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06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06화(806/863)
제806화. 아마도 이랬을걸?
“나보고 지금 이런 걸 먹으라고?”
외교부 장관 레이번의 아내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경악했다. 서민들에게는 익숙한 호밀빵과 대충 저민 베이컨조림이었지만, 그녀는 마치 남이 먹다 뱉은 음식을 보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아들과 딸 역시 별반 다르지 않는 반응.
“어머니. 대체 언제까지 이런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지내야 하는 겁니까? 차라리 별장이 낫겠어요.”
“드레스도 너무 까끌거리고, 불편해요.”
다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아침에 쫄딱 망했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게 가능한가 싶었는데, 진짜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자랑스러워 마지않았던 레이번가의 대저택은 흔적도 없이 폭삭 주저앉았고, 멀쩡한 식기 하나 건질 수 없을 만큼 모든 게 불타 버렸다.
하나 문제는 이깟 세간살이가 아니다.
“조금만 참아 보렴. 아버지가 분실된 서류 문제를 해결하기만 하면 임시로 다른 저택을 구할 수 있을 거다.”
바로 마법사들의 불길에 의해 깡그리 타 버린 각종 문서들이 문제였다. 채권 증서, 집문서, 은행 계좌, 비자금, 심지어는 업무와 관련된 외교 서류까지.
돈 한 푼 나올 구멍이 없는지라, 그들은 저택 부지 끝자락의 마구간지기 오두막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중이었다.
“그렇지요, 여보?”
“크흠.”
레이번은 축 처진 어깨로 연신 베이컨만 조각냈다. 외교부 장관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만큼 행색이 추레했다.
그들이 침울한 식사를 거의 끝마칠 때쯤이었다.
“주인님.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손님? 누구?”
“황궁에서 나오셨다 합니다.”
레이번은 우선 들이라는 듯 고갯짓했다. 그러자 행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마구간 특유의 악취 탓에 하나같이 안색이 좋지 않았다.
“다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기는요. 레이번 장관께서 고초를 겪고 계신다 하니 당연지사 힘을 나누어 드려야지요.”
“아이고, 세상에나. 이게 무슨 일인지, 원.”
“저택이 무너졌다는 말이 과장인 줄 알았습니다.”
“우, 우선 이쪽으로. 여기는 제 아내와 아이들입니다.”
부인과 자식들은 창피하다는 듯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허여 대충 인사만 남기고서 후다닥 시종들과 함께 오두막을 나가 버렸다. 어차피 공간이 너무 좁아서 함께 있기에는 무리였으니.
“크흠.”
“우선 이거 받으시게.”
“아니, 이게 뭡니까?”
“받아 두어. 조금씩 성의를 보인 것이니까.”
레이번은 갑작스러운 금화 꾸러미에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그 마음을 헤아리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업무적으로 엮였을 때는 진짜 무능력하고 앞뒤 꽉꽉 막힌 놈팡이 놈들이라 여겼는데, 사람이 힘들 때 외면하지 않는 신의 있는 인간들이었구나!
“염치없지만 거절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언젠가는 꼭 갚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되었어. 그나저나, 수습은 좀 되고 있나?”
“막막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요즘 누가 은행에 돈 쌓아 두고 삽니까? 몇십 년 동안 모았던 미술품이고 뭐고 죄다 잿더미로 변해서는 진짜 빈털터리가 다 되었습니다. 가불 신청을 했는데도 턱도 없이 모자랍니다.”
“이런이런, 쯧!”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군.”
“마법사들도 참 그렇네. 아무리 동방 마법사를 제압한다고 했다지만, 이런 식으로 저택을 개 박살 내다니. 이안 경이나 로만드로의 저택이었으면 저 멀리 유인해서 처리했지.”
“그건 맞는 말입니다. 무자비한 면이 없잖아 있어요.”
행정부 관료들이 슬그머니 마법사들을 질책하자, 레이번은 다시금 눈물을 훌쩍였다. 자신도 뭐라 욕하고 싶은데, 그놈의 ‘하트 사건’ 당시 보았던 아코렐라 대장의 광기 탓에 섣불리 말을 얹지 못했다. 여차했다간 다시 찾아와서 이 오두막마저 무너트릴 것 같았으니까.
행정부 관료들은 저들끼리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레이번에게 제안했다.
“저기, 레이번.”
“말씀하십시오.”
“다름이 아니라, 수상께서 근신 처분을 받으셨다네.”
“수상께서요? 어째서 말입니까?”
“그것까지는 알려지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 황궁에는 황제 폐하를 도울 자들이 없어. 트웰러 장관도 안 계시고, 제이럿 대장도 뭐… 저기 베릭 대장이 있긴 하지만 알잖은가.”
레이번은 눈물을 훔쳐 내고는 관료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유심히 살펴 들었다. 궁지에 몰린지라 본능적으로 희망의 실마리를 느낀 것이었다.
“그래서요?”
“이안 장관도 쓰러져 있긴 하지만 금방 쾌차하겠지. 마법사들이 한데 붙어서는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지금이 적기인 것 같아서.”
그들은 의자를 조금 끌어와 가까이 붙었다. 혹여나 말이 새어 나가지 않게끔.
“무엇이 말입니까? 설마-”
쓱싹? 레이번이 고개를 끽 하고 기울이자, 관료들이 더 경악했다.
“어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가?”
“아닌가요?”
“말고. 마력석!”
“마력석이요?”
레이번 이자가 많이 힘들더니 머리도 굳어 버렸군. 예전에는 척하면 척이었는데. 관료들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속삭였다.
“잘 생각해 보시게. 여름이 유난히 더울 때는 얼음 장수에게 투자를 하는 법이고, 겨울이 유난히 추울 때는 제재소에 투자하는 법일세. 누군가의 수요가 확실하다는 걸 인지한 순간, 승기를 잡는다는 거지.”
머리로는 알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었다. 안 그러면 다 떼부자 되었게? 레이번이 눈을 흘겼으나 그의 손에는 금화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여기서 이죽거리는 건 상당한 손해다.
“그래서요?”
“마법부에서 마력석을 모두 매입하리란 건 기정사실이지. 이제는 그 누구도 정면에서 별채 건설을 반대하지 못하니까. 사실상 폐하께서도 방도가 없으실 터.”
“…마력석을 매입하자고요?”
“이제 좀 알아듣는군!”
마법부가 정신없을 때 시장에 풀린 마력석 재고에 손을 조금 대는 것이다. 그리하면 두 가지 이득을 얻을 수 있다.
“가격이 오르면 별채 건설 시 사용할 마력석을 확보할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이를 막을 수 있고, 혹여 그들이 추가 비용을 차출하여 매입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돈이 되겠군요.”
“바로 그 말일세. 자네, 돈 필요하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레이번은 팔짱을 낀 채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봤다. 마력석 가격이 오르기만 하면 마법부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이득이 생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하지만 마력석 가격은 제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만. 보시다시피 재산도 없고요.”
“알고 있지. 돈이야 있다 해도 어디 한둘이 나선다고 되겠나? 그래서 우리가 이리 온 것일세. 자네는 그저 당분간 무역상들에 대한 통행증 처리만 미뤄 주면 되네.”
전쟁이 끝나자, 무역상들은 눈에 불을 켜고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다. 바리엘에는 없는 마력석과 각종 자원이 버고스에는 넘쳐 나고 있었으니까.
“칼라마트에서 보내온 마력석은 현재 황궁에서 전량 확보하고 있으니 물량을 잠그기만 해도 입질이 올 것이네. 물론 바람잡이 할 적당한 무역상들과도 말이 오가고 있어. 추후 어느 정도 이득이 생기면, 수익의 1할을 나누어 주겠네.”
“1할…….”
“적다 생각하지 마시게. 마법부에서 원하는 마력석은 대부분이 고급품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레이번은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슬쩍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근데 이안 경이 일어나면요?”
그 무시무시한 인간이 가만있을 리 없지 않은가. 분명히 모든 걸 알아채고서 관련된 인간 모두를 싸잡아 뒤집어 버릴 터였다.
그러자 관료는 별걱정을 다 한다며 웃었다.
“마력석의 단가는 최근 1년 내 최고가와 최저가의 중간값으로 책정되네. 일단 올려 두기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이지. 걱정일랑 하지 말고 협조해 주게. 언제까지 이런 오두막에서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예, 레이번 경. 다 저희에게 맡겨 주시고, 서류 몇 가지만 처리해 주시면 됩니다.”
“솔직히 저희보다는 레이번 경께 더 도움 되는 일입니다. 지금 장관께서 이러고 계신 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마법사들!”
동방이고 황궁이고 가릴 것 없이 어쨌거나 마법사들 때문이다. 레이번이 다시금 울먹이자, 관료들은 그 마음 잘 안다면서 어깨를 토닥였다.
“이렇게라도 갚아 주는 것이 도리이지 않겠습니까?”
“근데 나, 너무 무서워. 다른 사람보다 말이지, 그 아코렐라 대장. 그자가 자꾸 걸리네만.”
“아코렐라 대장이요? 마법부 내에서 마력석 담당이긴 하지만, 이런 쪽으로는 권한 없습니다.”
“자네들은 겪어 본 적 없나? 진짜 미친 자던데.”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별거 있겠나? 마법사들 다 비슷하지.
걱정하지 말라 이르는 동료들의 위로에 레이번은 결국 불룩한 금화 꾸러미를 꽉 쥐며 알겠노라 일렀다.
* * *
“이렇게 된 것 같다는 말씀이시지요?”
“아마도?”
이안은 서류를 찬찬히 살피며 중얼거렸다.
로만드로의 상상이 영 근거 없는 것은 아닌 듯싶었다. 마력석 가격 형성에 한두 부서의 입김이 들어간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만드로는 고개를 슬쩍 들이밀며 덧붙였다.
“맨 처음 시작은 외교부였네. 무역상들의 출입국 허가가 당분간 중단된다는 소문이 돌았지 뭔가. 그 때문에 마력석을 취급하는 무역상들이 물건을 싹 다 거둬들여 잠가 버렸어. 별채 건설에 사용되는 고급 마력석 외에도 대장간 쪽으로 들어갈 것들까지 말이지.”
행정부를 주축으로 하여 외교부 등등 직간접적으로 여러 사안이 얽혀 있었다.
“고작 며칠이었는데도 가격이 말도 아니게 폭등했더라고.”
“공신력 있는 황궁에서 정책을 이딴 식으로 흘리니 빠릿하게 반응이 온 것입니다.”
“최고가를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계속 경신해서 마법부에서 할당받는 양이 자연스레 줄었더군. 티모시 경이 말한 게 바로 이것일세.”
“흐음.”
그러더니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던 날 이후로는 어쩐 일인지 힘을 잃고 가격이 원상 복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이미 저질러진 일. 아무리 봐도 부자연스러운 흔적이 풀풀 풍겼다. 이안은 서류를 탁탁 쳐 대며 자리를 정리하고는 일어났다.
“일단 알겠습니다. 출발하시죠.”
“애들 좀 데리고 갈까?”
“애들을요? 왜요?”
왜긴? 로만드로가 앞니를 ‘앙’ 보이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마법부를 넘어서 시장경제까지 흐트러트리는 악의 무리를 처단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였다. 여차했다가는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판 엎기를 보여 주겠다는 듯이.
이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되었습니다.”
“그래도!”
“다들 바쁘지 않습니까.”
“그루터기 치우느라 바쁜 거지,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이안은 로브 단추를 잠그며 싱긋 웃었다.
“저 혼자로도 충분합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해. 로만드로는 슬쩍 소매를 내리고서 대회의에 필요한 서류를 챙겨 들었다.
“아 참. 이번 대회의에는 황제 폐하께서 불참하신다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네. 업무가 과중하셔서.”
“잘 되었군요.”
“무슨 의미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폐하께 안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릴 수는 없잖습니까.”
흘리듯 상큼하게 중얼거리는 이안의 말에, 로만드로는 목덜미가 쭈뼛거렸다. 하지만 바로 털어 내고는 이안을 따라 마차에 올랐다.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지요.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제일 쉬운 일이라고.”
“그랬었지.”
“하지만 돈으로 덤비는 것은 제일 위험한 일이랍니다.”
로만드로는 이안의 말뜻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곧 있으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터이니.
대회의실로 가는 마차 안, 로만드로는 두 손 모아 관료들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