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11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11화(811/863)
제811화. 신분 세탁
‘마법사 아니랄까 봐, 젠장.’
이안의 질문은 마법 주문과 같았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그날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오래전, 클리포포드 수도에서 발생한 균열 억제를 위해 제국의 마법사를 지원해 주는 대신, 훗날 이안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지 않았던가.
노아가 말을 잇지 못하자, 이안이 싱긋 웃었다.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지요.”
발뺌할 수 없었다. 지하신이 봉인되면서 더 이상 균열이 일어나지는 않을 테지만, 아직까진 수습에 바리엘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저런 연유를 차치하더라도 상대는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 모르쇠로 일관하기에는 위험한 자다. 노아는 최대한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걸까. 국혼과 관련된 것 같긴 한데, 솔직히 짐작이 안 되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십시오. 제가 당시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클리포포드에게 부담스러운 사안은 아니라고요. 오히려 반기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 시원하게 일러 보시게.”
“황제 폐하께서 마음에 두신 여인이 평민입니다.”
“…어?”
마음 단단히 잡은 것이 무색하게 노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봤자 여전히 실눈에 가까웠지만.
“지금 뭐라고?”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바리엘 역사상 평민이 황후 자리에 오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례가 없다는 것은,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사람들의 인식에 획을 긋는 일인지라.”
“고관들도 고관이고, 무엇보다 귀족들이 가만 안 있을 것인데?”
황후 자리는 단순히 사랑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황제와 가장 가까운 자리인 만큼 정치적, 경제적 이득이 분명히 존재해야 할 것이다.
평민이라면 뒷배가 없으니 고관들의 비판이 거셀 터이고, 귀족들은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다.
“혹시?”
노아 왕자는 돌연 이안의 제안이 무엇인지를 알아채고서 멈칫거렸다. 그게 맞는다는 듯, 이안이 웃었다.
“그자를 클리포포드 왕가로 입적시켜 달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클리포포드 왕실은 바리엘과 달리 친‧인척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실 것이라 여겨집니다.”
사실이었다. 노아 왕자의 친동생들만 하더라도 일단 넷. 아버지께서는 후궁을 따로 두지 않으셨지만, 형제자매들이 워낙 많은 터라 친‧인척을 세려고 들면 입이 아플 정도다.
노아가 머릿속에서 상황을 계산하는 동안, 메이 사절의 눈빛 역시 기민하게 빛났다. 이를 본 이안은 두 사람이 상당히 닮아 있다는 걸 알아챘다.
“어찌 후궁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은 아니 될 일입니다. 에이린은 황훗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훗날 자신의 미래에 문제가 생기니까. 게다가 진만큼은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하여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모두에게 그것이 좋지 않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어허.’
이안의 단호함에 노아는 머리가 찡- 하고 울렸다. 마법부 장관이 황후 자리까지 단단히 쥐려 하는 모습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치솟은 것이다.
대입하여, 클리포포드 농경부 장관이 자신의 혼사에 입김을 불어넣는다면? 길길이 날뛰어 당장 그자 마당의 포도밭을 죄다 헤집어 놓을 건데.
“마음에 두신 것은 맞고?”
“분명합니다. 운명이지요.”
메이가 은밀히 노아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황궁 내의 상황이 어찌 돌아가든, 결과적으로 보면 이는 클리포포드에도 상당한 이득임을 이르는 것이다.
‘바리엘의 황후가 클리포포드 왕가 출신이라면, 동맹이 더욱 굳건해짐과 동시에 국가적 위상이 올라간다.’
단순한 동맹이 아닌 혈맹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여인이 베릭과 같은 개망나니 과라면 체면은 좀 구기겠지만, 그럼에도 이득이 압도적이다.
“참고로, 에이린은 성기사입니다. 성스러운 힘을 이용해 마물을 처리할 수 있으니 클리포포드 왕궁 재건에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다만, 이는 클리포포드 왕궁이 직접 에이린에게 도움을 청하셔야 합니다. 뭐, 상황도 상황이고, 그녀의 성정상 거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야 뭐. 그나저나 성기사? 대단하군!”
“전쟁에서의 공로도 상당하여 민심 또한 좋습니다.”
“그래그래.”
합격! 바리엘의 황제가 선택하고, 마법부 장관이 검증한 여인이니 베릭 같을 리 없지, 암! 노아가 자신도 모르게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메이 사절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저 입적만 진행하면 되는 것입니까?”
에이린이라는 자를 황실로 보내게 되면 혹 지참금 명목으로 대금을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국혼 비용 일체를 클리포포드 측에서 담당한다거나.
장기적으로 따지면 이 또한 감내할 만한 이득이긴 했으나, 현재 클리포포드 상황이 여의치 않음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습니다. 왕실 이름만 빌려주시되 다른 것은 일절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직계가 아닌 방계도 괜찮으시고요.”
“신분 세탁을 위한 용도이니 적당한 자리만 내어주십시오.”
직계가 아니라 방계라면 부담도 줄어든다. 혹 에이린이 황궁에서 모종의 사건과 엮이게 된다면, 클리포포드 측에서 난감해질 수 있으니까. 한데 방계라면 딱 잘라서 선을 그으면 끝날 일.
게다가 황후의 출신에 대한 비밀을 클리포포드 측이 쥐게 되니, 이 또한 하나의 보험 역할을 해 줄 터였다.
“괜찮은 제안이지 않습니까?”
“예. 일단은요.”
메이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노아 역시 동의한다는 듯 이안을 쳐다봤다.
“아버지께 전언하여 논의해 보겠네. 에이린이라는 자는 언제쯤 보낼 예정인가?”
“그건 확실치 않습니다.”
“확실치 않다니?”
“에이린은 아직 모르는 일이라서요.”
사실 진과 에이린과의 관계가 어디까지 진전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번에 들어 보니까 에이린이 일하는 주점에서 만났다고 하던데…….
“잠깐. 이안 경. 황제 폐하랑 에이린, 지금 연인 관계 맞지?”
“그리될 것입니다.”
“…돌아 버리겠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리 말부터 먼저 던진단 말인가? 황당한 노아와 달리, 이안은 담담했다. 정말 말처럼 되리라는 듯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의 관계 발전은 정말 시간문제였다.
“만일 에이린이라는 자가 폐하와 연을 맺지 않으면? 우리는 제안을 받았지만 그쪽에서 파기한 것이니, 이행한 것으로 치세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있을 수도 있지?”
“제국의 황제이시고, 용모 수려하신 데다, 다정하기까지 하시며, 검술 출중에 박학다식, 심지어는 나이도 어리십니다. 이런 분이 관심을 보이는데 마음이 돌아서지 않을 여인이 있겠습니까?”
이런 젠장. 노아 왕자가 입을 비죽였다. 꼭 늘그막에 얻은 자식 자랑을 푼수처럼 늘어놓는 할아범 같았으므로. 저 어린 소년이 어찌 저런 감성을 풍긴단 말인가.
노아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 메이는 납득되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습니다.”
“메이!”
“아.”
노아가 질책했으나, 메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일 뿐이다.
얼추 대화가 마무리된 것 같으니,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자세한 것은 다시 따로 전언하겠습니다. 그럼 두 분께서는 편히 쉬시고, 저녁 때 뵙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루스웨나의 사절 대표인 파라이스 경 말입니다.”
“적당히 눈치도 있고, 욕심도 있는 자일세.”
클리포포드와 이미 우호적 관계를 맺은 터라, 노아 왕자는 그를 반사적으로 두둔했다. 평화협정이라는 명목하에 루스웨나 이권이 어찌 정해질지 모르지 않나. 그 둘이라도 힘을 합쳐야 바리엘의 거대한 결정에 말이라도 얹을 수 있을 것이다.
이안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보상금이 넉넉하여 마음에 든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마법부에 돈 들어가는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어…….”
“그럼, 이만.”
이안은 인사를 남기고는 휙 떠났다.
노아와 메이는 힐끔 서로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히엘로령 보상금이 어찌 마법부로 들어간단 말인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뭐. 그만한 사정이 있겠지?
* * *
똑똑.
“들라.”
진은 대회의 기록지를 보며 일렀다. 행정부와 마법부가 각각 적어 낸 것인데, 중요하게 다루는 안건에 따라 서술 차이는 있어도 특별히 주의할 차이점은 없었다.
그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침묵했다. 처음엔 그저 관료들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이안의 발언이 적나라했던 것이다.
‘마법부의 마력석 유통권 독점. 선조치 후보고 조치…….’
딱딱하게 서술되어 있었으나, 진은 기록지를 토대로 현실에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침 은 쟁반을 든 시종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클리포포드와 루스웨나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마법부가 직접 수행하고 있다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토올룬에서 막 도착한 맥심 트웰러 장관의 보고서입니다.”
“트웰러 장관의? 이쪽으로.”
안 그래도 슬슬 도착하지 않을까 싶던 차였다. 퇴역을 앞두고 있는 자를 토올룬에 두고 온 것이 은근히 마음 쓰였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재건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적의를 품고 있는 바누사의 곁에서 일을 봐야하지 않나.
툭.
진은 인장을 떼어 내어 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대여섯 장에 달하는 빽빽한 보고서. 재건이 어찌 되어 가고 있는지, 토올룬의 현 상황과 물자 수급 방식에 대한 보고, 앞으로의 일정, 그로 인한 복귀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폐하, 강녕하십니까. 제국방위부 장관, 맥심 트웰러 인사 올립니다. 저희 주둔군은 수도를 떠나 외곽의 소도시에 도착하여 정령술사를 중심으로 민생 복구과 민심 회복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수도가 가진 역사적 의미가 깊기에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당분간은 제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바누사는 신망이 있는 자입니다.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고, 제 백성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깊습니다. 더하여 정령술사로서의 능력도 출중하니, 특별한 이변이 없다면 이자를 통하여 바리엘은 토올룬과 소통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입니다. 토올룬 수도에서 퍼졌던 해괴한 소문의 정체에 대해서입니다.
진이 멈칫거렸다. 10년 전부터 이안에게 아주 끈질기게 따라붙었던 그 소문을 말하는 것이다. 이안이 황실의 핏줄을 이었노라는.
-소문의 근원은 바누사가 맞았습니다. 다만 이자가 하는 말이, 전부 사실이라 합니다. 모두 직접 보고 들었다는 것입니다.
“뭐?”
진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직접 보고 들었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직접 보고 들은 것이 무슨 뜻인지 등을 자세히 추궁하였으나 그녀는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짐작하건대 이안 경이 가담한 부분이 없잖아 있는 것 같습니다. 황실의 존엄을 해한 죄를 물으심이 마땅하나, 현 상황이 여의치 않기에 제 서신을 증거로 하여 품으셨다가 적당한 시기에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따로이 폐하께서도 유심히 조사해 보시길 청합니다.
“폐하, 이안 장관 도착했습니다.”
바깥에서 들려온 기별에 진이 퍼뜩 정신 차렸다.
그는 서신을 대충 갈무리하여 서랍에 숨겼다. 이전처럼 태울 수는 없었다. 트웰러 장관의 ‘이걸 증거로 사용하라’라는 당부 때문일까.
“…들라.”
“폐하. 용무가 바쁘신데 송구합니다.”
“아닐세, 이안 경. 무슨 일이신가?”
“각국의 사절단이 모두 도착했습니다. 아무래도 하완은 불참인 듯하고요. 이는 협정식에 쓰일 평화협정문입니다. 마법 관련 항목을 추가 보완했습니다. 최종본이니 확인해 주십시오.”
이안의 미소를 보던 진이 따라 웃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보고서를 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한편, 이안은 방금 전 시종장이 일렀던 말을 떠올렸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안 장관. 폐하께선 지금 토올룬에서 온 보고서를 읽고 계십니다.”
하나 지금, 책상 위엔 아무것도 없다.
협정문을 검토하는 진과 텅 빈 책상을 주시하는 이안. 겉으로는 일상과 달라진 게 없어 보였지만, 둘의 내면에는 잔잔한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