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814
변경백 서자는 황제였다 814화(814/863)
제814화. 예?
“흐음.”
이안은 탁자에 걸터앉은 채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무언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철컥- 철컥- 이안의 움직임에 따라 마력봉인석 족쇄가 쇳소리를 냈다.
이에 러더포드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불길함을 직감했다. 죽음을 앞두고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우스웠지만, 눈앞의 소년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다.
“아아, 기다려. 생각 중이니까.”
그리 이른 이안은 궁리를 계속했다.
금언 마법이 제일이긴 하다만, 그럴 만한 힘이 없다. 불길을 치솟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몇 날 며칠을 앓아누워 죽다 살아나지 않았나. 그보다 고차원적인 금언 마법을 쓰면 여파가 어느 정도일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마법사의 힘을 빌릴 수도 없는 노릇. 말이 새어 나가면 금언 마법을 거는 의미가 없다.
‘역시 혀를 자르는 게 제일인가.’
하지만 이는 황실과 합의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독단적으로 저지르면 필시 조사가 나올 것인데, 다른 건 그렇다고 쳐도 러더포드가 까막눈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필담으로 상황을 유추하다 보면 이것 또한 금방 탄로 나게 될 터.
이안은 까다롭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문 쪽으로 다가가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끼이익- 소리에, 밖에서 대기 중인 마법사들이 반응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가서 물 한 잔 가져와라.”
“물이요? 그것만요?”
“그래.”
이내 건네받은 물 한 잔. 이안은 러더포드의 턱을 가볍게 눌렀다. 그러고는 벌어진 입에 물을 흘려보냈다. 놈이 저항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이-!”
“쉬이.”
이안은 최대한 흘리지 않게끔 조심조심 물을 먹이고서 시간을 확인했다.
‘바르사베 때를 생각하면, 물을 마시고 나서 오래 지나지 않아 기억을 잃었다.’
이안은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차분히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러더포드로서는 너무도 의아한 행동이었다. 저것이 드디어 미쳤나? 갑자기 물을 처먹이더니, 이제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 방치하다니.
“흠.”
그렇게 10분 정도가 지나자, 이안이 러더포드를 돌아봤다. 그는 입을 꽉 다문 채로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러더포드, 하나만 묻지. 나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원하는 게 있으면 말로 해. 어차피 내일이면 죽을 목숨인데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아니면 이게 바리엘 황제의 자비인가? 그것참 고상하시어 나 따위는 감히 이해할 수가 없군.”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이안이 바리엘의 황제였다는 걸.
“…이런.”
이안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듯 작게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로써 증명된 셈이었다. 종전 당시 내렸던 지하신의 비는 이제 완전히 힘을 잃었음이.
예상은 했었다. 지하신은 심연 밑으로 떨어졌으니, 그의 부산물 또한 가이아에서 영향력을 잃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 이미 기억을 잃은 자는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는 효과가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래 봤자, 가이아에 몇이나 남아 있겠냐마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앞으로는 ‘이안 베로시온’의 기억을 지울 방법이 없다는 거다. 오로지 ‘인위적인 명령’ 외에는.
“이안!”
러더포드는 답답하다는 투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이안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허공만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아이의 녹안은 놀랍도록 차분해 보였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최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뭐가 어찌 되든, 재밌게 흘러가겠어.”
러더포드의 처형까지 11시간 남짓. 그사이 이놈이 ‘이안 베로시온’에 대한 무언가를 폭로할지, 아니면 이대로 침묵하다 머리가 떨어져 나갈지는 모르겠다.
다만, 무엇이 되었든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이안 베로시온’이 세상에 폭로된다면 예상보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문제 되지는 않을 터.
아니-
작은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인지라 오히려 도움 되겠지. 이미 진과의 전초전은 시작되었으므로.
“…뭐?”
“쉬어라. 네놈의 진짜 마지막 밤이다.”
“이안!”
쾅!
이안은 대답 없이 나간 뒤, 문을 단단히 닫아 버렸다. 그에 복도 끝에서 그를 기다리던 마법사들이 총총 다가와 물었다.
“이안 님. 오래 걸리셨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정신이 나갔나 보다.”
“예? 누가요? 러더포드요?”
“그래. 헛소리를 지껄여 대니 접근을 제한토록 하라. 곧 죽을 대역 죄인에게는 식음도 아깝다.”
“알겠습니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예, 하루 안 먹는다고 죽겠습니까? 아, 죽으면 좋은 거겠지요? 아무튼 처형대에 올릴 때까지 관리 잘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 위쪽을 올려다봤다. 아직 카일라와 다몬이 대화를 나누고 있나 보다. 뭐 그리 할 말이 많을까 싶지만.
“담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카일라 영애를 숙소까지 안전하게 모셔라. 명심해라. 내일 해가 뜨면 다몬 왕에게 사약이 내려질 것이다. 시체 처리를 위해 동결 마법이 필요하니, 담당자들은 일찍이 나와서 준비하여야 한다.”
“예, 이안 님.”
“그리고…….”
혹시 내일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놀라지 말라 이르고 싶었으나, 이안은 되었다며 말끝을 흐렸다. 어차피 한 번은 겪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으니까. 이안은 자연스럽게 지시를 바꾸었다.
“나는 잠깐 외출할 것이다. 로만드로 님과 둘이서만 갈 것이니 특이 사항 있을 시 바로 전언하라.”
“두 분이서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번에도 둘이 나갔다가 이안 님 쓰러져서 돌아왔잖아요? 마법사들이 영 불안하다는 시선으로 이안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한편, 저 멀리 마차를 세워 두고 기다리고 있던 로만드로가 이안 일행을 발견하고는 멈칫거렸다.
“다들 왜 따라 나와? 일 안 해?”
“아니이, 그게 아니라요…….”
“어여! 어여 썩 들어가서 일 봐!”
“로만드로 님, 이번에는 진짜 이안 님 잘 보살피셔야 합니다. 또 그런 일 생기면 차라리 로만드로 님이 대신 쓰려져 실려 오란 말입니다!”
“저저, 저, 미친 인간!”
“아앗!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로만드로가 이를 앙 다물고 덤벼들자, 마법사들이 장난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흩어졌다.
작은 소동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이안은, 손수 마차 문을 열고서 올랐다. 그러고는 물었다.
“에이린이랑 보기로 한 곳이 어디입니까?”
* * *
“에이린-!”
“네?”
주점 입구 앞을 연신 쓸고 닦던 에이린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주인장이 의아하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곧 있으면 개점 시간인데, 밥 안 먹을 거냐는 얼굴이다.
“아, 저는 이거 마저 하고 들어갈게요. 먼저 드세요.”
“그래도 같이 먹지.”
“아까 점심 소화가 덜 됐나 봐요. 저 신경 쓰지 마세요.”
에이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빗자루를 꽉 쥐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부에서 연락을 받은 게 고작 몇 시간 전이었다. 자신을 은밀히 만나고 싶다는 내용의 서신 한 장. 그 한가운데에는 ‘이안 히엘로’라는 서명이 정갈히 찍혀 있었다.
주인장이 알겠다며 들어가자, 에이린은 다시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혼자 나와 있으라고 했었지.’
뭘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이러시는 걸까.
에이린도 눈과 귀가 있다 보니, 사실 자신을 둘러싼 각종 소문을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와 그녀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추측부터 시작해, 곧 그녀가 황궁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낭설까지.
‘분명 이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는 거겠지? 하아, 젠장.’
히이잉!
타닥타닥!
그때, 좁은 골목을 비집으며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에이린 앞에 딱 멈추더니 이내 마차 문이 열렸다.
“에이린.”
“이안 장관님.”
“오랜만이군. 타거라.”
“타, 타요?”
이대로? 바로 황궁 지하 감옥으로 가는 건가요? 에이린이 빗자루를 든 채 머뭇거리자, 로만드로가 허허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바퀴만 같이 돔세. 우리도 내일 처형식 때문에 시간이 없거든. 딱 10분만 내어주어.”
“아, 알겠습니다.”
에이린은 침을 꼴깍 삼키며 이안과 로만드로 앞에 앉았다. 그러자 마차는 언제 멈췄냐는 듯 다시 힘차게 골목을 내달렸다.
“본론만 말하지. 에이린. 황제 폐하와 함께할 생각이 있나?”
“예?”
…너무 본론인데요. 에이린은 빗자루를 꽉 쥐고서 어찌 대답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이안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대는 영광스러운 성기사지만, 폐하와 함께하기에는 주위의 반대가 많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참에 클리포포드의 도움을 받아 그쪽 왕실 입적을 진행하는 게 어떨까 싶어.”
“예에에에?!”
이게 무슨 벼락 떨어지는 소리람? 에이린은 너무 놀라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마차가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몸도 스르륵 같이 움직였다.
“쉽게 말해, 신분 세탁이지. 그만큼 신속하고 은밀히 진행되어야 해. 그대가 일하는 주점 주인조차 모르게. 클리포포드 왕실로 가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으며 기다리면, 적절한 시기에 혼담이 들어가 다시 바리엘로 돌아오게 될 거다. 대신, 그사이 그대 마음이 변하면 언제든지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나면 되고.”
“저, 저기 이안 장관님.”
“왕실의 교육은 흔치 않은 기회. 클리포포드가 요즘 좀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그곳에 있다 보면 재정적으로는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을 거다. 그대는 어디까지나 왕실의 일원이니까.”
덜컹! 마차가 흔들리는 건지, 아니면 심장이 흔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에이린은 소파 등받이에 바짝 붙어서는 멍하니 이안과 로만드로를 번갈아 쳐다봤다.
“무엇보다 클리포포드에는 균열 사태 때 넘쳐 나온 마물이 존재하지. 성기사인 자네의 도움만을 기다리고 있어. 여러모로 서로에게 좋은 기회이지 않나? 어떤가, 하겠는가?”
“너,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원래 운명의 갈림길은 그런 것이네.”
에이린은 주저했다. 침묵이 이어졌지만, 이안과 로만드로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고민할 시간을 짧게나마 주려는 것이었다.
“저, 정말 클리포포드 왕실로 가는 것입니까?”
“왜? 설마 내가 황제 폐하의 스캔들에 연루된 평민을 처리하려 일을 벌이는 것으로 보이나?”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습니다.”
“황제 폐하의 곁에 있고 싶다면 왕실 입적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그러니까 내 말은, 황후가 되고 싶으면 말이지.”
황제의 사랑에만 기대는 지금의 관계가 만족스럽다면, 후궁에서 멈추면 된다. 하지만 에이린의 성정상 그걸 원할 것 같지 않았고, 이안 역시 만족할 수 없었다.
로버사이드가 괜히 진의 꿈에 나와서 에이린을 점지해 주었겠는가? 그녀가 있어야 진의 바리엘은 완전해질 것이고, 나아가 이안의 바리엘도 완전해지는 것이다.
“…할 수 있을까요?”
“물론. 내가 도와주니까.”
“…욕심 같습니다.”
“두려워할 것 없다. 그대는 자격이 있어.”
“그래, 에이린. 이건 도전이라고!”
로만드로까지 옆에서 합세하여 거들자, 빗자루를 붙든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결심했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지니 볼만했다.
“그럼, 저, 가 보겠습니다. 클리포포드로.”
이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마부석 쪽을 톡톡 두드리며 신호했다. 에이린은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말을 더듬어 댔다.
“어, 어, 언제부터 가면 될까요?”
“지금.”
“예?”
끼이익!
마차가 멈췄다. 에이린이 놀라서 창문 밖을 보니, 황궁 입구였다. 로만드로는 마차에서 내리며 에이린에게 당부했다.
“명심하시게. 그대는 클리포포드의 왕족이니 어디서든 당당한 자세를 보여. 혹 불편한 점이 있거나 문제가 있다면 마법부로 연락 주면 되네. 1차적으로는 마부가 도와줄 것일세. 저리 보여도 실력이 아주 출중한 용병이거든.”
“예?”
“가족은 없으니 되었고, 주점 주인장에게는 내가 말을 전하겠네. 일손은 이미 구해 뒀으니 걱정 말고. 아. 이건 마력석인데, 먼 거리를 연락할 수 있게 하는 물건이네. 사용법은 적어 두었으니 참고하시고-”
“예?”
“그럼, 조심히 가시게.”
“예?”
“또 보는 날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걸세.”
타앙!
로만드로의 폭풍 같은 설명에 에이린은 바보처럼 ‘예?’라는 대답만 연달아서 해 댔다.
그에 이안은 그저 싱긋 웃으며 마차 문을 닫았고, 잘 가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지금쯤 노아 왕자가 클리포포드 왕에게 전서구를 보냈을 것이니, 딱 알맞게 도착하겠지.
아직도 상황 파악이 덜 된 에이린은 마차 창문에 얼굴을 대고서 황당한 눈으로 이안과 로만드로를 쳐다보았다. 저 멀리, 점이 될 때까지.