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00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00화(800/805)
제800화. 내 모든 걸 주어서
“이안 님, 아- 하십시오.”
마법사가 수줍게 숟가락을 들이밀자 이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반응에 다른 마법사가 제치고 나와 과일 찍은 포크를 내밀었다.
보다 못한 로만드로가 마법사들의 목덜미를 잡아끌며 떨쳐 놓았다.
“다들 제대로 미쳤지?”
“왜요! 로만드로 님도 아프면 이렇게 해 줄게!”
“난 비비안나가 있어!”
“이안 님은 비비안나 님이 없어요!”
“아잇, 쓰잘머리 없이 소란 피우지 말고, 어여 가서 일이나 봐! 이안 혼자서도 잘만 먹는구먼.”
이안이 정신을 차린 이후로 다시 사흘. 그는 혼자 식사할 수 있게 되었고, 조금 느리지만 걷는 것도 무리 없는 데다, 무엇보다 펜을 쥘 수 있게 되었다. 그 말인즉, 소파에 누워 급한 용무를 처리했다는 뜻.
로만드로는 탁자에 놓인 보고서를 슥슥 넘기며 서명이 올바른지 확인했다. 정갈한 필체였다. 이전처럼 필압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로만드로 님. 오후 대회의에는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리 전언해 주십시오.”
“무리하지 말래도. 폐하께서 절대 안정을 명하셨지 않은가.”
“괜찮습니다. 계속 누워 있다 보면 더 힘듭니다.”
“그,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하는데…….”
“수상님도 안 계시는데, 마법부 장관마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안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작게 한숨 쉬었다.
솔직히 헛것을 들은 줄 알았다. 정신 차리니 하완의 반란군은 와해되었고, 동방의 마법사들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데다가, 수상은 근신행이라니. 이안은 힘겹게 보고서를 넘겼다.
‘수상이 왜 근신 처분을 받았는지는 비공개로군.’
그저 체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제일 곤란했던 화총 수입 건은 무기한 연기되었으니 얼추 마무리되었다고 봐도 되려나.
“저기, 근데 이안.”
“네?”
로만드로는 이안을 걱정스레 보며 물었다.
“정말 괜찮은 것 맞지?”
황궁에서 내로라하는 의원들이 모두 달라붙어 진료를 보았으나 이렇다 할 병명을 진단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저 마법의 부작용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추쇄 마법에 대한 자료가 거의 존재하지 않아 마법사들도 이안의 회복을 도울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저 계속해서 마력을 나눠 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걱정되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괜찮습니다. 보시다시피요.”
이안은 희게 웃으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목이 너무도 가늘었다.
로만드로는 코끝이 찡해져서는, 마법사들이 놓고 간 숟가락과 포크를 집어 들었다. 뭐라도 좀 먹이는 게 먼저겠다 싶은 게다.
똑똑.
“이안 님. 황제 폐하 드셨습니다.”
“폐하께서? 안으로 모시어라.”
하지만 갑작스레 등장한 황제 때문에 숟가락과 포크는 갈 길을 잃어버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진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이안을 살폈다. 그가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안 경!”
“오셨습니까.”
“앉아 계시게. 쾌차하여 정말 다행일세.”
진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이안에게 다가왔다. 사실 이안이 처음 정신 차렸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바로 달려오고 싶었지만, 수상이 없는 터라 자리 비울 틈이 전혀 나지 않았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아니, 내가 고맙지.”
이제 다 되었다는 듯,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만 쾌차한다면 앞으로 황궁에는 바람 불 일 없이 계속해서 봄날만 이어질 터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자신의 바리엘이었다.
진은 이전의 미안한 마음을 담아 이안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참전 군인에 대한 지원금 지급이 시작되었네. 더하여 마법부에 대한 치하도 이루어질 예정인데, 이안 경. 그대에게는 내가 무엇을 주는 것이 좋을지 한참 고민해 보았어.”
“저는 괜찮습니다. 저에게 내어주실 게 있다면, 모두 마법사들에게 나눠 주십시오.”
그리 말할 줄 알았다. 마법부 장관씩이나 되면서 집 한 채 없이 지냈던 이안 아닌가. 역시나 본받을 만한 자라며 진은 다시금 웃었다. 이를 듣고 있던 로만드로 역시 대단하다는 듯이 코를 훌쩍였다.
“정말입니다. 폐하.”
이안은 그들의 반응에 조금 우습다는 듯 덧붙였다. 자신은 언젠가 미래로 돌아갈 사람인데, 지금의 치하가 무슨 의미란 말인가.
하지만 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는 그리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그럴 수 없어. 이안 경. 그대에게 백작 작위를 새로이 하사하고, 중앙에 저택을 마련해 주려고 하네.”
모든 의혹이 걷히자, 그에게 남은 것은 지하신을 물리쳤다는 공로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공작 작위를 주어도 아깝지 않건만, 이것은 신하들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공작은 귀족 작위 중에서도 제일이고, 사실상 방계 출신의 왕실 가문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10년 전 몰락한 하이만 이후로는 새로운 공작가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이, 이, 이안! 잘 되었네! 아이고, 아니지. 앞으로는 이리 불러서는 안 되겠어.”
로만드로가 자신이 작위를 받은 것처럼 흥분해서는 말을 더듬어 댔다.
하지만 이안의 반응은 차분했다. 뭔가를 고심하는 듯이. 진이 그의 낯을 살피며 의아하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왜 그러시는가, 이안 경?”
기쁘지가 않아?
그의 물음에 이안은 난감하게 미소만 지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히엘로라는 성은 이안의 바리엘에서 없던 것이다. 있는 작위도 반납하고 역사에서 이름을 지워도 모자랄 판에, 백작이라니? 게다가 중앙에 저택? 이것은 이안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안 경?”
“폐하,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든.”
“폐하께서는 저를 믿으십니까?”
하완에서 일이 생겼을 떄 자신의 말 한마디에 마법부의 소행이 아닐 것이라 단정 짓고, 황궁의 균형이 어긋난 상황에 수상에게 근신 처분을 내리며, 나아가 자신에게 백작 작위를 수여한다는 것은 믿음을 수반하지 않고서는 불가한 일이었다.
진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당연하다.”
진은 자신이 이안의 의도를 파악했다 여겼다. 토올룬에서 그가 에이린에게 했던 말도 그렇고, 이상하게 분란을 만들어 황궁에 긴장감을 조성했던 것들 전부, 이안이 자신을 위해 의도한 것이었다고.
이안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상한 질문일세.”
“폐하, 아까는 제게 자신이 걱정되는지를 묻더군요. 최근 고비를 넘긴 터라 아직 마음이 어지럽나 봅니다.”
진이 의아하다며 이안을 살피자, 로만드로가 끼어들어 상황을 중재했다. 두 사람은 진실로 이안이 아파서 그런 것이라 여기는 듯 보였다.
“기쁩니다, 폐하.”
한참이나 침묵하던 이안은 나지막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에 진 역시 웃음으로 답했다.
“별말을 다 하시어.”
“하지만 역시 작위는 받을 수 없습니다. 저택 역시 거절하겠습니다.”
“어째서?”
이안은 진의 손을 토닥였다. 그와의 시간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마력구를 만지며 신기해하던 아이. 어미에게 버림받고 얼굴이 찢어져 울던 아이. 함께 본궁 계단을 오르며 첫 대회의를 기대하던 아이. 자신은 황자라며 처음으로 신하들에게 윽박지르던 아이…….
“감사해서요.”
“이안 경.”
“감사해서, 제가 드릴 것입니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이안의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흔적이 깨끗이 지워질수록 자신의 바리엘도 변함없을 것이다.
“제게 주어진 모든 것을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진이 이안을 믿고 있듯, 이안 역시 크로니를 믿었다. 지금은 진의 곁에는 이안이 있지만, 언젠가는 그도 홀로 남을 터.
그런데 그때, 진 곁에 크로니 같은 놈이 나타난다면? 진은 분명 옳고 그름을 잘 구분하겠지만, 믿음을 깨부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게 분명했다. 이안 본인이 그랬으니까.
“모든 것을 내어서라도, 폐하께 진정으로 완벽한 바리엘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내어서라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물을 감정이 아니었다. 진은 감동했는지 말을 잇지 못한 채 그의 손만 꽉 붙잡았다.
“고마워, 이안 경.”
“폐하께서는 저만 믿으십시오.”
“물론이지. 나는 믿어 의심치 않네.”
로만드로는 실로 오랜만에 보는 훈훈한 광경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가 소매로 눈가를 콕콕 찍으며 이안을 달랬다.
“이안, 그래도 폐하의 성의가 있으신데, 명색으로라도 작위와 저택은 받는 것이 어떤가?”
“그리해 주게, 이안 경. 내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당치 않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이안이 그 어느 때보다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주위에서도 별말 없을 것입니다. 혹 제가 공작 정도 되었다면 저 또한 폐하의 체면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았겠지만요.”
진과 로만드로가 순간 멈칫거렸다. 이안의 말속에서 날카로운 저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체면을 따질 만큼 대단한 치하가 아니라는 동시에, 백작이 아닌 공작 작위를 내달라는 것처럼 들렸으니.
이안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곡해하여 듣지 마십시오, 폐하.”
“아아, 그럼. 물론일세.”
“저는 정말 작위에 대한 마음이 없습니다. 사실 히엘로령도 반납할 생각입니다.”
“반납? 어째서?”
갑작스러운 충격 고백에, 진과 로만드로의 정신이 바로 팔려 버렸다. 방금까지 멈칫했던 반응은 온데간데없고 이안의 발언에 집중하는 모습. 이안은 상대를 완전히 뒤흔드는 화술을 거리낌 없이 구사했다.
“제가 히엘로령을 신경 쓰지 못하다 보니 일전의 참극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도 게속 중앙에서 일을 보려면 히엘로는 다른 주인을 찾아 떠나보내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 이안은 지금 자신의 행동이 낯설지 않았다. 브라츠에서 처음 눈 떴을 때, 데르가를 대하기 위해 연기하던 그때와 느낌이 비슷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마음 어딘가가 아릿하니 불편하다는 것.
“그대의 걱정도 일리가 있다만…….”
진은 말끝을 흐렸다. 영지를 반납하겠다는 사람이 어찌 공작 작위를 마음에 담고 있겠는가. 아까의 발언은 그저 이안이 아파서 실수한 것일 터다.
“제가 영지를 돌보지 않은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대사막의 천려는 부족을 수습하느라 여전히 정신이 없으나, 제 누이가 지도자 자리에 올랐으니 침입과 분란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안 히엘로가 꼭 그 땅의 주인이 되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내가 더 아쉬워서 그러네.”
“괜찮습니다. 반납하는 대신, 대금을 일시로 받고 싶습니다만.”
“그것은 퀸타나 장관과 의논하면 될 일. 일단 마음부터 추스르고 천천히 논의해 보자고.”
“예, 폐하. 안 그래도 오후에 대회의 참석 예정이었습니다.”
“그 몸으로?”
“앉아 있는 것은 무리가 없어서요. 수상께서도 안 계시니 저라도 자리를 지키는 게 맞지요.”
“이안 경만큼이나 바리엘을 생각하는 자가 없을 것이오.”
“과찬이십니다, 폐하.”
이안은 칭찬에 감사하다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그러고는 흘려들었던 사안 중 하나를 넌지시 물었다. 처리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정말로, 남은 4개월이 모자라다 싶을 정도로.
“참. 시아오시는 요즘 어떠합니까?”
“시아오시?”
“반가운 소문이 들려오던데요. 클로이 영애와.”
“아아.”
진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꽤 즐거운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안 역시 그를 따라 미소 지었으나 눈빛은 알게 모르게 식어 있었다. 로만드로가 걱정스레 그를 힐끔거리자, 이안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피곤한 것뿐이라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