈다. 이제 겨우 조금 회복되었다. 벌써 마력을 밖으로 나누면 배로 고생할 놈들.
아코렐라는 결국 주사기를 제 팔에 직접 꽂아 넣곤 이안에게 마력을 흘려보냈다.
지이잉! 지잉!
“크흑.”
“대장, 이제 제가 하겠습니다.”
“닥쳐. 헤일 올 때까지는 버틸 수 있어.”
이럴 줄 알았다. 역시나 그녀가 맞았다. 추쇄 마법을 그렇게 썼는데 이안의 몸이 정상일 리 없었다. 아니, 엉망이었다!
그런데도 이안은 토올룬에서 바리엘까지 포탈을 열고, 쉼 없이 업무에 매진하지 않았나? 미쳤지 진짜. 이안도 미쳤고, 이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자신도 미쳤다.
“하아, 하아-”
아코렐라의 턱을 타고 땀이 한 방울 툭 흘렀다. 그러자 이안의 눈두덩이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조금씩 반응이 오고 있나 보다.
“씨발, 헤일은 언제 오는데?”
“금방 오실 겁니다. 제가 할게요, 대장.”
“아오, 씨! 됐어! 로만드로 님, 뭐 어떻게 된 겁니까? 이안 님 뭐 하다 이렇게 됐어요?”
설마 별일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악화된 거면 진짜 큰일이었다. 눈물범벅인 로만드로가 목을 가다듬으며 설명했다.
“그, 그게, 크흑! 멜라니아 영애가 하완에서 동방 마법사를 데리고 왔다 했거든. 나는 자세히 못 봤어. 이안이가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뭐가 터지는 소리가 났는데, 설마 했지.”
“잠깐만요. 누구요?”
“멜라니아?”
“아니-”
마법사들이 멜라니아를 이르자 아코렐라가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 대한 행적은 이미 이안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거 말고, 새로운 이름이 나오지 않았나?
“동방의 마법사?”
“으응.”
“마법사아아-?”
“응…….”
아코렐라와 마법사들이 눈을 번뜩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안이 그놈들 보고 와서 이렇게 됐다는 거잖아?
로만드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며, 아예 엎드려서 꺼이꺼이 울어 댔다. 반면 마법사들은 눈빛을 번뜩이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씨발, 설마 그 새끼들이-”
감히? 이안 님을?
“…뒈질려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