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1
제81화. 내부조력자
“저자는…….”
사용인들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자 중엔 로만드로의 부하도 끼어있었다. 셰이론으로 향하는 메멜로프 교역단에서 콜린을 죽였던 자 아닌가.
“이안 님. 저자가 셰이론 산맥에서 일을 냈습니다.”
“저자가? 확실한가?”
“분명히 제 눈으로 봤습니다. 콜린을 죽이는 것까지요.”
이안은 메렐로프 부인을 다시금 쳐다봤다. 그녀는 이안의 금안에 놀란 것도 잠시, 새된 목소리로 짜증을 부려댔다. 그러는 와중에도 손은 클라크의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말했잖아요, 메렐로프의 모든 것이 싫다고!”
“그래서 교역단을 방해했다?”
“고맙다고는 못 할망정 이게 무슨 짓이에요!”
“먼저 달려든 것은 그놈입니다. 살아는 있으니 그만 호들갑 떠세요.”
그 말에 부인은 클라크의 숨이 희미하게 뱉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천천히, 그녀의 호흡 역시 안정적으로 변했다.
“콜린이 우리가 심어둔 자라는 걸 어떻게 알았죠?”
“사설 도박장에서 무더기로 사람이 사라졌었어요. 이안 경의 습격 소식과 맞물려서요. 거기에 일했던 자가 행방불명되었다가 다시 나타났으니, 당연한 의심이죠.”
“백작은요?”
“알게 뭐예요? 목석같은 노인네. 백작은 사건 조사에 관한 건 단 한마디도 지시하지 않았어요. 콜린이 거기서 일했다는 것조차 모를 겁니다.”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 어이없는 처사였다. 메렐로프 백작은 이안의 기습을 완전히 개 무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본인 영지민들이 벌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연인 사이입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음. 그래요?”
두 사람의 분위기로 봐서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로만드로는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눈치만 살살 굴려댔다. 이안은 결정했단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를 빈방으로 옮겨라.”
“네. 이안 님.”
이안의 명령에 병사들이 클라크를 짊어지며 부축했다. 메렐로프 부인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으나, 차마 반발할 수는 없었다. 외출에 동행했던 하인이 기절해 오면 저택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상황 설명 다 하고, 제가 기절시켰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 걸요.”
“좋습니다. 부인, 그렇다면 우리 이제 말을 상세히 맞춰보도록 하지요.”
이안은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인은 문밖으로 사라지는 클라크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더니, 이내 이안의 손을 맞잡고 일어섰다. 이안은 아주 천천히 그녀의 손목에 묶인 결박을 풀어주었다.
“부인께서는 자유를 원하고, 저는 헌납금을 원합니다. 하지만 백작의 동생이 버티고 있는 한 제가 후에 보상받을 거란 보장이 없지요.”
혹여 어떤 방식으로든지, 메렐로프 부인의 행각이 밝혀지게 된다면 오히려 곤란해질 것이다. 백작의 살인을 방관 혹은 방조했다 책 잡히고도 남을 일이니까.
그녀는 이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챘다.
“…굴라 매매, 말씀하시는 것 맞죠?”
메렐로프 부인의 말에 이안이 긍정의 미소를 보냈다. 사실 아까부터 느끼는 건데 험난하게 살아와서 그런가, 눈치와 셈 계산이 아주 빠릿빠릿했다. 아니, 하다못해 놀라울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네. 거기서 수익을 1차로 최대한 당겨오고 싶습니다.”
“제가 바람잡이를 하면 되는 거고요.”
“바람잡이보다는, 백작님 설득에 힘을 써달라는 거지요. 솔직히 메렐로프에는 지금 해결책이랄 게 딱히 없지 않습니까? 하완 왕국 길도 막혀, 셰이론도 막혀. 굶어 죽기 딱 좋은데요.”
“참, 그전에 말이 나와서 그런데 혹시 하완 왕국 도적도 이안 경이 하신 일인가요? 그렇다면 조금 과한 처사였다 말하고 싶거든요.”
“아뇨. 그건 저희가 벌인 일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의 은총이겠네요. 부럽기도 해라.”
부인은 쓸린 손목을 매만지며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하인에게 지시했다.
“마른 천 두 개를 가져오거라. 깨끗한 걸로.”
“네? 아…….”
이안이 그리하라는 뜻으로 눈썹을 까딱거리자, 하인은 냉큼 허리를 숙인 다음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마약 가루를 다시 챙겨 넣으려는 속셈 같다.
“그러니, 거래가 완료될 때까지는 부인께서도 최대한 협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벌써 몇 번이나 겨울을 기다리며 보냈는데. 고작 며칠을 못 참을까.”
“겨울을 기다렸다고요?”
“그래요.”
이안은 문득 부인의 증오가 얼마나 깊은지 체감했다. 겨울은 죽음의 계절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시기였으며, 눈과 바람으로 장례 절차에도 어려움이 많은 게 분명했다.
메렐로프 백작의 죽음을 최대한 조용히 묻어버리기에 안성맞춤이라는 뜻이었다.
“클라크나 잘 보살펴 주시죠.”
“…물론입니다. 아, 가실 때 굴라도 조금 내어드릴 것입니다. 클라크라는 자를 팔아서 굴라로 바꿨다 하면 되겠네요.”
영 마음에 안 들지만, 그나마 지금으로서는 제일 그럴듯한 방안이었다. 구태여 하인이 왜 기절했나 설명할 필요도 없었으며, 일단 값을 치르고 가져왔으니 메렐로프 백작은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려 들것이다.
그 과정에서 굴라의 진정한 가치를 몸소 느끼겠지.
시장통의 언어를 빌리자면, 일종의 ‘맛보기’인 셈.
‘게다가 문제가 생길시 메렐로프 부인을 옭아맬 인질로도 쓸모 있을 거다.’
이안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서둘러 해나에게 지시했다. 해가 더욱 어둑해지고 있었다. 지금 출발해도 부인은 밤중에서나 저택에 당도할 수 있었다. 더 늦어진다면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해나. 굴라 작은 주머니를 정문으로 가져와라.”
“네. 주인님.”
“마차를 준비해! 부인께서 돌아가신다.”
“네! 마차를 준비해라!”
다들 밖으로 나가며 마차를 준비하는 사이, 마른 수건을 가져온 하인이 쭈뼛거리며 유리 뚜껑에 손을 댔다. 그러자 부인은 단호하게 쳐내며 거절했다.
“내가 하겠다.”
한 손으로는 코와 입을 막고, 나머지 한 손으로 가루를 옮기는 것이 자못 조심스럽다. 베릭이 냄새만 맡고 기절할 정도이니, 마약 성분이 얼마나 독할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단기일에 죽으면 여러모로 의심을 많이 받을 텐데요.”
“말했잖아요. 한 번으로는 안 죽는다고. 액체 성분이랑 만나면 중화돼서 저자처럼 뒤로 넘어가거나 하진 않아요.”
대신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환상적인 꿈을 꾸게 될 것이다. 몽마(夢魔)에 씐 것처럼, 수면을 통해 서서히 기력을 앗아가는 부작용이 있었다. 물론, 부인에게는 그것이 목적이지만 말이다.
달깍.
부인은 분첩을 잘 닫은 다음,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더는 볼일 없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나섰다. 이안 역시 그녀의 뒤를 따르며 배웅을 마무리했다.
“클라크란 자, 오래도록 못 볼 텐데요. 안 보고 가도 되겠습니까?”
“알아서 하겠죠. 그리고…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요?”
이안은 그저 고갤 한 번 끄덕였다.
“저희 식구가 저택까지 안내할 겁니다. 부디, 조심히 들어가시길.”
“좋은 소식으로 봐요. 이안 경.”
그녀는 손등에 가벼운 키스를 받고서 마차 문을 닫았다. 문득, 발목을 기점으로 퍼진 멍 꽃이 생각났다. 이대로 돌아가면, 오늘 밤 메렐로프 부인은 무사할 수 있을까?
“저기, 부인.”
“괜찮아요. 아직까지는.”
이안이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 하자, 메렐로프 부인은 되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어머니와 닮은 구석이 없다고 여겼는데, 남편의 매질을 견딜 때마다 의도치 않게 드라이어드의 핏줄을 깨닫곤 했으니.
“…아직까지는 견딜 만하거든요.”
“출발하겠습니다.”
히이이잉!
끼익.
부인은 작은 창문으로 뒤를 돌아보며 이안과 끝까지 인사를 나누었다. 로만드로는 저택을 빠져나가는 마차를 보며 손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뭐가, 뭐, 어찌 되어가는 건지 원…….”
“오늘 본 분첩을 묵과하는 대신 부인이 굴라 매매에 힘을 실어주기로 했습니다.”
“분첩 그거, 독은 아니지? 베릭 어떻게 하나!?”
“한 번으로는 안 죽는다고 하네요. 좋은 꿈을 꾸고 있을 거라고.”
“에엥? 정말인가? 아까 지랄이네 뭐네, 욕하던데.”
“베릭이라면 뭐, 좋은 꿈의 기준이 뭔지 알 것 같기도 합니다만.”
이안은 웃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위층에서 심하게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지금, 이 시간에, 저쪽에서 소란 피울 자는 딱 한 명뿐이다.
“열어줘!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콰앙! 쾅!
클라크라는 사내의 울부짖음이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금방이라도 박살 날 것 같은 모양새에, 사용인들이 불안해하며 뒤로 물러섰다. 결국 앞으로 나선 것은 어쩔 수 없이 천려족 전사들.
“저거 다시 기절시킬까요?”
“밤중에 겁나 시끄럽군, 진짜.”
“됐다. 내가 얘기하지.”
이안은 손으로 저지하며 문 가까이 섰다. 그리고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클라크에게 상황을 알리려고 했다.
“자네 이름이 클라크라 했지.”
“…이안 경?”
덜컹!
하지만 흥분한 클라크의 절규가 먼저였다. 그는 문고리를 잡아 흔들며 거의 울다시피 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부인의 모습이 결박당한 것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안 경,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리엔 부인께서는 모두 저희를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부인 아니었으면 이미 주인님 손에 죽어나간 목숨만 열댓이 넘었을 거라고요…….”
백작이 하인을 잡아 죽일 듯이 팰 때마다, 부인은 기꺼이 그 자리에 대신 나서주었다. 저택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평소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지만, 누구나 부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연정은 진작에 백작의 귀에 들어갔으리라. 아마 부인은 사지가 찢기고도 남았을 터.
“부인께서 그리했던가.”
“예, 예…. 신께 맹세합니다. 그러니까 제발, 제가 이리 빌겠습니다. 문 열어서 무사하신지 얼굴만 보게 해주십시오…….”
“부인께서는 방금 저택을 떠나 귀가하셨다.”
“…정말입니까?”
“그래. 서로 이해관계 속에서 너의 목숨이 담보로 잡혀있으니, 그저 얌전히 기다리고 있거라. 소란을 피우면 그것이 곧 부인께 짐이 될 것이다.”
안쪽에서는 훌쩍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이안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서, 사용인들에게 문을 잘 지키라는 명령만 내려놓았다.
* * *
메렐로프 저택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는 부인이 해가 떨어지도록 돌아오지 않은 탓이다.
백작은 입 밖으로 부인을 거론하진 않았지만, 무언의 살벌한 분위기를 한껏 조성하고 있었다.
“아, 저기!”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불빛 하나. 말 두 마리가 이끄는 마차의 실루엣이 보였다. 하인들은 재빨리 부인을 마중하기 위해 저택 밖으로 달려나갔고, 이내 조금은 지쳐 보이는 부인이 내렸다.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클라크는요?”
“식사는 하셨고요?”
“마님, 그, 주인님께서…….”
여간 벼르고 있는 게 아니라고, 하인들이 걱정스럽게 말하려 했으나 바로 등장한 주인 때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리엔.”
“죄송해요. 많이 늦었죠.”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군.”
“할 얘기가 많아요.”
“지금 당장! 말해봐.”
목청이 찢어지라 지르는 고함에, 하인들이 죄다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부인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주머니를 흔들었다. 이것 좀 보라는 투로.
“클라크를 팔아 굴라를 얻어왔어요. 이안 경이 영 가격 깎을 생각을 안 하기에, 입씨름하느라 늦었답니다.”
머리끝까지 열이 뻗었던 백작이 잠깐 멈칫거렸다.
메렐로프 부인의 방문은 굴라 매매를 위한 포석이었지, 본 거래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 굴라를 얻어오다니.
“여보?”
환하게 웃는 메렐로프 부인. 그녀는 이안이 말한 바람잡이의 첫 단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이거 맛이라도 조금 볼까요? 할 얘기가 많은데, 곁들여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