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0
제80화. 드라이어드
이안은 팔짱을 낀 채 방 안만 서성였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베릭은 반쯤 혼수상태에 빠져 널브러졌고, 흥분한 메렐로프 부인은 결박당해 소파에 앉아있었다. 허리를 꼿곳히 세우고 결연한 표정만큼은 여전했다.
“이게 대체 뭔지…….”
로만드로는 쪼그려 앉아, 유리 뚜껑으로 덮인 분첩과 가루를 살폈다. 베릭이 냄새를 맡고 바로 기절했다 하니, 해나가 주방에서 서둘러 뚜껑을 가져온 것이다.
“부인. 우리 할 얘기가 많을 것 같군요.”
“…….”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가 가도록 설명을 해주셔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가 곤란해질 것입니다.”
“미약이에요. 별것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하죠?”
메렐로프 부인이 묶인 손목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역시 해나의 작품이었는데, 단단하고 정갈하게 묶인 리본이 일품이었다.
사실, 그녀의 말대로 진짜 미약이라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방탕하고 놀기 좋아하는 귀족 자제들이라면 항시 파티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기도 했고, 특히나 이런 변방에서라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었으니까.
“이거, 미약 아닙니다.”
하지만, 로만드로 옆에 쪼그려 앉은 해나가 단박에 반박했다.
“종류가 다양하긴 하지만, 미약은 대부분 누런 빛을 띄고 있거나 알갱이가 좀 두꺼워요. 그런데 이건 언듯보면 분가루와 헷갈릴 정도로 희고 곱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냄새만 맡고 기절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 이안은 설명해 보라는 뜻으로 메렐로프 부인을 돌아봤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해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저 아이는 뭐죠?”
“…보시다시피, 뭐든 잘 아는 우리 식구죠.”
식구라는 말에 해나가 굉장히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내 다시 입을 닫아버리는 메렐로프 부인. 이안은 로만드로와 해나에게 잠시 나가 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을수록 얘기를 터놓고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럼, 저는 베릭 님 물수건을 가져올게요.”
“어? 어어. 그러면 나도 잠시…….”
눈치 빠른 두 사람이 서둘러 메리의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쌕쌕거리는 베릭의 숨소리만 들렸다. 이안은 그녀 앞에 의자를 끌고와 앉았다.
“메렐로프 부인. 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건…….”
“터놓고 얘기해 보죠. 생각나는 대로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드리퍼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
“정확히는, 드리퍼의 가치 말입니다.”
메렐로프 부인은 입술을 꽉 깨물며 한숨을 삼켰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안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가, 혹시나 싶어 던져봤다.
“혹시 라자산 출신입니까?”
“…뭐라고요?”
라자산. 드리퍼가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장소였다. 그녀는 한껏 어이없는 투로 이안을 노려봤다. 그도 그럴 것이, 라자산 출신이라 함은…….
“데라족인지 묻는 겁니다.”
“미쳤군요. 내가 두더지처럼 생겼나요?”
“데라족의 생김새를 아는 것으로 보아, 그쪽 출신은 맞는 모양입니다.”
라자산은 중앙을 기점으로 브라츠와 정반대에 있는 산이었다. 드리퍼를 비롯한 각종 발명품이 주목받기 전에는 그쪽 영지민들조차 그런 산이 있는 줄 모르고 있었으니. 인근을 벗어나지 못한 자라면 절대 알 수도 없고, 알 리도 없는 곳이다.
“나는, 나는…….”
부인이 지그시 노려보며 말을 더듬었다.
“나는 그들과 친구예요.”
“누구랑요? 데라족이랑? 그럴 리가.”
데라족은 폐쇄적이라 외부와 교류하지 않았다. 그저 땅굴에 처박혀서는 매일같이 발명품을 조립하고 부수며 만들어내는데 일생을 바치는 자들이었으니까.
매일 같은 하루를 살아가지만 결국에는 다른 미래를 만들어내는 종족. 후대인이 내리는 데라족의 정의가 그것이었다.
“…진실이에요. 나는 인근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자랐어요. 어머니가 드라이어드거든요.”
뜻밖의 고백에 이안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드라이어드? 제가 아는 그 드라이어드 맞습니까?”
“네. 맞아요. 나무와 운명을 같이하는 분.”
메렐로프 부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이 나무 요정의 피를 이었노라 말하고 있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으로 짐작하건대, 농담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저는 어머니의 운명을 잇지 않았어요. 정말 다행이죠.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잡아먹고, 평생 한 곳에만 뿌리내려 살아야 하는 삶이 얼마나 끔찍한지,”
드라이어드는 요정 중에서도 위험한 존재라 알려져 있다. 생명을 같이 하는 나무를 지켜야 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굉장히 괴팍하고 잔인한 성정으로 유명했으니. 사랑하는 인간과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서 산 채로 흡수한다는 행동 자체가 그 증거일 것이다.
“도저히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죠. 그래서 제가 직접 나무를 베어버리고 도망쳤어요. 딱딱하게 굳어버린 아버지 시체를 수습할 시간도 없었네요.”
부인은 문득 창문 밖을 보며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쿵쿵, 도끼질할 때마다 숲이 울렸고 땅이 흔들렸다. 새들이 날아오르며 소리 지름과 동시에 짐승들의 표효가 울렸다. 아마 어머니의 비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여기까지 온 것입니까?”
“음. 더 말하자면 긴데요. 정확히는 상단에 잡혀서 팔려왔어요. 재수 없게 숲 내려가자마자 처음 만났던 게 노예 상단이라.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저주이지 않았나 싶네요. 괜찮으면 궐련 하나 주시죠.”
부인은 팔을 들어 보이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안은 흡연을 하지 않는 터라, 바로 문을 열어 로만드로를 찾았다. 멀리 가지 않은 그가 화들짝 놀라며 총총 걸어왔다.
“로만드로 님. 궐련 하나만요.”
“어? 어어. 잠시만, 여기 있네.”
“감사합니다.”
콰앙!
그리고 다시 매정하게 닫히는 문. 로만드로는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만 지어댔다. 물론, 이안이 그걸 알 리는 없지만 말이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해요. 이안 경.”
메렐로프 부인은 한숨과 함께 뿌연 연기를 내뱉었다.
“그래서, 아까 물었던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가 되겠네요. 드리퍼의 가치, 알고 있었어요. 뭐에 쓰는지는 몰라도 데라족은 절대 쓸모없는 건 안 만들거든요. 그런데 이안 경은 그걸 어떻게 알았죠?”
“저도 여기저기서 주워들었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많이 아는데.”
드리퍼를 선물하겠노라 맘먹은 것은 사실 반쯤은 충동적이었고, 반쯤은 의도적이었다. 창고에서 드리퍼를 보자마자 손이 갔으며, 데라족이 만든 물건이라면 필시 쓸모가 있겠노라 싶었으니까.
“부인, 혹시 상단의 도착 일정을 영지 전역에 흘린 것도 부인이셨나요?”
“왜요? 그게 중요해요?”
“이상하게 부인께서 저를 돕고 있다는 의심이 들어서요.”
“웃기는 분이었네, 이안 경. 그건 의심할 일이 아니라 고마워해야 할 일이죠.”
“부인의 의도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이안의 말에 부인이 치맛단을 슬쩍 올렸다. 붉고 퍼런 멍 꽃 핀 발목부터, 살이 문드러지는 종아리 그리고 피딱지가 잔뜩 올라온 무릎까지.
이안은 인상은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더 위쪽도 보여줄까요?”
“사양하겠습니다.”
“메렐로프 백작, 그러니까 우리 남편. 제정신 아니에요. 노예 상단에서 구한 여자를 백작 부인에 올릴 정도면 말 다했죠.”
그래서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비밀리에 아내를 맞이한 것이다. 은근히 그녀를 하대하던 메리의 행동이 떠오르자, 하나둘씩 들어맞는 기분이었다.
“백작도 부인이 드라이어드의 피를 이었다는 걸 아십니까?”
“모르죠. 저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많이 닮았거든요.”
그래도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천천히 흘러가는 생체 시계 그리고 조금 더 긴 생명과 나은 신체 능력. 모든 것이 그녀가 드라이어드의 자식임을 증명하는 부분이었다.
“밑바닥 출신인 제가 남편과 이혼할 수 있을 리 없고, 그렇다고 몇십 년 동안 이런 곳에서 살기도 싫어요. 어머니의 나무를 자르고 숲을 뛰쳐나와서 온 곳이 겨우 여기라니요.”
“그래서요?”
메렐로프 부인은 대답 대신 널브러져 있는 베릭을 쳐다봤다. 그래서, 저것이 필요하다는 거다. 이안의 표정이 단번에 변하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타앗!
“…독입니까?”
“아니요. 하완 왕국에서 새로 유통된다는 수면용 환각제예요. 한 달 정도 꾸준히 복용하면 수면 중 무호흡이 온다고 하더군요. 근데 냄새 맡는다고 저리되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확실한 정보겠죠.”
“나도 그렇고, 메리 부인도 문제없이 분첩을 가져갔어요. 아마 좋은 꿈 꾸고 있을 거라 예상되네요.”
환각성 작용을 일으키며 몸 안쪽부터 갉아먹는 신종 마약. 굳이 밖에서 약을 구해온 이유는 빤했다. 메렐로프 백작의 죽음이 대외적으로 의심을 받을 시, 부검 물약을 피해가야 하니까.
“미치겠군. 메리 부인도 이걸 하고 있었다고요?”
“글쎄요. 그녀가 썼는지는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데르가에게 쓸 요령이었던 것 같아서. 하지만 이내 알았겠죠. 데르가에게 쓸 바에는 자신이 하는 게 낫겠다고.”
“어째서?”
“어째서라니. 이안 경, 그대 존재 이유가 그 이유죠.”
밖에서 데려온 사생아, 이안. 데르가의 수많은 부정의 결과이지 않나. 이안은 문득, 지하 비밀 공간에서 보았던 메리의 초췌한 모습을 떠올렸다. 마약의 금단현상이었던 게 분명했다.
“이안 경, 나는요. 메렐로프라는 이름이 끔찍하게 싫어요. 지금의 제가 한곳에 묶여 살아가던 어머니와 다를 바 무엇 있나요?”
남편을 죽이려는 행동마저 어미와 닮아있었다. 외면하고 싶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이런 걸까?
“그저 내 운명에 대한 선택의 자유. 그걸 원해요.”
“백작에게 동생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메렐로프 백작이 죽는다 한들, 영지의 다음 주인은 그녀가 아닌 백작의 동생 차지가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상관없어요. 제가 있을 곳을 스스로 정할 수만 있다면.”
게다가 지금 이대로라면 백작이 죽기 전에 그녀가 먼저 죽을 판이다.
이안은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이웃 영지라고는 하나, 영향력 확장을 위해 서로의 목덜미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처지 아닌가.
“제안할게요.”
메렐로프 부인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녀는 묶인 것을 풀어달라는 듯 손목을 내밀었다.
“적의 적은 동지라, 이안 경과 내가 손잡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저를 도와준다면, 정확히는 눈감아준다면 헌납금, 최대한 지원해 드리겠어요.”
“최대한이라. 얼마나?”
“…그건 정확히 말하기 어렵네요.”
바깥은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메렐로프 부인이 귀가해야 할 시간은 예전에 지났고, 지금은 돌려보내는 게 정말 그에게 유리한지를 따질 뿐이다.
쾅! 콰앙!
그때였다. 밖에서 들리는 소란.
이안은 천천히 문을 열어 상황을 살폈다. 낯선 사내가 사용인들과 마찰을 빚고 있다.
“장난하십니까? 마님을 왜 못 뵙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안 님과 중요한 대화를…….”
“내가 아뢸 말이 있다 하지 않소. 전언도 하지 않는 게 영 수상하니 비키시오.”
“안 된다니까요!”
“비키라고! 너희들, 마님한테 무슨 짓 했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어우 답답해! 짓은, 그쪽 부인께서 우리한테 하셨겠죠!”
메렐로프 부인의 시종이 부리는 행패였다. 귀가할 시간이 넘었는데 언질은 없지, 저택에서는 만나지도 못하게 하니 안쪽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이봐.”
이안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부인께서 지금 바쁘시니, 조금만 더 기다리게.”
하지만 시종은 앞뒤 가리지 않고 이안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이내, 손목이 묶여있는 메렐로프 부인을 발견하고 눈이 뒤집혔다.
“대체 이게-!”
“클라크! 잠깐!”
이안에게 달려드는 클라크. 사용인들이 놀라서 막아내려 했으나, 한발 늦고 말았다. 이안은 저에게 뻗는 클라크의 손목을 붙잡고 마력을 터트렸다.
지이잉!
콰앙!
“…헉!”
“클라크!”
메렐로프 부인이 고꾸라진 클라크에게 다가가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충격에 바들거리는 클라크를 끌어안으며 걱정하는 메렐로프 부인.
다들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녈 내려다봤고, 이내 베릭이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지랄하고… 자빠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