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
제8화. 의도
“이안. 나의 작은 아이야. 크흠.”
가정교사는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이안의 눈치를 봤다. 이 편지를 받은 서자는 까막눈이니 분명 다른 누군가에게 대신 읽어달라 부탁했을 것이다.
개중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은 가정교사.
이안은 말간 눈을 반짝이며 턱을 괴었다.
“계속 읽어주세요. 선생님.”
“너는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니? 어미는 데르가 백작님 덕분에 편안하단다. 일하지 않아도 되어 나날이 행복해. 너 또한 백작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배움에 정진하렴. 첼 도련님은 배다른 형제지만, 네가 모셔야 한다는 걸 잊지 마. 화친의 상징이 되는 걸 영광으로 여겨. 무엇보다 천려족과 공고한 관계를 쌓도록 하여라. 너와 도련님은 세대를 이어갈 희망이란다.”
편지를 읊는 교사가 힐끗,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어.”
그래. 그리고 문제의 본론.
“천려족은 궐련 대신 구룻잎이라는 걸 피운다고 하는구나. 어미도 한번 맛보고 싶다. 내년, 네 생일날 들어올 때 씨앗을 몰래 얻어다 줄 수 있겠니?”
구룻잎은 천려족이 쓰는 일종의 각성제였다.
채로 잘근잘근 씹기도 하고, 잎을 말아 태우기도 했다. 정확히 어떤 식물인지 그리고 어떻게 만드는지조차 알려진 게 없는 천려족의 비밀.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이 전투에 임할 때 잎 하나씩은 물고 뛰어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소중히 가꾸었던 화분에서 꽃이 피었다. 국경을 넘어가면 더는 너를 볼 수 없겠지.”
“…흐음.”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혀있군요. 이 편지가 닿았다면 어미가 자주 불러줬던 노래 한 소절을 적어주렴. 언제나 사랑해. 나의 아들.”
짐작하건대, 주머니에 들어있던 말린 꽃잎이 어미가 보낸 진짜 선물이었다. 또한, 마지막 문단만이 진짜 편지내용이겠지. 그녀가 나름 머리를 쓴 것이다. 암호를 요구하여, 백작이 편지를 전해주고 답신을 보낼 수밖에 없게끔.
‘어미가 편지를 보낸 김에 구룻잎을 밀수입해 오라 말을 섞은 것 같은데…….’
의아한 것은 데르가의 접근 방식이었다. 어찌하여 이런 번잡한 방법으로 이안을 꾀는가?
그저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어미 목숨을 저당 잡아 명령한다면, 이안은 이행할 것이다. 이렇게 빙 돌아갈 이유가 없을 텐데.
“이안 님?”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늘 편지 내용은 꼭 비밀로 해주세요.”
“물론입니다.”
분명 데르가의 숨겨진 의도는 더 있을 터. 이안은 그걸 알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교사는 깨끗한 양피지를 꺼내며 물었다.
“답장은 오늘 쓰시겠습니까?”
“아니요. 할 말이 너무 많아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 부탁드릴게요.”
“그렇습니까. 모친께서 기다리실 텐데요.”
재촉하는군.
하지만 쓰고 싶어도 노랫말을 모르니 곤란했다.
‘틀린 노랫말을 쓰면 어미 쪽에서 난리가 나겠지. 내가 어떻게 된 줄 알 거야.’
족쇄는 이안을 묶는 동시에 보호하는 역할이기도 했다. 혹여 오인한 어미가 자결이라도 한다면? 데르가가 이안을 옭아매기 위해 어찌 나올지 예상할 수 없었다.
‘최악이라면, 화친식 날까지 감금될 수도.’
아무래도 그녀를 직접 만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
다행히 내일이 몰린 경과의 오찬 날.
잘 이용한다면 저택 바깥으로의 외출 기회와 데르가의 의도, 두 가지를 얻어낼 수도 있을 거다.
* * *
“오. 몰린 경.”
“일주일만이군요. 데르가 백작님.”
미리 일러둔 대로, 몰린은 자신의 수행원들과 함께 저택을 찾았다. 젊고 호쾌해 보이는 사내 둘이었는데, 몰린이 중앙 행정부에서 이끌어 주고 있는 후배임이 분명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작님.”
“오찬 환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각각 맥과 드고르라 소개한 남자들이 백작 부인의 손등에 키스했다. 부인 메리는 기품있게 웃으며 제 아들 첼을 앞세웠다.
“부디 즐거운 시간이셨으면 좋겠네요.”
“아. 이분이 첼 도련님이신가요? 그렇다면 이쪽이?”
사실 헷갈릴 것도 없다.
전해 들었던 것처럼 이안은 햇빛과 같은 찬란한 금발이었으니까. 그저 예의 차리기 위한 겉치레였다.
“이안입니다.”
“반갑습니다. 말씀 듣고 참 보고 싶었습니다.”
“맥이라 부르세요. 도련님.”
첼은 이안과 같은 호칭으로 불린 게 마땅치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른들과 이안 앞에서 툴툴댈 수 없는 노릇. 첼은 제 어미 옆에 딱 붙어 정원으로 걸을 뿐이다.
“역시 브라츠 백작저입니다. 정원이 아주 멋있군요.”
“수도에서 오신 분께 그런 칭찬을 듣다니. 오늘 운이 좋은 모양입니다.”
사소하지만 서로의 품격을 재는 듯한 대화가 오갔다. 나쁜 의도가 들어간 건 아니었다. 귀족들이 으레 그러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습관적인 버릇이었다.
“주인님. 식전 음식을 들이겠습니다.”
“그래.”
집사의 신호에 하인들이 트롤리를 끌고 들어왔다.
“식전주는 뭐로 하시겠습니까?”
“날이 맑으니 셰리로 먹겠습니다.”
“이안 도련님은요?”
맥의 친절한 물음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같은 것으로 달라 할 뻔했다.
셰리는 백포도 와인. 음주를 하기에는 애매한 나이다. 그는 방긋 웃으며 과일 음료를 요구했다.
“저번 주보다 용모가 훨씬 좋아지셨습니다.”
몰린은 손을 닦으며 인자하게 웃었다. 화친의 제물로 묶인 몸이긴 하다만, 노인이 보기에 이안은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오늘을 기대해서 그런가 봅니다.”
“하핫. 그렇습니까?”
“사실 수도에 궁금한 게 많았거든요. 저번에는 제 얘기만 해서 좀 아쉬웠습니다. 그렇죠, 아버지?”
이안의 능청스러운 말에 데르가가 헛기침하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사이 하인들이 식전 음료와 간단한 샐러드 따위를 세팅했다.
“그래. 무엇이 그리 궁금하십니까? 사실 수도라고는 하나 사람 사는 것이 다 똑같답니다. 오늘 맥과 드고르를 데려오길 잘했습니다. 늙은이라 젊은이들 사정은 잘 몰라요.”
이안은 사소한 것으로 운을 뗐다.
수도 학생들은 무엇을 공부하는지, 여가는 어떻게 보내는지, 정말로 마법사를 본 적이 있는지 등등. 마법사 얘기를 할 때 몰린을 비롯한 맥과 드고르의 시선이 반짝였다.
“특히 수도에서는 보통 뭘 드셨는지 궁금합니다.”
“수도라고 해서 특별하고 풍족한 게 아닙니다. 영지에서 올라오는 특산품은 모두 황궁으로 들어가지요. 무엇보다 중앙에는 농지가 거의 없어요.”
“상인들이 유통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겠군요.”
“맞습니다. 그래서 수도의 기근은 땅의 마름이 아니라 지갑의 마름에서 온답니다. 적절한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 것이 황궁의 역할 중 하나지요.”
첼이 눈만 굴려대며 아는 척을 해대는 것과 달리, 이안은 여유롭게 맞장구치며 대화를 주도했다. 맥과 드고르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나눴다.
‘천민 서자치고는 영민하다 하시더니.’
핵심을 찌르는 통찰력과 아이답지 않은 집중력이 예사가 아니었다. 이안은 느긋한 태로 스테이크를 썰며 거들었다.
“식품은 기본 중의 기본이니 언제나 공급이 많아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먹거리를 발견한다면 참으로 좋겠는데요.”
힘주지 않은 말이었다. 날씨 이야기처럼 가벼운 말. 이안의 말에 어른들이 죄다 집중했다. 데르가와 백작 부인은 저것이 오늘따라 왜 저리 말이 많나 싶었고 손님들은 흥미로워 보였다.
특히 몰린 경이.
“새로운 먹거리라. 이안 님의 식견이 궁금하군요.”
“식견이랄 것도 없습니다. 먹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것이 알고 보면 귀한 식재료일지도 모르지요.”
“아하하. 그런 꿈 같은 일이 있을까요?”
“모를 일입니다. 굶주린 자는 살고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어대니. 그 속을 잘 살펴보면 좋은 발견을 할지도요.”
당장은 굴라에 대해 알려줄 생각이 없다. 적절한 기회가 올 때까지는 함구할 예정이었으나, 밑밥 정도는 괜찮지 싶어 흘렸다. 그러자 맥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빈민가에서는 해산물 껍데기로 스튜를 만들어 먹는다고 하더군요. 의외로 맛이 좋다 합니다. 이안 님은 드신 적 있으십니까?”
호의로 가득했던 대화 속에서 처음으로 날 선 질문이었다. 가난해서 사창가에서 살던 이안. 빈민 중의 빈민이라 말할 수 있으니.
‘의외로 매섭군.’
이안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중앙과 변경은 서로 견제하는 관계다. 황궁은 첼 대신 이안을 보내는 걸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이 천려족으로 넘어간 후, 자질에 대해 의문을 제기 받는다면? 그로 인해 바리엘에 손해가 발생한다면? 변경을 효과적으로 압박할 빌미를 갖게 되는 거다.
따라서 질문의 의중은 딱 하나였다.
‘이안. 너는 빈민가 출신이니?’
눈 가리고 아웅 하듯 세탁한 서자의 출신을, 제 입으로 못 박게 만드는 것. 중앙처 관료 셋이 동시에 들었으니 그것보다 확실한 증언이 없을 터.
“이안? 맥 경께서 묻고 계시잖니.”
백작 부인이 웃으며 재촉했다. 말 한마디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오고 가는지 모르는 것 같다. 물론 첼 역시 마찬가지.
“아무래도 그러지 않았을-”
“첼!”
첼이 더듬더듬 입방정을 떨려 하자, 데르가가 재빨리 일갈했다. 쨍그랑. 깜짝 놀란 그가 포크를 떨구고 말았다. 하지만 데르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아들을 단속했다.
“맥 경이 이안에게 질문했지 않느냐. 끼어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조심하거라.”
입 닥치라는 뜻이었다.
첼은 울상이 되어 입을 앙다물었고, 메리 부인은 식탁보 밑으로 아들의 손을 붙잡았다. 부군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자못 날카로웠다. 그리 큰 잘못도 아닌데, 어찌 그리 소리치냐는 듯. 안 그래도 저번 주에 실수하여 의기소침해진 아들 아닌가!
“저는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요?”
이안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일단은. 데르가 백작 곁에서 순종하는 태도를 보이는 게 좋았다.
“저택 밖에서 자랐지만, 아버지께서 언제나 따뜻하게 돌봐주셨습니다. 저는 누가 뭐래도 자랑스러운 브라츠 가문의 혈통이니까요.”
“오호. 분명히 그렇지요.”
모두가 거짓말인 것을 알지만, 모른 척 외면하는 웃긴 상황.
몰린이 굉장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예고 없이 훅 들어간 공격을 어찌 잘 간파했다며.
“그런 연유로 먹어본 적은 없으나 기회가 된다면 접해보고 싶긴 합니다.”
데르가가 인상을 찌푸렸으나, 별다른 말을 하진 못했다. 이안의 대답이 똑 부러졌으며, 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십니까?”
“사실 자연에서 오는 것에 귀천이 어디 있답니까. 굶주림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자체만으로 감사한 일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진미라면서요.”
순간 몰린은 이안의 대답에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주장이었는데······.
“황자 저하랑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드고르가 가려운 부분을 긁어줬다.
‘황자? 누구지?’
이안 시대를 기준으로 지금의 황제는 수 대 거쳐 올라가야 했다. 거기에 황자는 또 좀 많은가? 보통은 열 명 이상씩 자식을 두었다.
한마디로, 황제였던 이안도 100여 년 전의 황자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거다.
“게일 2황자 저하 말씀입니다. 귀족들과 길거리 음식에 관해 얘기하던 중 아주 담담하게 그리 발언하셨죠. 하하.”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했지만, 뒤에서는 꽤 흉봤을 것이다. 일국의 황자 되는 자가 교양 없는 소릴 했다고.
그나저나 게일 2황자라. 어디선가 들은 듯 굉장히 익숙한······.
“두 분이 만나면 잘 통하겠습니다.”
“이안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훌륭한 의견이라고 생각해요.”
데르가의 체면치레에 드고르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굶어 죽는 자가 한 해에도 수만 명인 시대에 그깟 길거리 음식이면 뭐 어떤가? 사는 게 우선이지.
“체면이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아무리 길거리 음식이라도 어쨌거나 가치가 있으니 소비가 되는 것이건만.”
“그렇지요. 그런데 현실은 더욱 흉흉하니. 서민들만 하여도 천민이 먹는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맥과 드고르의 한탄에 백작 부인이 끼어들었다.
“새로운 작물이 발견되어도 보급까지 또 한참 걸리겠지요?”
나쁘지 않은 화두였으나 맥락이 틀렸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어머니. 사실 보급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요? 이안 님, 의견이 있으신가 보군요.”
몰린의 시험하는 듯한 말투. 이안은 알 것 다 아는 사람이 왜 그러냐는 듯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