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05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05화(805/805)
제805화. 티모시의 버팀목
“티모시.”
이안의 부름에, 가만히 앉아 창밖을 보던 티모시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안을 알아보고는 조금 놀란 눈치를 보였다. 오래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으니.
반면 티모시는 이안이 기억하던 자가 아니었다. 어딘가 부드러워진 인상. 거칠고 날카로운 이목구비는 그대로였으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여유는 전에 없던 것이다.
“이안 장관님.”
“아아. 그래.”
어딘가 데면데면했다. 심연에 다녀온 이후로는 처음 보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이안은 희게 웃으며 앉으라 손짓했다.
“오랜만이겠군.”
이안에게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티모시에게는 10년이나 지난 과거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턱 부근을 매만졌다. 이안을 보고 있자니, 저편으로 흐려진 기억들이 조금씩 떠오른 탓이다.
“…소문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믿기 쉬운 일은 아니지. 그대는 어찌 지냈는가?”
“몇 년 전까지 마법부 별채 건설 건으로 중앙에 있었지만, 지금은 외곽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모두 장관님 덕분입니다. 언젠가 꼭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안이 내어준 통행증 덕분에 다몬 왕으로부터 목숨을 건져 이리 살아 있지 않나. 그 과정에서 처자식을 잃었으나, 이는 별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나저나 인생은 정말 알 수가 없다. 어느새 그날의 처절했던 고통은 희미해지고 지금 이리 웃고 있다니. 상상도 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바리엘이 마음에 든 것 같아 기쁘군. 혼자인가?”
원래의 이안이라면 타인의 가족사를 묻지 않을 터였지만, 티모시는 예외다. 그는 나움의 선조였으니까. 그가 여기서 새로운 가족을 만나야 훗날의 나움이 있을 터였다.
티모시 역시 뜻밖의 질문이라 여겼는지 잠시 멈칫거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자는 아닙니다.”
“그러면 되었다. 버팀목이 되어 줄 인연은 곁에 두는 것이 좋아. 특히 그대는 더더욱. 과거에 얽매이지 말게.”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자아, 그럼 일 얘기를 해 볼까?”
이안이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며 웃었다. 그가 없는 동안 진이 터를 파 두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다. 사실상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음이라. 이안은 설계 도면을 보며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십니까?”
“설계도는 누가 그렸지?”
“당시 담당했던 건축가입니다. 마법부 과반수의 동의도 얻은 설계 도면입니다.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이게 아닌데.”
이안은 작게 중얼거리더니 펜을 꺼냈다. 그러곤 이리저리 선을 쫙쫙 그어 댔다.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이곳과 이곳, 그리고 이곳이고-”
“아. 잠시만요.”
“자료실은 두 곳으로 하고 싶네. 복도를 마주 보고 좌우로 두어서 말이지. 그리고 층고는 넉넉히 하여 4미터, 아니지, 5미터는 되려나. 서측의 물푸레나무 가지가 다 보일 정도로 창문이 크니까 얼추 맞춰 보게.”
티모시는 이안의 전달 사항을 꼼꼼하게 받아 적으며 의아해했다. 마치 직접 눈으로 본 것을 이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관이…….”
툭툭. 이안은 한껏 고민하더니 열심히 무언가를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티모시는 대체 뭘까 싶어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이내 그것이 건물 외형을 본뜬 그림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런 것인데. 가능하겠나?”
“…….”
티모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삐뚤빼뚤하다 못해 어떤 기하학적 추상화를 연상케 하는 선의 합성물과 같았다.
그가 무어라 일러야 하나 한참이나 고민하며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로만드로가 마실 것을 들고서 다가왔다.
“아이고, 세상에.”
그러고는 티모시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서 안타깝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티모시 경, 아이가 있으셨군요?”
“예?”
“저도 비비가 어릴 때 그런 적 있습니다. 당장 제출할 보고서에 말도 안 되는 낙서를 해 놨지 뭡니까!”
“저기, 로만드로 님.”
“그래도 너무 뭐라 하지는 마십시오. 아기 때는 다 그러는 법이니까요. 그림을 보아하니 딱 두어 살 됐겠네요. 그래도 저 정도면 소질이 있습니다. 하하하!”
“…….”
“하하, 하, 하……?”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로만드로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는 이안의 손에 들린 펜과 그림을 번갈아 휙휙 돌아봤다. 뭔가, 저걸로 그린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이려나?
“로만드로 님.”
“으응?”
“헤일, 나키나, 토미 중 아무나 불러와 주십시오.”
“어어, 알겠네.”
로만드로는 도망치듯 집무실을 나가 버렸고, 티모시는 이안의 눈치를 보며 자세를 바로 했다. 이안은 그에게 차를 들라 권하며 물었다.
“설계 도면이 바뀌면 완공까지 얼마나 걸리겠는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투입 비용과 반비례합니다. 일전에 했던 공사는 터만 닦아 둔 것이라 크게 신경 쓰실 것 없으나, 지금부터가 관건입니다.”
“비용만 해결하면 문제없겠나?”
“그 또한 확실치 않습니다. 중간에 마법을 이용한 공사 과정도 있기에 일반적인 건설 과정과는 좀 많이 다릅니다. 까다롭지요.”
티모시는 마침 잘 되었다며 다음 보고서를 내밀었다.
“그리고 관련하여 의논드릴 것이 있습니다. 별채 건설에 필요한 마력석 목록인데, 대부분이 황궁에서 매입하는 것들이라고 들었습니다.”
“필요한 것들은 마법부로 할당될 것이네.”
“전부 말입니까?”
“아마도. 왜 그러지?”
“해당 마력석의 시장가가 갑자기 급등하여 예산을 웃돌 것 같은데, 확인해 보셨는지요.”
이안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는 티모시가 건넨 것을 찬찬히 읽더니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버고스에서 들여온 마력석은 황궁을 통해 마법부로 할당된다. 마법부 예산 범위 내에서 책정한 단가에 맞춰서. 시장가가 폭등하면 단가가 높아지니, 그만큼 할당되는 마력석 수도 줄어들게 된다.
“언제였지?”
“열흘 전쯤입니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을 때였다. 정확히는, 외교부 장관의 저택이 동방 마법사들에 의해 산산이 박살 난 날로부터 이틀 뒤.
이안은 무언가 모종의 수작질이 숨어 있다는 걸 직감하고서 혀를 찼다.
‘열심히들 사는군.’
이제 전면으로는 마법부 별채 건설 건을 막을 명분이 없다 보니, 이런 식으로라도 훼방을 놓으려 하는 것이다.
황궁 재정 담당은 퀸타나 장관. 그녀는 뒤에서 간계 부릴 인물이 아니니, 아무래도 다른 이해관계가 섞여 든 게 분명했다.
“예산이 모자라면 내 사비로 충당할 것이니, 대금으로 인한 문제는 없다 생각하고 진행해 주시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더하여 마법사님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땅속에 매장된 요정의 나무뿌리를 제거하는 일인데요, 인부를 쓰자니 시일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전 작업 때 중단되어 아직 그대로입니다.”
이안은 문득 마리브와 게일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마법부 별채 건으로 알력 다툼을 해 댈 때 제일 먼저 언급되던 것이 바로 요정의 나무였다.
축복이 깃들었다는 소문 탓에 별채 건설 반대 측에서는 절대 벨 수 없다 하였고, 마법부 측에서는 낭설이라 일축했었다.
한데 지금은 뿌리만 남은 것도 모자라 완전히 제거되기 직전이라니. 가끔은 이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들에게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니, 이안은 새삼 신기했다.
“그래. 애들에게 말해 두겠다.”
똑똑.
“이안 님. 부르셨다고요.”
“저희 왔습니다!”
나키나와 토미였다.
두 사람이 꾸벅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오자, 이안은 자신이 그린 설계 도면을 내어주었다. 그 엉망진창의 낙서를 살피던 나키나가 당최 모르겠다는 듯 고개 들었다.
“이게 뭡니까?”
“이걸 참고하여 헤일 대장과 함께 셋이서 마법부 별채 외관을 새로이 그려 내도록.”
“예? 저희가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낙서는 둘째 치고, 너무 의아한 업무 배치였다. 자신들은 전투조였으니까.
“그래.”
하지만 이안은 번복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은 마산타르 신전 지하에서 완공된 마법부 별채를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무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을까 싶은 기대가 있었다.
“이거-”
“마산타르 신전에서 보았던 그거 말씀이십니까?”
바로 들려온 물음에 이안이 놀라서 돌아봤다. 나키나와 토미 역시 똑같은 기억의 단편을 갖고 있다는 것에 놀란 눈치였다.
“아니, 헤일 대장도 같은 얘기를 했었거든요. 마산타르 신전 아래에서는 기억이 드문드문 조각났는데, 이상하게 마법부 별채라 추정되는 이미지만 남아 있다고요. 이안 님도 그러십니까?”
“…그래.”
“와, 심연이라서 그런가, 확실히 뭐가 있긴 있었나 보네요. 근데 이안 님, 설마 이게 그 외관을 그리신 건 아니지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나키나는 이안의 표정을 읽고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틀어막았다.
“맞다.”
“아. 맞으시구나. 죄송합니다. 제가 처맞을 말을 했네요. 티모시 님, 언제까지 드리면 됩니까? 건축가랑 우리 셋이서 머리 맞대고 작업하면 될 것 같은데.”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업무 없으시면 저랑 같이 나가시죠. 유능한 건축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럴까요?”
사실 업무는 많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 좋다. 티모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안 역시 그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나섰다.
“로만드로 님.”
“나 여기 있네!”
“티모시 경 돌아갑니다. 그리고 일 없는 애들에게 별채 터로 가서 나무 그루터기 좀 정리하라 일러 주십시오.”
“알겠네, 바로 준비하지. 티모시 경. 일행은 지금 별채 터에 있습니다.”
일행이 있었구나.
그들은 함께 본관을 나서 남측 계단을 내려갔다. 때마침 저 멀리 별채 터를 살펴보던 티모시 일행이 그를 알아보고서 도도도 달려왔다. 개중 눈에 띄는 한 여인.
“티모시!”
긴 갈색 머리칼과 부드러운 인상. 이안은 자신이 잘못 본 줄 알았다. 나움과 꽤 닮은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티모시 역시 희게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마차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먼저 가 있겠노라 신호했다.
“저자가 티모시 경의 버팀목이로군.”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은 이입니다.”
“보기 좋아.”
“…고맙습니다.”
나움과 티모시는 솔직히 하나도 닮지 않아 의아했는데, 이제는 좀 알 것 같았다.
이안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서둘러 가라는 듯이.
“그럼 이만. 일정은 또 보고드리겠습니다.”
“수고하게.”
티모시가 마차로 내려가자, 나키나와 토미 역시 그 뒤를 총총 따라갔다. 로만드로는 휴게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더니 놀고 있는 마법사들에게 전달했다.
“다들, 지금 나가서 나무 그루터기 좀 어떻게 해 봐.”
“아 뭘 어떻게 해요. 사람 불러요. 우리가 뭐 그런 것까지 할 필요 있나.”
“맞아. 그런 건 돈 주고 해야 합니다. 이참에 일자리도 창출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이안이 지시인데?”
로만드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이자, 마법사들이 동시에 그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한숨 푹 쉬며 주섬주섬 일어나 로브를 걸쳤다. 마지못해 한다는 티가 팍팍 난다.
그에 로만드로가 푸념했다.
“참 나, 내가 말할 때는 듣지도 않더니!”
울먹임에 가까운 소리였다. 마법사들은 들은 체 만 체 했지만.
“에이, 너무 그러지 말아요. 지금 듣고 있잖아요.”
“까라면 까야지. 이안 님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치.”
“내기할 사람? 제일 먼저 정리하는 사람이 업무 하나 넘겨주기. 어때?”
누군가 던진 그 말에, 마법사들이 일제히 밖으로 달려 나가며 마력을 터트렸다.
콰아앙! 쾅!
“그루터기만 정리하라고! 그루터기! 괜한 거 박살 내지 말고오!”
로만드로가 애원하며 소리쳤지만, 듣는 이 하나 없다. 저런 거 보면 쟤들 다 멀쩡하다니까? 미친 인간들. 로만드로는 망나니 같은 마법사들을 보며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만드로 님.”
“어어, 이안.”
콰아앙!
“으하하하! 봤지? 내가 박살 낸 거!”
“웃기시네. 어딜 슬쩍 끼어들어서.”
“비켜어어! 천둥 번개 나가신다아아!”
콰르르릉! 쩌어억!
이안 역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마법사들을 힐끗 쳐다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곤 나지막이 일렀다.
“대회의 준비합시다. 그리고 마력석 시장가 변동 건도 좀 알아봐 주십시오.”
필시 뭔가 있는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