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13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13화(813/863)
제813화. 불편한 저녁 만찬
루스웨나의 사절 대표 파라이스는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칼질에 집중했다.
황제가 주관하는 성대한 저녁 만찬이라 하여 긴장과 기대로 무장했건만, 이게 맞나? 식기 부딪히는 소리 외에는 어떠한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침묵의 주축은 바로 황제와 마법부 장관.
노아 왕자 역시 뜻밖의 상황에 당황스러운지 연신 포크로 채소만 썰어 댔다. 이럴 때 고기 잘못 먹었다가는 분명히 체하고 말 것이니까.
한편, 카일라는 적당한 크기로 썬 고기를 입에 넣으며 황제와 이안을 적극적으로 관찰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먼저 대화를 틀 생각이었건만, 두 사람은 철저하게 식사에만 집중하는 모습이다.
“아, 저기-”
결국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용감하게도 파라이스였다.
이미 동맹 관계가 견고하게 이루어진 버고스, 클리포포드와 달리, 루스웨나는 절대적 피지배국 입장이었다. 이번 평화협정에 나라의 명운이 달린 만큼,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설령 자신의 목이 날아간다 한들.
“황제 폐하. 대제국 바리엘의 아름다운 황궁에 초대해 주신 데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약소하나마 성심껏 진상품을 올렸는데, 혹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진은 고기를 한 입 베어 물더니 파라이스를 빤히 쳐다봤다. 이걸 조질까, 그냥 넘길까 하는 고민이 엿보이는 시선이었다.
기이한 침묵이 이어지자, 억지 미소를 짓고 있던 파라이스의 입가가 덜덜 떨려왔다. 하지만 이내 진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행히 그냥 넘기기로 한 것이다.
“루스웨나의 성의는 잘 받았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 말씀해 주시니 기쁩니다.”
“다들 식사는 입에 맞으시는지?”
사실상 처음으로 건넨 인사다. 노아 왕자와 카일라는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맞겠냐?
“카일라 대표.”
“예, 폐하.”
“다몬 왕의 시신을 인도받겠다 하였지.”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허락한다. 바리엘에서는 쓸모도 없는 것인데. 하면, 다몬 왕의 처형은 음독으로 하는 게 좋겠군.”
진은 힐끔 이안을 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이어 가고 있었다. 속도 모르고.
“대신, 조건이 있네.”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카일라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답했다.
노아 왕자와 파라이스가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담화가 시작될 터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자는 신호였다. 버고스 다음은 클리포포드와 루스웨나이니.
“최근 바리엘에서 급격한 마력석 시세 변동이 있었네. 곧바로 정상화되었네만, 앞으로는 제도적으로 대비책을 세우는 게 좋겠다 싶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버고스에서도 도울 것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여 돕겠습니다.”
“시장가 안정의 시작은 원활한 공급 위에서 이루어지는 법. 바리엘과 거래하는 마력석 일체와 총 열다섯 개의 원자재 항목에 대하여 면세를 요구하네.”
카일라는 마법부의 마력석 독점 유통에 대한 황제의 견해를 바로 알아챘다. 명백한 반대 입장이지 않나.
이는 카일라와 의견이 같았다. 면세는 조금 아프지만 버고스는 어디까지나 패전국. 내부 정세가 안정될 때까지는 바리엘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다.
“이에 동의한다면 버고스 내의 광산 개발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하지.”
광산 개발은 그대로 바리엘의 피와 살이 될 터였다. 그와 동시에 버고스 내 경제‧산업을 활성화하는 데에도 큰 힘이 되겠지.
카일라는 이 정도면 합리적인 거래라 생각했다. 안 그래도 전쟁 배상금 지급부터 수습과 재건까지, 돈 들어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 않나.
“배상금은 미리 전했던 그대로. 기간은 10년일세. 그리고 더하여 버고스 동부인 카리토나, 알톤 지역을 헌납하고, 수도 칼라마트를 비롯한 주요 열 개의 도시에 바리엘 공관을 설치하여 중앙에서 파견한 외교관을 주재하게 하며, 더불어 버고스 새 왕조의 국기는 바리엘에서 하사할 것이다. 동의하는가?”
이를 듣던 파라이스의 눈앞이 핑- 하고 돌았다. 제 나라의 일은 아니나 그래도 이건 너무 무자비하지 않나. 곧 다가올 루스웨나의 차례가 겁났다.
“동의합니다.”
반면 카일라는 너무나도 간단히 답했다. 새 왕조의 출범을 위해서라면 무엇도 희생할 수 있다는 결의가 다분했다. 하긴, 아무리 버고스의 피가 흐른다지만 바리엘에서 나고 자랐으니, 저리 거리낌이 없을 법도 하다.
“그리고 루스웨나.”
“예, 폐하.”
“그대들은…….”
진이 말끝을 흐렸다. 할 말이 너무도 많다는 듯이 말이다. 선제공격으로 바리엘을 침략한 것도 모자라, 드래곤 신성불가침 협약까지 위반했으니 그럴 만했다.
“루스웨나 역시 10년 내로 배상금 전액을 지급하며, 서부의 헤일러너 지역, 북부의 알콘 지역을 헌납한다. 더불어 모든 무역 관세를 폐지함과 동시에, 수도 엘바사에 공관을 설치하도록 한다. 또한, 흑갑옷 전량 헌납과 관련 제작 기술을 폐기하며-”
그 이후로도 줄줄줄 나오는 루스웨나의 책무에 파라이스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나 어쩌겠나. 시선 내린 채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바리엘 측에서 인질을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것. 이는 버고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배상은 물적 자원으로만 받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마지막으로, 루스웨나에게 받을 배상금의 3할은 클리포포드에게 전달하겠다. 그 외의 사안은 클리포포드 독자적으로 루스웨나와 협의하되, 바리엘과 내용을 공유하도록 한다. 이의 있는가?”
“없습니다, 폐하.”
“대략적인 협정문의 내용은 이러하오. 그리고-”
또 있단 말인가?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진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은 제 차례만을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3국 공통으로 들어갈 마법 관련 조항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각국이 보유한 이드갈을 전량 수거하여 황궁으로 전달할 것. 바리엘의 동의 없이 가이아 외 대륙의 마법사와 접촉하지 않을 것. 이후 화총을 비롯한 신문물은 바리엘의 주도하에 다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별거 아니지요? 이안은 고기를 마저 입에 넣으며 덧붙였다.
“국가마다 자세한 항목은 숙소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의가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셔도 되지만, 늦어도 본식 전날 밤까지 부탁드립니다.”
본식 전날 밤이면, 지금이다. 닥치고 서명이나 하면 된다는 걸 돌려 말하고 있었다.
이안은 싱긋 웃으며 포도주 잔을 들었다. 클리포포드에서 가져온 최고급 포도주가 찰랑거렸다.
“대제국 바리엘과 함께, 평화로운 가이아를 만들어 가도록 합시다. 폐하께 영광을.”
“영광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동의합니다.”
모두가 잔을 들자, 진 역시 어쩔 수 없이 잔을 들었다. 자신의 영광을 원한다는 자치고는 너무 못되게 구는 것 아닌가?
그들이 잔을 가볍게 까딱이자 입구로 조명 빛이 반짝 감돌았다.
“이안 장관님.”
“예, 카일라 대표.”
“혹 식사 후에 다몬 왕을 잠시 만나도 되겠습니까?”
“그자는 말을 못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만, 대화를 꼭 음성으로만 하는 것은 아니지요.”
런크비스 왕가의 마지막 생존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어떤 의미와 의도를 품었든 간에.
“알겠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안 그래도 정리할 것들이 남았습니다.”
다몬 왕도 다몬 왕이지만, 동결해 놓은 러더포드를 풀어 두기 위함이었다.
그에 카일라는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잔을 비운 진의 골난 눈빛이 이안을 노려봤다.
* * *
다몬은 창밖을 살폈다. 그에게 허락된 풍경은 건물의 아치형 입구와 사시사철 푸른 나무 하나뿐. 계절의 변화를 느끼려면 하늘을 보는 게 나을 정도였다.
오래도록 마탑에 갇힌 그였지만, 오가는 병사들의 잡담으로 대략적인 상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전쟁은 완전히 끝났다. 그것도 바리엘의 승리로.
‘끝.’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다몬 자신에게는 다음 생이 없음을, 런크비스에게는 영원한 패배를 의미했다.
언젠가 다음에는, 안 된다면 그다음에라도, 이안 히엘로 저것을 찢어발겨 바리엘을 몰락시키겠노라는 다짐은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철컥.
자물쇠 여는 소리에 다몬이 고개를 돌렸다. 이안이었다. 역시나 변함없는 모습.
다몬을 본 이안도 그리 생각했다. 조금 길고 거칠어진 머리칼과 초췌한 몰골을 제외하면 다몬은 그대로였다.
“다몬, 오랜만이군.”
“…….”
다몬은 대답 대신 이안 뒤에 선 자를 쳐다봤다. 휠체어를 탄 여인이었는데, 어쩐지 웃음이 터졌다. 버고스의 벙어리 왕 다음은 절름발이 왕인가?
“다몬 런크비스 왕이시여, 인사드립니다. 카일라 홀린입니다.”
이안은 병사들에게 지시하여 카일라를 안으로 들였다. 다몬과 거리를 떨어뜨린 채였다. 이제는 다몬이 스스로 목숨을 끊든 말든 상관없지만, 카일라의 안전은 중요했다. 다몬의 시체도 온전해야 했고.
다몬은 낡은 소파에 앉으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냐 묻는 듯이. 이안은 그간 늘어난 세간살이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지나갔다.
“그대의 죽음이 결정되었다. 전 왕조에 대한 예우로 사약을 내릴 것이다.”
10년 넘게 죽어라 살려 두더니, 이제는 가치가 없어졌다고 죽인다는 게 우습다. 사약? 혀가 없어 쓴맛은 못 느끼겠군. 고맙게도.
“카일라 대표. 필담을 나눌 펜과 종이입니다. 이것은 바리엘의 재산이니 밖으로 가져갈 수 없음입니다.”
대화가 끝나면 이안이 이를 살펴보겠다는 말이었다. 특별한 내용은 없겠지만, 그래도 알아 두어서 나쁠 것 없으니까.
밖에서 마법사가 신호를 보냈다. 이안은 침실을 나서며 다몬을 돌아봤다.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고, 다몬의 눈빛이 이글거렸으나 이안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방을 나섰다.
“러더포드는?”
“밑에 있습니다. 동결 해제 준비 끝났습니다.”
끼이익.
문을 열자, 눈을 감고 차분히 누워 있는 러더포드가 보였다. 마력봉인석 족쇄로 사지가 단단히 잠긴 채였다.
이안은 혹시 몰라 모두에게 나가 있으라 지시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그러고는 아코렐라가 만들어 준 물약 뚜껑을 열었다.
마법사들이 조심스레 뒤로 물러났고, 이안은 천천히 그의 입에 약을 흘려보냈다. 조금씩 안색이 돌아오는가 싶더니, 감겨 있던 놈의 눈두덩이가 파르르 떨렸다.
“러더포드. 정신이 드나?”
그는 천장을 멍하니 보다가 이내 제 사지가 묶여 있음을 깨달았다. 아기아르의 지하 감옥인가? 아니면-
“여기는 바리엘 황궁이다. 전쟁은 끝났고 네놈들은 패배했다. 그 대가로 내일, 네놈의 처형이 거행된다.”
“…이런.”
다시 돌아왔군. 황궁으로.
러더포드는 체념하듯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무한 환생으로 인해 잠식되어 가던 영혼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으니, 한편으로는 기꺼웠다. 다만, 미련과 증오의 바리엘을 망가트리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뿐.
러더포드가 이안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미래에서 온 네놈과 달리 나는 과거에서 왔으니까.”
“……!”
이안의 눈동자가 커졌다.간과하고 있었다. 가이아의 모든 이들이 비를 맞거나 마셔 기억을 잃은 동안, 러더포드는 동결되어 있었다는 걸.
이안이 안도하며 작게 웃었다.
“큰일 날 뻔했어.”
애들을 물리지 않았으면 곤란했겠지.
러더포드는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라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